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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우물 안 개구리는 하늘을 꿈꾼다(1)

-달콤한 꿈을 찾는 그대에게, 한 잔 더(1)

by 블랙스톤

한참이나 집중해서 이력서를 쓰다가 왠지 맥이 풀려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양심 고백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학원을 정리하고 나오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계약 전에 말했어야 했다고. 틀린 말이 아니라서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화를 내고 어르고 달래고 짜증을 내도 틀린 건 틀린 거라서 이력은 삭제하기로 했다. 원장은 그 이력을 삭제하는 김에 나도 함께 나가주길 원했다.

그놈의 졸업장. 그놈의 학력 한 줄이 뭐라고 이렇게 서로 간절해지는 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두 번째 월급을 받자마자 눈을 가리던 욕심이 벗겨지고 그 자리에 겁이 더럭 올라온 터라 통장은 아직 묵직했다. 그래 봐야 몇 달이겠지만 아직 적금을 깰 정도는 아니었다. 계획적으로 그만둔 것도 아니라서 여행이라도 다녀올 여유는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시작한 지 두 달. 뭐, 나쁘지 않았다.

가끔 짓궂은 학생들이 유학 시절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곤 했는데 최소한 이제 그럴 일은 없지 않은가.

대신 아침에 일어나 하릴없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아직도 하늘 가운데 떠 있는 해와 남은 하루의 시간을 느낄 때면 식은땀이 흐르곤 한다.

오늘 뭐 하지? 에서 시작된 생각은 앞으로 뭐 하지?로 발전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쉬는 게 좋기만 한 건 며칠 못 가더라.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 답답하고 혹시라도 앞으로 취직 못 하면 어쩌지 겁이 나고. 새삼 내가 이렇게 걱정이 많았나 싶다.


전공자도, 유학파도 아닌 내가 지금까지 영어 강사를 할 수 있었던 건 인맥을 통한 고용 혹은 스카우트였고 수업을 들어준 학생들이 찾아주었기 때문이다. 큰 학원에 들어가서 두 달 만에 그만둔 지금의 상황에서는 소문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자리가 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으니 이력서를 돌려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유튜브를 시작했다. 국내파 영어 강사 영숙씨. 메인 화면에다가 유학파가 아니며 전공자도 아니지만 십 년간 영어 강사를 했다고, 나름 스카우트 돼서 큰 학원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적어 두었다.

물론 두 달만 일했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


돈 벌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라서 가명을 썼다. 이력서에 넣을 한 줄이 필요했다.

전에 일했던 학원의 원장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행히 온라인 강의를 했던 일부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직접 찾아뵌 첫 번째 원장님은 흔쾌히 영상 전부를 사용해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내 손을 잡고 아직도 때마다 찾아오는 네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내 손을 쓰다듬는 그 앙상함에 참으려던 울음이 기어코 목 너머를 비집고 올라왔다.


온종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못 봤던 미드도 몰아보고 관심이 가던 책들도 찾아 읽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키득거리는 시간이 지나면 왠지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함이 자라곤 했기에 꼭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거나 영어 원서를 구해서 읽었다. 이건 최소 실력 유지를 위해서고 최대로는 공부하는 것이라 나를 설득했다. 그러면 행복하게 키득일 수 있었다.


불안함을 떼어놓을 방법으로 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핑계를 찾아낸 후 하루가 조금 바빠졌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무조건 하루에 한 가지씩 하기로 했다. 하다못해 뒷산 산책을 하며 오늘은, 내일의 나를 위해 운동을 했다! 하고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다른 뭔가를 배워야 하나 싶어 기술 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제일 먼저 영어 강사를 찾는 곳에 이력서를 넣는 것은 아마도 첫 번째 학원에서의 그 즐거웠던 분위기를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일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된다는 그 뿌듯함.


갓 성인이 되어 자신만만하면서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게 되던 그 시절, 그들의 일을 대체해 준다는 것이 하나의 어른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내 어깨가, 등 뒤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을 기억하는 내가 비슷한 분위기를 더 선호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때때로 두 달 전 받았던 월급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냥 그 순간을 참았더라면 지금쯤 명품 몇 개는 내 집에 있겠네.

혹은 몇 달만 참아서 해외여행이라도 갈 돈을 좀 챙겨 놓고 그만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


그만두기 전에 고민했던 것과는 달리 피식 한 번의 웃음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아직 통장에 돈이 떨어지지 않아서인지 취직 걱정과 별개로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미래는 걱정이지만 아직 따지도 않은 학위를 적어놨을 때보다는 마음이 훨씬 더 편안했으니까.


카톡, 카톡…?, 카톡……. 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카톡.


갑자기 폰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들이 이번엔 또 무슨 수다를 시작했을까 싶어 폰을 집었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있는 카톡방에 들어갔을 때 이게 뭔가 싶은 이야기들이 시작됐다.


