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산책, 그들의 작은 여행(3)

- 당신의 친절한 이웃, 센티멘탈 무림인

by 블랙스톤

사내의 마지막 말은 나지막했지만 단단한 목소리여서 꼭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곧 끝날 일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에미는 묻지 않았다.

언젠가 마스터는 에미에게 흔들림 없는 시선과 경청, 그리고 작은 끄덕임이 가장 좋은 대화법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에미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끼어들지 않고 그가 이어 나갈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적어도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은 끝이 찾아오지 않을 테니.


호위가 이끈 곳은 산속 깊은 곳의 산비탈 옆면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바위를 조금 오르면 산비탈이 살짝 무너져 생긴 틈이 있었는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동굴이 있었다.

사내 가족의 소식을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성이 좋은 호위는 동굴 안에 그들이 며칠은 머물 수 있도록 물자를 미리 가져다 두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첫날은 서로 어색했지만 이튿날에는 호위에게 내내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들을 찾는 사람들의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호위는 딸과 단둘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주로 딸이 이야기를 하고 호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마디를 보태는 정도였다.

그때마다 사내는 도끼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고 아내는 사내의 팔을 꼬집으며 한쪽으로 그를 끌고 갔다.

호위가 괜히 우리를 살려주었겠느냐며, 반년이 넘도록 딸을 호위하다가 둘이 정분이 났던 거면 더 좋은 거 아니냐며.


딸의 호위로 처음 찾아왔을 때부터 그는 무뚝뚝하고 과묵한 목석같은 사람이었다.

감정의 기복도 거의 없어서 계속 딸의 곁에 머무는 호위가 영 껄끄럽고 불편했었다. 그랬기에 가벼운 인사 외에는 크게 이야기를 나눴던 적은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호위를 서면서도 다 챙겨줬던 것 같았다고 아내가 말했다. 딸도 필요한 것이 생기면 호위에게 먼저 말했었다고.

사내는 자신이 속했던 무림세가가 딸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지긋지긋했기에 여전히 호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성화에 가만히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것을 보아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신과 달리 아내는 한 번 더 생각해서 가족을 위한 길을 찾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선택이 옳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뇌며 자신을 달랬다. 여전히 사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밖에서 그들을 찾는 소리가 거의 사라지자 호위는 확인을 위해 밖을 나섰다.

한 시진, 두 시진. 날이 저물도록 호위는 돌아오지 않았고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딸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아내는 손녀를 안고서 딸을 달래고 있었다.

사내는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해선 안된다고 느꼈다. 하여 날이 살짝 밝아올 때쯤 가족과 함께 동굴을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 산속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이 트고 있기에 이미 깨어났을 새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소름이 돋았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얼른 가족을 동굴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발자국을 없애고 수풀을 정돈해 사람의 흔적을 없앴다.

사내가 동굴에서부터 이어지는 흔적을 없애고 자신도 동굴로 향하려 할 때쯤 뭔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엎드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둔중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흘낏 보니 쇠몽둥이였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사내의 뒤를 따라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사내는 동굴의 입구가 바위 위편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발자국을 지우고 입구를 수풀로 가리기까지 했으니 가족은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정신없이 도망을 치면서도 히죽 웃음이 났다.

멍청한 짓만 골라하던 남편이, 아버지가 그래도 한 번은 가족을 살렸구나 싶어서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웃음을 멈추면 떨리는 다리가 멈출 것만 같아서 미친 듯이 흐흐 하고 웃으면서 계속 달렸다.


수풀을 가르며 쫓아오는 소리는 금방이라도 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정말 근처까지 따라왔다.

다시 둔중한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피하지 못한 채 쇠몽둥이에 등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고 등허리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앞뒤 따지지도 않고 바로 무기부터 던지는 놈들이다.

단 한걸음이라도 더 동굴에서 멀어져야 하리라.

그래야 가족이 저승에서 한걸음이라도 멀어진다.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등부터 허리, 그리고 허벅지까지 감각이 없었지만 다행히 다리는 움직여 주었다.

