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산책, 그들의 작은 여행(2)

- 당신의 친절한 이웃, 센티멘탈 무림인

by 블랙스톤

한적한 숲길. 시원한 바람과 그 바람에 실린 상쾌한 짙은 녹음(綠陰)의 향. 발길에 닿는 약간 폭신한 느낌의 흙길, 보는 재미까지 주는 슬쩍슬쩍 흔들리는 나무와 듬직한 바위들.

그야말로 소풍의 느낌을 제대로 주는 풍경 안을 거니는 것은 정말 좋았다.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까지는 정말로.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숲 속을 계속 걷는 사이 해가 점점 머리 위에서 어깨까지 내려왔다는 것만 빼고는.

숲 속 저 너머까지 보이던 밝은 낮을 지나 눈에 보이는 거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저녁이 되어 간다는 것만 빼고는.

마스터가 말한 여행이란 게 당일치기가 아니며 그 숙박을 어쩌면 숲 속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만 빼고는.

그 외에 여러 가지 좋았던 것들이 익숙해져서 흥미가 덜어지고 그 자리에 걱정과 두려움이 차오르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에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쁘니는 숲 속을 앞장서서 걷는다. 슬쩍 자리를 차지하는 한숨의 무게만큼 에미의 걸음걸이는 느려졌는데 쁘니의 발걸음은 점점 경쾌해졌다.

둘의 거리가 꽤 벌어졌기에 에미는 쁘니를 불러 멈춰 세웠다. 쁘니는 그런 에미가 불만스러운지 앉아서 꼬리로 바닥을 탕탕 치며 그녀를 기다렸다.

부지런히 걸어 쁘니의 곁에 온 에미는 쁘니를 들어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목적지는 알고 가는 거야?”


냐하옹. 쁘니는 대답하며 꼬리로 에미가 쓴 리본 밀짚모자를 툭 건드렸다. 에미는 쁘니를 품에 안으며 한 손으로 삐뚤어진 모자를 바로 썼다.


“그래. 틀린 길이면 모자가 알려주겠지만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단 말이야. 한밤중의 숲 속은 춥다고 그랬어. 해가 지고 있는데 우리, 위험한 거 아닐까?”


냐카카칵. 에미의 말에 쁘니는 입을 가릴 생각도 없이 웃었다.

앞발로 툭툭 에미의 모자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툭 치더니 이내 꼬리로 자신의 방울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냐앙.

뭔가 한심스럽다는 마지막 울음의 뉘앙스에 에미는 슬쩍 몸을 숙이다가 휙 바닥에 쁘니를 놓았다.

쁘니는 날렵하게 착지했지만 친절하지 않은 에미의 행동에 심기가 뒤틀린 듯 날카롭게 울었다. 냐아아앙!


“내가 너보다 더 ‘이바구’에 오래 있었거든? 그래도 여행은 처음이라 물어볼 수도 있는 거지.

‘이바구’의 물건은 항상 ‘이바구’에 있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단 말이야.

모자에 검색기능? 생각하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아서 몰랐어.

‘감투’가 길잡이를 한다는 게 이런 뜻인지 몰랐단 말이야. 모를 수도 있지, 비웃을 일이냐? 이 뚱땡이가.”


캬아악! 쁘니는 에미의 마지막 말이 거슬렸는지 몸을 부풀리며 화를 냈다. 에미는 물러서지 않았다. 와라, 뚱땡이.

쁘니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쁘니는 하늘을 날 듯이 달려들었다. 에미는 그런 쁘니를 밀어내면서 쁘니의 뱃살을 노린다.

바에서 승부를 내지 못했던 그들의 일차전에 이어 이차전은 무림의 한 숲 속에서 벌어졌다.

그들이 치열하게 꼬집고 때려가며 싸우는 사이 언제나 착실한 시간은 흘러간다.

해는 어깨를 넘어 허리를 향해 가고 오후의 망토처럼 길게 늘어진 어둠이 그들의 곁에 살포시 내려앉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저 싸울 뿐이었다.


“너 때문에 망했어.”


냐아악! 주변이 어두워져 몇 발자국 앞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야 둘은 싸움을 멈췄다. 싸움이 멈췄다곤 하나 감정이 바로 가라앉을 리는 없어서 둘은 서로에게 툴툴대며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쁘니는 망설이는 에미의 발을 툭툭 쳐가며 조금 더 이동하자고 재촉했다.