“은숙아. 이거 너 아니야?”

“대박. 이 쇼츠 조회수가 왜 이렇게 높아?”

“쇼츠 조회수가 문제가 아니라 저 대기업이 쇼츠를 언급해 준 게 대박이지! 물 들어왔다 은숙아!”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실제로 이력을 위해 만들어 둔 유튜브 영상 중 하나의 조회수가 엄청나게 뻥튀기되어 있었다.

친구들의 카톡을 하나씩 천천히 확인해 보니 유명인 하나가 자신의 영상을 보고 웃기다며 짧게 언급한 모양이었다.

언급한 내용을 찾아보니 한국식 발음과 거기에서 나아지는 발음을 순서대로 비교를 해줘서 기억하기 좋다는 식이었다. 특히 내가 구사하는 한국식 영어가 어른들이 하는 영어와 비슷해서 재밌다고.

그 짧은 언급이 다였기에 피식 웃으며 친구들에게 답을 줄 수 있었다.

물이 너무 얕아서 노 못 저어. 그나저나 언제 시간이나 좀 내. 못 본 지 한참이나 됐다. 친구들도 금방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당사자인 내가 시큰둥하니 다들 한 마디씩 하고는 이내 같이 시들해졌다. 첫날은 그랬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인정해야 했다. 자꾸 폰에 시선이 가고 이력서를 넣기 위해 구인 공고를 보는 데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조회수는 여전히 폭증하고 있었으며 덩달아서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콩글리쉬 강의들의 모든 조회수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친구 하나는 저렇게 주식이 오르면 경찰 조사를 받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운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 들어오다 못해 알아서 배를 끌고 가고 있었다. 노를 저을 필요도 없었다.


이력서의 한 줄을 위해 개설했던 만큼 오십 개가 넘는 영상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올려진 상태였고 사실 업로드 이후 영상을 한 번도 찍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영상이 있든 어차피 이력서에는 한 줄 일 뿐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나는 가만히 폰을 들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심경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스럽다고 사실 나는 구직 중이며 이력서에 넣을 한 줄을 위해 유튜브를 만든 것뿐이라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마음이 진정되니 예전에 온라인 강의를 하던 기억이 올라왔다.


책상 위에 오늘 해야 할 일을 적는 탁상용 화이트보드를 꺼냈다. 그 위에 적혀 있던 ‘오늘도 이력서 하나 넣기!-엄마, 저도 일하고 싶어요.’와 ‘오늘은 꼭 이십 분 운동하기!-팔랑거리는 뱃살이 미오!’, ‘집 티 나게 청소하기!-뭐 했다는 티 내고 당당하게 엄마 밥 먹자!’를 자연스럽게 지웠다.

그리고 현재의 당황스러운 상황에 쓰이는 콩글리시 표현을 자연스러운 영어 표현으로 바꿔주는 강의를 시작했다.

어린 학생들이 기억하도록 강렬하면서도 짧게. 이야기가 길어진다 싶으면 중간중간 엉뚱한 이야기를 섞어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면서.


영상을 편집해 올리면서 잠깐 화이트보드의 내용이 영상에 보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이 꼭 예전 학원에서 입소문을 탈 때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한없이 들뜨지 말고. 설레발치지 말고.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자신을 타일렀다.

한없이 들떠버린 마음은 언젠가 땅에 있는 몸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서 아무런 준비 없이 뚝 떨어지면 내 마음만 다친다.

그러니 지금의 순간을 행복해하되 땅에 서 있는 내 몸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즐기자.

그래. 지금 즐길 수 있는 건 즐기는 게 맞긴 하다. 사실 절로 춤이 나왔다.


기분이 들떠 나도 모르게 나오는 환호성과 어깨춤이 영상 말미에 살짝 들어간 것도 같았지만 나는 관대하게 그 부분을 자르지 않았다.

왠지 이 정도는 다들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조금 기분 좋은 걸 티 내고 싶기도 했다.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방 뜨는 기분을 주체하기 못하고 혼자서 몇 번이나 방 안을 떠다니다가 문득 지금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해 주듯 편안한 음악과 시원한 칵테일이 있던 곳. 슬쩍 볼을 꼬집었다. 통증이 있었다.

그래. 이건 꿈이 아닌 거야. 운 좋은 미래인 거야.

스스로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꿈이 아닌 것을 알지만 꿈인 것만 같은 지금 순간, 왠지 스쳐 지나듯 들렸던 마스터의 마지막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괜히 찜찜해졌다.


부디, 저에게도 달콤한 꿈을 보여주시길.


다시 볼을 콱 꼬집었다. 아야. 아파서 다행이다. 볼을 쓰다듬는데 자꾸 마스터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아저씨는 괜히 초를 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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