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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탄하는 기사(2)

- 반박지탄, 그 이어지지 않는 시간, 한 번 더(2)

by 블랙스톤

젊은 기사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수도에. 저절로 허리가 세워지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보더니 기사가 혼자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뒤질래?”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조금 뺐다. 여인은 그런 기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꼬락서니 봐라. 놀고 있네. 극도로 발달한 신체 덕에 그 작은 중얼거림마저 또렷하게 들려왔다.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기사에게 다가왔다. 아까 문을 열 때의 우아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다가온 여인은 앉아 있는 젊은 기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야! 이 멍청아. 왜 연락 안 해. 아빠가 얼마나 걱정 한지 알아?”

“편지했잖아!”

“위로 편지는 당연히 보내줘야 하는 거고. 아빠가 먼저 편지를 보냈으면 너도 답장해야 할 것 아냐. 꼭 내가 이렇게 찾아오게 만들래? 혹시 내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냐?”

“널 봐서 뭐 해! 그럴 리가 없잖아!”

“너? 오늘 진짜 숨지고 싶구나?”

“아악! 미안! 누나! 아파! 그만해!”


여인은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기사를 이리저리 내리쳤다. 갑옷을 피해 내려치는 모양이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었다. 몇 대를 맞은 기사가 참다못해 팔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하자 여인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가만히 기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너 뭐 하냐. 멍청이같이. 요즘에도 맞고 다니냐?”

“무슨 소리야!”

“지금 네 꼴을 봐. 딱 첫 대련 때 나한테 얻어맞고 네 방에 처박혀 있던 모습 그대로네.”


기사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훈련용 갑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상태로 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댄 탓에 의자는 엉망이 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방도 더러운 발자국과 몸에서 떨어진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뭔가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였다.


여인은 조용히 서 있었다. 아까의 험한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그저 그렇게 서서 기사의 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큰 한숨이 몇 번이나 지나가고 바닥만 바라보던 기사의 머리가 조금 들렸다.

여전히 여인은 기사를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기사의 눈이 여인의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여인은 생긋 웃음을 보여주었다.

뭔가 긴장한 듯한 모습이던 기사도 여인의 웃음을 보고 나서야 뭔가 멋쩍은 웃음을 내보일 수 있었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여인은 여전히 기사를 기다려주었고 기사는 여인의 검은 드레스를 이제야 발견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기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누나는 괜찮아?”

“편지로 위로해 줬으면 됐어. 첫 번째도 아니고.”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노력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여인에게는 노력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저 세상이, 시대가 그녀에게 강요하고 강제했고 자신을 최대한 누르며 순응하는 그녀에게 거침없이 더한 시련을 던져댔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두 번의 정략결혼.

결혼식을 올리기만 하면 급사하는 남편으로 인한 구설수.


함께 목검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며 시원한 바람이 흘린 땀을 씻어 주는 것이 제일 좋다던 누나는 미망인이 되자 저택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눈치를 볼만한 배경이나 쓸만한 재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불길하다며 시집간 가문에서 내쳐졌다. 두 번이나.


주변의 시선과 평판이라는 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도 옭아매는 것이라, 날 선 시선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저택에만 머물렀다.

모든 행동을 조심했고 어지간해서는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강하게 흔드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커튼 사이로 몰래 밖을 보곤 했다. 마치 흩날리는 바람의 머리카락을 세듯이 바람이 스치고 간 흔적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다고 된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좋다. 네 탓이 아니다. 신경 쓰지 말아라. 그 어떤 말도 그녀에게 가 닿지 못했으므로 그런 그녀의 등을 보면서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끔 등 뒤의 가족을 느끼고 돌아설 때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가족들은 마주 웃어주었다. 최대한 밝고 기쁘게.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가서 닿길 바라며.

그리고 그런 그녀가 지금 이 먼 길을 찾아와 기사에게 괜찮냐며 위로를 보내주었다.


스승의 딸이며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누나이며, 훈련이 힘들어 울 때면 다가와 엄마처럼, 때로는 짓궂은 친구처럼 위로해 주는 사람. 고마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가까운 사람이기에 왠지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다. 언젠가 이 일로 놀릴 것만 같아서.

나중에, 미래에, 아주 먼 미래에도 가족으로 함께 할 사람들에게 놀릴 거리를 주는 것만 같아서, 피하고 싶었다. 우물쭈물하는 기사를 보던 그녀는 소리 내어 가볍게 웃었다.