언제나 성실하게 살아왔던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된 듯했다.

팔다리가 천근만근이 될 때까지 농사를 짓고, 창고에 물건을 나르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팔다리에 감각이 없어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움직였던 경험이 수도 없이 있었다.

사내는 계속 팔을 흔들고 상체를 흔들어 다리가 따라오도록 했다. 멈추지 않았다. 고꾸라지지 않았다.

우거진 풀숲을 가르자 앞이 탁 트이며 절벽이 나타났다. 사내는 방향을 바꿔 달렸다.

몇 걸음 걷지도 못했는데 다시 둔탁한 충격이 사내를 덮쳤다.

이번에는 견디지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졌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사내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문은 안 당하겠구나.


사내가 다시 깨어난 곳은 약초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약초꾼들이 산에 머무르며 쓰는 움막이었는데 약초꾼 노인네가 사내를 주웠다고 했다.

아직 저승이 아니고 산이라는 것에 놀란 사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노인에게 몇 가지를 묻고 나서야 사내는 다시 몸을 뉘였다.

급류에 휩쓸려 죽지 않은 것도 천운이지만 그 급류를 따라 몇 개나 되는 산을 넘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마을 근처까지 살아서 왔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약초꾼으로 평생을 살아왔다던 노인은 확실히 허당은 아니어서 사내의 갈비뼈가 몇 개나 부러졌다고 말했다.

그것을 손의 감각만으로 확인하고 약초를 바르고 부목을 대 상체가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너무 능숙한 대처에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묻자 노인은 하나가 빠진 앞니를 드러내고 흘흘하고 웃으며 말했다.

초짜 놈들 산에서 굴러서 갈비뼈 다치는 걸 한 두 번 봤겠어?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에서 거리가 멀어졌기에 사내는 조용히 상처를 돌볼 수 있었다.

노인은 새벽부터 약초를 찾으러 나갔다가 밤이면 돌아왔다.

노인이 돌아올 때면 사내는 미리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했다. 노인은 그런 사내를 보며 혀를 찼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 쉴 줄 모르는 것도 병이라고.

사내는 허리가 꼬부라졌으면서도 하루 종일 산을 타는 노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기가 찼다. 노인장이나 나나 비슷한 것 같은데요?


상체를 돌리기도 힘들 정도로 단단하게 붙들어 맸던 부목을 풀 때쯤 움막에는 다른 약초꾼들이 도착했다.

노인의 소개로 금방 친해진 이들은 한 달이 넘도록 이곳에 머무는 사내를 운이 좋은 사내라고 불렀다.

절벽에서 떨어져 살아난 것도 천운이지만 한 달이나 마누라 잔소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사내는 함께 웃었지만 자꾸 흘러나오는 한숨을 어쩔 수가 없었다.

동굴 안에는 며칠은 더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또한 동굴로 돌아간 아내와 딸은 흔적을 지워두었기에 발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덧 혼자 거동이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되었을 때 젊은 약초꾼 하나가 술을 담아 온 호리병을 풀었다.

아직은 조금 더 요양이 필요한 사내도 슬쩍 한두 모금 얻어마셨다.

술이 조금 오르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러다 저기 산을 몇 개나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의 무림세가 이야기가 나왔다.

무림인들 이야기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아서 모두가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 무림세가에서 도망쳐 나온 입장에서는 그곳의 이야기가 나오자 겁이 덜컥 났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거대한 세가에서 하인 하나가 도망친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약초꾼들은 무림세가의 횡재에 대해서 말했다.

한 달 하고 조금 더 전에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동굴에서 영물이 발견되었고 그것을 잡느라 싸우는 와중에 동굴이 무너지기까지 했다고.

가주가 직접 나서서야 잡을 수 있던 그 영물로 인해 무림세가의 전력이 크게 상승할 것이라며 한참이나 떠들었다.


사내는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주저앉았다.

약초꾼들은 술 몇 잔에 주저앉는 사내를 보며 남자도 아니라며 웃어댔다. 그러다 영물을 발견한 이의 행운 같은 불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위무사 하나가 그 동굴을 발견했고 영물과 최초로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고 했다.

