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콤한 꿈을 찾는 그대에게
“좋은 일이죠. 분명. 더없이 좋은 일인데 말이죠.”
그녀는 다시 칵테일을 들이켰다. 이미 과음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이킬 때마다 쉽게 넘어가는 이 칵테일의 끝없는 시원함이 마음에 들었다.
답답한 현실, 갑갑한 가슴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청량한 이 맛이,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두 번째 월급을 받았어요. 두 번째인데도 놀랐어요. 여전히 많았거든요. 눈여겨본 것들을 망설임 없이 구매하고도 남을 정도로.”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두 번째임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월급.
첫 번째는 그저 기뻤다. 많아진 월급은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이야기이니까. 그래서 첫 번째 월급을 받았을 때는 기분 좋게 돈을 쓰고 다녔다.
일회성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더욱 돈을 쓰기가 쉬웠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 느꼈다.
다음 달이 되어도 그다음 달이 되어도 그저 행복할 줄만 알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 번째 월급을 받고 나자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커다란 돈이 정기적으로 자신에게 오는 것이 불편해지다니. 어이가 없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이런 불편한 기분을 감수해 가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불편함은 분명하게도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음에도 항상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가난이란 부끄러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자란다면 채워나가면 그뿐.
그녀는 자신을 부풀리기보다 나보다 나은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조금이라도 자신을 키워야 한다고 배웠다.
가난이란 것이 물리적인 것을 넘어 정서적으로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 그녀가 지금 불안함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새로 나온 칵테일을 보고 그녀는 기존의 잔에 남아 있던 칵테일을 마저 들이켰다. 빈 잔을 앞쪽으로 밀어 두고 새 잔을 앞으로 끌어왔다.
그녀는 그 과정이 마치 자신의 처지 같다고 느꼈다.
비어있는 자신을 밀어 두고 새롭게 가득 찬 자신을 받은 그 과정.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제값을 치를 예정이기에 당당하다는 것이고 첫 월급을 받을 당시의 자신은 원장과 약속한 것이 있기에 당당한 척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졸업장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고요.”
처음 영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될 때는 그저 대학교 생활의 용돈 벌이였다.
영어 학원에서의 간단한 사무 업무는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었다.
선생님들의 수업 준비도 돕고 간단한 프린트까지도 해야 하는 작은 규모의 학원이었는데 운 좋게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학창 시절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수능 영어는 항상 만점이었던 그녀지만 스스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아르바이트 기회를 통해 영어를 배워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선생님들과 대화를 하거나 함께 무언가를 먹을 때 주제가 영어로 흐르게 되면 그녀의 영어는 칭찬을 받았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 치고 영어를 잘한다고.
발음이나 단어의 쓰임은 어색하지만 어떤 흐름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언어 영역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기뻤다. 대학에 오고 나서 듣는 첫 칭찬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칭찬을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는 너 오늘 예쁘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학창 시절부터 쌓아 올린 공부가 칭찬을 받는 것은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영어 칭찬을 받을 때면 기분이 좋아졌고 학원 수업 준비물들을 모두 읽어보고 발음해보기도 했다.
평소와 다르게 매끄럽게 입안에서 굴려진 영어 발음을 발견할 때면 그날은 온종일 웃음이 나왔다.
어느 날 프린트를 전달하기 위해 들어선 원장 선생님의 수업에서 얼떨결에 ‘유학조차 다녀오지 않은 사람의 좋은’ 영어를 하게 되었다.
유학파인 원장님과 누가 봐도 한국식 발음을 구사하는 그녀의 짧은 상황극은 호응도가 높았다.
학생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고민하던 원장님은 그녀는 수업 보조로 낙점했다.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 그녀는 배우면서도 돈을 버는 아르바이트를 지속할 수 있었다.
몇 차례 취업에 실패한 후에는 원장님이 건강문제로 학원 문을 닫기 전까지 강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 경력이 생기고 이후에 두 개의 학원을 거쳐 지금의 학원에 올 수 있었다.
그녀는 전공자도 아니고 유학파도 아니었다. 그래도 영어 강사로 십 년이나 일할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졸업장이나 학력이 문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경력이 오래되니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그런 것보다는 경력이 오래되면서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내가 문제였다.