계속되는 재촉에 에미는 천천히 발을 떼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어두운 숲 속, 싫다. 무섭다. 뭐가 자꾸 일렁이는 것 같아. 꺄악! 저기 뭐가 움직였어! 소리를 지르며 멈추기도 했다.


쁘니는 고양이답게 어둠 속에서 눈을 밝게 빛내며 말했다. 야옹. 대답이 없자 뒤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쁘니가 한심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에미는 바람에 움직이는 어두운 숲 속을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쁘니는 보란 듯이 크게 꼬리를 휘두르며 걸었다. 에미는 연신 두리번거리면서도 그 꼬리를 놓칠까 봐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 같이 가자. 내가 잘못했어. 나 데려가. 히잉.


작은 모닥불을 발견한 건 에미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쁘니는 어둠 속 멀리서도 정확하게 방향을 잡고 걸었지만 에미는 어두운 숲 속을 살랑이는 쁘니의 꼬리만 보고 걸었다.

바람은 이제 스산하게 느껴졌고 나무의 가지나 잎이 흔들릴 때마다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심지어 확실하게 보면서 따라가고 있는 쁘니의 꼬리가 풀이 스치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 에미의 눈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을 때, 그 자리에 쓰러져 울지 않은 것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 불가에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다급해진 발걸음 소리에 맞춰 쁘니도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리고 드디어 몸에 불의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 에미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에엥! 크응! 흐어엉.


입구가 무너진 동굴에 기대어 모닥불에 비춰 뭔가를 보고 있던 사내는 이미 에미를 발견했었는지 바닥에 내려둔 큰 낫을 잡지 않았다.

심지어 코를 먹으며 불가에 앉아 울고 있는 에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에 든 작은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울던 에미가 좀 진정되자 쁘니가 다가와 자신의 방울 목걸이를 툭 쳤다. 에미는 살짝 부은 눈으로 쁘니의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방울 목걸이는 곧 조끼형 가방으로 바뀌었고 에미는 그 작은 가방에서 커다란 티슈곽을 꺼내어 코를 풀고 눈물을 훔쳤다.

겨우 진정이 되고 나서야 에미는 모닥불의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내는 슬쩍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제야 여유가 생긴 에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일부러 무너뜨린듯한 동굴의 입구에 사내가 기대어 앉아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는데 그 작은 모닥불의 주변에는 뭔가를 태운 흔적이 있었다.

사내가 눈을 떼지 못하는 종이에는 목탄으로 어설프게 그린 사람 셋이 있었다.

머리가 긴 둘은 키의 차이로 성인 여성과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가장 키가 크고 머리가 큰 하나는 사내로 보였다.

유난히 머리가 커서 큰 키가 묻힐 만큼 강렬한 인상을 가진 사내는 에미가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에미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쁘니의 가방에서 주전자를 꺼내 차를 데웠다. 그리고 찻잔을 꺼내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거절하려는 듯한 몸짓을 하다가 재차 권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에미가 먼저 차를 마시고 가방에서 쁘니의 간식까지 꺼내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일렁이는 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고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숲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불의 온기와 함께 은근히 가슴에 스며드는 그 바람 소리 사이로 부끄러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에미는 그 부끄러움을 지우고자 물었다.

이 어두운 숲에서 혼자 무섭지 않으셨어요?

사내는 비로소 그림에서 눈을 떼고 눈물을 흘려 눈가가 팅팅 부은 소녀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아니, 난 괜찮단다.


쁘니는 모닥불 근처에 모로 누워서 배에 따뜻한 온기를 쬐었고 에미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사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사내는 강한 인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이바구’의 물건은 항상 ‘이바구’에 있던 상태를 유지하기에 차를 마신 사내는 어떤 거부감도 없이 자신이 그동안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작은 소녀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사내는 무림세가의 하인이었다. 한 지역에서 대대로 영향을 끼치는 대형 무림 세가. 그런 곳의 하인이었기에 은근히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때도 많았다고 했다.

사내는 순종적이고 부지런한 성격이라 맡은 일을 미루는 것을 싫어했다.

주어진 일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성실하게 이행했기에 일처리를 인정받아 하인들을 관리하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 성격이 괄괄하지만 정이 많은 아내가 있었고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하게 이쁜 딸이 있었다.