“세상이 너만 때리는 것 같지? 세상은 너만 바라보지 않아. 세상은 그냥 흘러가는 거고 그 흐름에 아주 작은 우리가 치이는 것뿐이야. 흐름에 휩쓸리지 말고 네가 쥔 것들을 꼭 껴안아. 정 힘들면 돌아와도 돼. 우리가 있잖아.”


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기사가 처한 상황이나 편견, 그리고 지금까지의 노력을 설명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기사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분명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기사의 상황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 다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기사의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 걸 기사는 잘 알았다.


그녀가 건네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는 가시 하나 돋쳐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기사의 곁에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따뜻함을 전해주고 싶어 고심하는 말들이었다.

그렇기에 기사는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사의 표정이 편안해졌고 여인은 자신의 향기를 맡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기사는 그녀의 검은 옷마저도 예쁜 꽃잎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참 예쁜 웃음이었다.


“우리의 검은.”


기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웃던 그녀는 살짝 멈칫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기사의 뜻을 이해했는지 앉은 기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념을 이어서 이야기했다.


“후대로 흐른다.”


기사가 검을 배운 그녀의 가문은 변방이면서 평화로운 곳이어서 뛰어난 기사를 배출한 적이 없었다. 오러를 뿜어낼 수 있는 젊은 기사는 가문 역대 최고의 실력자였다.

스승의 검을 뛰어넘던 날 스승은 가문의 정신을 이야기해 주었다.


후대로 향하는 검.

미래에는 더 나아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검.

제자와 스승이 함께 검을 연구하고 더 나아질 방향을 찾는다.


배움에는 한계가 없으며 더 나아질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모든 것은 후손들이 평가해 줄 것이며 자랑스러운 선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앞으로 갈 방향을 찾는다. 좌절하고 괴로워하다 쓰러지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 일어선다. 무엇도 없다면 바닥에 기대서라도 다시 일어선다.

더 나은 미래는 분명 내가 쥔 단 하나의 검에 달려 있으니까.


그것은 검을 마주하는 정신이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젊은 기사가 노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만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도, 그 스승의 스승님도 그렇게 살아왔기에 지금 시대에 자신이 오러를 뿜어낼 수 있었다.

선조들은 한번 지나온 길도 두들기고 두들겨 결국 미지의 세상이었던 오러의 세상까지 가는 길을 젊은 기사에게 펼쳐주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 착오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기사는 자신이 느낀 좌절이 오만이었음을 인정했다. 당연하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장과 다른 이들의 편견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느꼈다.


기사는 어깨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보며 그녀와 가문이 아니었다면 아마 정말 고향으로 돌아갔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갑옷 위에 올려져 있어 온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히 그녀의 손은 기사를 지탱하고 있었다. 가문의 모든 것들이 기사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분명한 손길을 느끼며 기사는 고개를 들었다.

기회를 잡은 자신이 기회조차 없었던 이 앞에서 배부른 투정을 부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분명히 투정이었다.

부조리하다고 느꼈지만 분명히 기회는 주어졌으며 그것을 자신이 붙잡지 못했기에 튀어나온 투덜거림이었다.

처음 검을 잡기 위해 스승의 앞에 섰을 때 스승은 말했다.

건국왕을 따르던 일반 병사에서 시작된 검이며 후대에 조금 더 나은 검을 이어 주기 위한 검이라고.

방향을 잃지 않고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지금이 아니라면 더 먼 곳을 바라보며.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검은 후대로 흐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어지니까.”


검도 인생도 우리도. 모두 이어져서 단단히 서로를 받쳐줄 테니까.


기사는 검은 상복을 입었지만 지금의 누나가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어쩌면 이 순간, 기사는 ‘우리’라고 느끼던 누나와의 관계에서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처음 느끼고 가슴이 뛰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사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모든 것을 털어버린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럼 나가서 밥이나 먹자. 오느라 힘들었다. 얼른 가서 밥 차려. 아, 내 방이 어딘지 안내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녀가 하는 말을 노인은 홀린 듯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동시에 말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생생하면서도 깨지 않는 지금의 순간에서 노인은 젊은 기사와 함께 방을 나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입안에 맴도는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한참이나.


그랬지. 그랬었어. 그랬었는데.

그래서 아직 나는 이어주지 못했구나.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바라면서도 이어받을 손이 들어올 자리조차 남겨두지 않았으니.

노인은 왕국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손을 바라보았다. 그 텅 빈 두 손을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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