노력하지 않는 나를 경계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당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때마다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그리고 더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지금 학원의 원장님은 야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발음과 처음 구사했던 한국식 발음을 비교해 가며 능숙하게 학생들의 웃음을 유도하는 그녀의 온라인 수업을 보고 거액을 제시하며 그녀를 스카우트하려 했다.
현재 받는 것의 배가 넘는 월급에 망설이자 원장님은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돈이 부담된다면 그만큼 노력해 주면 된다고 덧붙였다.
수업을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린다는 부분이 조금 걸렸지만 지금도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 뭐가 다를까 싶어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가 크다는 건 그만큼 제가 바칠 것이 많다는 의미였는데. 역시 욕심은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해요. 계약서에 정말로 적힌 금액을 보니 손이 떨렸어요. 그래서 원장님이 살짝 덧붙인 조건에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죠. 그게 진짜였는데 말이죠.”
원장이 바란 작은 조건은 졸업장이었다. 원장이 아는 사람을 통해 받을 수 있다는 외국의 대학 졸업장.
원장은 학원 강사직을 유지하는 동안에 온라인 수강을 하면 된다고 했다. 단지 그것만으로 졸업장 획득이 가능하다고.
그런 졸업장을 미리 받아올 테니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그 졸업장을 실제로 취득해 달라고.
평소에 졸업장을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일까? 그녀는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수강을 할 예정이고 그것을 통해 얻는 졸업장이니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 역시 욕심이 눈을 가렸기 때문이었는지 첫 월급으로 원하던 몇 가지를 구매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원에 고지된 자신의 약력에 영국에 있다는 그 대학의 이름이 적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가 유학파라고 인식했다.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이제야 눈이 뜨이는 거죠.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키는 것이 조금 무서워졌어요. 다 잃어버릴 것 같아서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칵테일을 쥔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잔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다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내쉬는 숨에 살짝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맴돌았다.
“이제야 가지게 된 이 여유를 잃어버릴까 봐, 얼마나 더 노력해야 이 여유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저를 너무 무섭게 해요.”
그리고 한동안 음악만이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그녀를 어루만져 주었다.
일정하면서도 조금씩 변주되고 있는 그 음악의 리듬이 마치 그녀를 토닥이는 듯했다.
그 토닥임 속에서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한 번의 실수일 뿐인데. 실수라면 사과하고 고치면 되는 문제인데.
그 실수를 되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현실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에게는 실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속임수이고 사기였다.
남에게 피해를 준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선 모두에게 욕먹을 각오가 필요했다.
뻔히 어려운 길이 보이니 외면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러지 못할 거란 걸 아주 잘 알았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외면하진 못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고 그녀가 구축했고 편안해하는 성격이었다.
이 불편함을 끌어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녀는 지금 명백하게 무서워하고 있었다.
실수로 알게 된 이 달콤한 여유가 마치 첫 키스처럼 그녀에게 내면에 단단하게 각인될 것이라서.
언젠가 힘든 날이면 이 달콤한 여유가 생각날 것이라서.
그땐 좋았지, 하며 아주 쉽게 꺼내어 펼쳐볼 추억이 될 것이라서.
그리하여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자신을 후회하게 될까 봐.
뚜렷하게 결국 자신이 하게 될 선택이 보이지만 끝까지 망설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망설이고 싶었다. 어차피 결론이 나 있다면 그 선택의 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 잔의 칵테일을 더 주문했다. 아주 조금만 더 위로를 받고 싶어서.
“이번 잔은 서비스입니다. 조금 특별한 술이죠. 이 ‘달콤한 꿈’을 당신이라면 견뎌낼 것 같군요. 답답할 정도로 당당하길 원하는 당신이라면.”
바의 마스터는 그녀에게 잔 하나를 밀었다. 줄곧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그녀는 마치 홀린 듯이 그 잔을 받았다.
옅은 하늘색 끝에 선명한 붉은빛이 대비되는 칵테일 한잔. 왠지 위태로워 보이는 술이었다. 밝은 하늘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노을을 겨우 붙잡고 있는 듯, 순간을 붙잡아 기억하지 않으면 이토록 아름다운 두 색은 금방이라도 섞여 저물어 버릴 것 같은 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 위태로움을 그녀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음악은 어느새 나긋나긋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고 왠지 긴장을 풀어주는 듯한 그 선율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잔을 들어 올렸다. 어렴풋하게 마스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부디, 저에게도 달콤한 꿈을 보여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