딸은 다행히 사내의 성격을 닮아 순종적이고 부지런했다. 하여 딸이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좋은 혼처를 찾아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세가의 가주는 사내가 아장아장 걸을 때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사내가 뛸 때쯤엔 지역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 되었고 사내가 일을 할 수 있었을 땐 지역을 대표하는 세가를 만들었다.

모두가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무인이며 훌륭한 가주였으나 후손을 보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사내가 결혼할 때쯤 드디어 가주는 후손을 보았고 처음이 힘들었다는 듯 이후로 줄줄이 아이가 태어났다.

자신의 대를 이을 후손을 보고 난 이후 너그러워진 가주는 품성까지도 완벽한 가주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인정받은 것이니 사내는 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다고 말했다.


파국은 혼기가 차면서 너무 아름다워진 딸이 도련님의 눈에 띄며 생겼다.

첫째 도련님의 눈에 띈 딸이 시비로 뽑혔다. 사내와 아내는 딸이 차기 가주의 시비로 살아가거나 마음에라도 들어 첩이 되면 고생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라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행운과 불행은 꼭 함께 온다고 하던가. 첫째 도련님의 시비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딸은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무공 수련 중이던 도련님이 무아지경에 들어 마구 공력을 뿜어대며 상승 무공을 연마했고 그로 인해 기물들이 파손되고 근처에 있던 시비들이 다쳤다고 했다.

하필이면 그 시비가 내 딸일 게 뭐람. 사내는 하늘을 원망하고 도련님을 원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일 년이나 요양하고 나서야 기운을 차린 딸은 이번엔 막내 도련님의 시비로 불려 갔다.

몸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딸이 기운 없이 방에 누워 있는 것만 보다가 다시 기운차게 일하러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나았다고.

같은 세가 안에 살지만 도련님의 몸종이기에 딸의 얼굴을 보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 되었다. 그래도 점점 활기를 찾는 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사내는 회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 딸은 더 이상 어디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딸의 곁에는 무사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호위로 소개했다.

딸의 배는 나날이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제 이성과 술에 눈을 뜬 막내 도련님이 밤마다 딸을 침소로 불러들였었다고.

사내와 아내는 그 밤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여전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딸이 손녀를 낳았다. 호위는 떠나갔고 가문에서는 세가 외부의 집을 준비해 주었다.

사내는 군말 없이 손녀를 안은 딸과 아내의 손을 잡고서 외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주는 사내를 따로 불러 아들 단속을 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과했다. 사내는 조금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세가의 가주가 자신의 딸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대단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전하자 딸은 눈물만 뚝뚝 흘렸고 아내는 그런 사과를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크게 오열했다.

그제야 사내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크게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사내가 되돌리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녀는 자라지만 딸에겐 남편이 생길 수 없었다. 손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문의 모두가 알지만 손녀의 존재는 딸이 부정한 짓을 한 증거라고 모두 이야기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딸에게 마음을 품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아내로 맞으려 하지 않았다. 딸과 손녀는 세가의 핏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날 밤의 사과를 받은 자신의 머리를 낫으로 찍어버리고 싶었다.

첩으로라도 받아달라고, 죽어도 세가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손녀는 누가 뭐래도 이 세가의 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 못한 그날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사내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꼼꼼하게 일했다.

그리하여 노쇠한 창고지기의 후임 자리에 사내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내의 이름이 세가에 조금 돌기 시작했을 때, 막내 도련님이 딸을 찾아왔다.

명문가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었던 도련님이 거금을 내놓으며 지역을 떠나 달라고 말했다.

딸은 이틀이나 문을 닫고서 방에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사내는 군말 없이 손녀를 안은 딸과 아내의 손을 잡고 세가를 떠났다. 그리고 그날 밤 딸을 호위해 줬던 무사가 나타나 그들에게 이 자리에 머물지 말고 어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다.

그들에게 세가의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는 누명이 씌워졌다고. 사내는 딸과 아내의 손을 붙잡고 호위를 따라 깊은 산속으로 달아났다.


사내는 여기까지 말하고 화가 나는지 말을 끊었다. 에미는 그가 진정하길 바라며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에미의 마음이 담겨 진정효과를 가지게 된 차를 마시며 사내가 화를 달래는 사이 쁘니의 가방에서 조리도구를 꺼낸 에미가 간단한 핑거푸드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마음을 달래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고 사내는 몇 점의 롤을 먹고 나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이제 다 지난 일입니다. 다 끝난 일입니다. 그리고 곧 끝날 일이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