다행히 금방 찾아온 가주로 인해 목숨을 구하고 크게 치하를 받았으나 무인의 삶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결말에서 사내는 눈에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중년 여인과 젊은 여인, 그리고 갓난아이에 대해서 들은 적은 없느냐 묻자,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내는 그것이 가족의 사망 선고인 것만 같아서 넋을 잃고 말았다.

호위무사와 영물이 싸우고 그 영물을 잡겠다고 가주가 나서면서 동굴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 동굴에 머물렀던 사내는 그리 넓지 않은 통로와 안쪽의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낭떠러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피할 곳도 없는 그런 곳에서 가족들이 목숨을 부지했을 리가 없었다.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세가에 발각되어 끌려갔겠지.

애초에 세가에서 사내의 가족을 노릴 이유는 손녀의 존재뿐이었다.


사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참지 못해도 소리는 참을 수 있었다.

밖으로 흘러나가려는 소리를 속 안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것이 분노라는 이름으로 몸안 깊숙이 자리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을 살렸다는 그 알량한 만족감에 한 달이나 이곳에서 뒹구는 사이에 가족이 죽어나갔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단 한 줌의 신음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내가 유일하게 자기 자신에게 주는 형벌이었다.

그 모든 분노를 뼈에 새기는 행위였다.


다음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약초꾼 노인네에게 건네주었다.

감사의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길을 나서는데 노인은 뭔가를 느낀 듯,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내는 그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몇 날을 걸어 아내와 헤어졌던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입구는 이야기를 들은 대로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은 마치 큰 재해를 만난 듯 부서지고 파헤쳐져 있었다.

사내는 무작정 돌을 들어 날랐다. 배가 고프면 주변의 열매를 먹고 개울가에서 물을 떠 와 마셨다.

사내는 쉬지 않았다. 지난날처럼 여전히 사내는 성실하게 돌을 날랐다.

사내가 머물렀던 동굴 안쪽까지 들어서자 저 안쪽은 무너지지 않은 것이 보였다.

사내는 안으로 걸었다. 돌에 깔린 흔적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계속 걸었다.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는 절벽 근처에서 돌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원을 비는 돌탑처럼 쌓인 그것을 파헤치니 찢어진 치맛자락이 나왔다.

뭔가의 열매를 짓이겨 글을 써 내린 듯한 편지. 딸이 호위에게 남기는 편지였다.


고마움과 좋아하는 감정이 절절히 실려있는 그 편지는 아마도 돌아오지 않는 호위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기로 했을 때 남긴 것으로 보였다.

영물이 나타나고, 호위가 팔 하나를 잃고, 가주가 나타나 동굴이 무너지는 난리가 났기에 아무도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사내는 그 치맛자락을 품에 안고 주저앉아서 한참이나 울었다.


가족의 위기 때마다 사내는 가장으로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결국 가족을 모두 잃고 나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다.

사내는 한참이나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그렇게 우는 사내의 눈앞에 절벽이 보였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멍청한 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가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니까.

사내는 입술을 짓씹었다. 도대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피가 흐르는지 입 안이 짭짤해지고 비릿한 것이 흘러 들어왔지만 고통 따윈 느끼지 못했다. 사내는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오. 미안하다. 못난 남편이라. 못난 애비라서.

도대체가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네. 이젠.


사내는 딸아이의 치맛자락을 품에 안고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위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나무가 절벽에서 자라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떨어지다가 갑자기 나타난 굵은 가지에 부딪힌 사내는 억 소리를 내면서도 절대 치마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등에 큰 충격이 오고 잠시 정신을 놓았던 사내는 눈을 떴을 때 웬 해골과 벽면 가득 새겨진 글씨, 그리고 뭔가로 깊숙하게 새겨 넣은 흔적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무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항상 나오는 기연.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사내는 알 수 있었다.

기회, 기회였다.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

항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못난 남편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

사내는 다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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