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꼼꼼함과 집요함 그 사이 어딘가 (1)

판사의 꼼꼼함은 곧 엄격함이 되었다

by 고장 난 배터리

띠리리리링~♬


“OO지방법원 민사 2 단독입니다.”

“나 OOO 판사인데요.”

“아, 네. 부장님.”

“내 방으로 잠시 좀 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새로운 재판부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 첫날, 판사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판사님의 부름이었다.


똑똑!


“부르셨습니까?”

“여기 앉아요.”


창가에는 판사의 사무용 책상이, 벽을 따라서는 기록을 넣을 수 있는 캐비닛이, 사무실 한가운데는 긴 테이블이 배치된 판사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무용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판사님을 따라 나도 자리에 앉았다.


“혹시 판결문 공시송달은 어떤 기준으로 해요?”

“제가 예전에 있던 재판부에서는 송달불능 사유가 폐문부재 혹은 수취인부재라면 2회까지 집행관 송달을 시도해 본 뒤 공시송달을 진행했었고, 그 외 이사불명, 수취인불명 등의 사유라면 1회 집행관 송달만으로 공시송달 처리했습니다.”


나를 사무실로 부른 판사님은 내게 몇 가지 업무처리 방식을 묻더니 당신의 요구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증인신청이 들어와서 미리 채택을 하더라도 증인신문은 마지막 변론기일에 해요.”

“증인신문기일을 변론종결 하는 기일에 넣으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러니까 증인신청 채택했다고 바로 신문기일로 잡으면 안 되고……”


그렇게 시작된 업무지시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자, 그럼 앞으로는 이렇게 해주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시계를 보며 조금 놀랐다.


‘벌써 1시간이?’


시계의 시침은 내가 판사님의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하나 더 큰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막 새로운 재판부로 온 실무관이 아침부터 1시간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계장님이 의아해하며 물으셨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부장님이 부르셔서 갔는데 이런저런 업무지시사항 듣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아, 그래?”


나 역시 1시간이나 시간이 지났는지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판사님이 일러주는 업무처리 방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한 탓이었다.

나는 내 자리로 오자마자 판사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한글파일에 급히 써 내려갔다.

직장인들에게 단기기억력은 필수적인 능력이다.

물론 나의 장기기억력은 좀 그렇지만.


수많은 인사이동을 겪으며 새로운 업무를 단기적으로 기억하는 데는 이골이 난 터라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나는 판사님의 지시사항을 빼놓지 않고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또 한 번 판사님이 나를 소환했다.


“내 방으로 좀 와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똑똑!


“네~”


찰칵!


“부르셨습니까.”

“어, 거기 앉아요. 내가 저번에 미처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다시 불렀어요.”


그날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판사님의 업무지시가 전달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약 30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번에는 왜?”

“부장님이 추가로 지시하실 게 있다고 해서요.”


나는 또다시 한글파일에 지시사항을 정리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재판부 생활이 시작됐다.


판사님이 초반에 나를 불러 지시사항을 전달한 시간은 모두 합쳐 1시간 30분이나 됐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재판부의 실무관들은 경악했다.


“무슨 지시를 1시간 반이나……”

“왜요? 난 이게 오히려 편한데?”


구체적인 업무지시가 모호한 태도보다 훨씬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호함은 헷갈림을 가져오지만 확실한 의사표현은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업무지시를 위해 불렀고, 1시간 반이나 설명을 했다.’는 것에 집중했지만 나는 ‘이렇게만 해드리면 된다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명확한 답이 이미 나와 있는 상황에서 나는 그 지시에 따라 일만 해주면 그리 어려울 게 없었으니까.


1년간 그 재판부에 있으면서 나는 판사님의 꼼꼼함을 보았다.

일전에 내가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판사들 중에서 실체적 판단과 절차적 판단을 두루 신경 쓰는 부류와 실체적 판단은 본인이, 절차적 판단은 직원들에게 맡기는 부류가 있다고.

이 판사님은 본인이 모든 것을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고, 나는 오히려 이런 스타일을 더 선호했다.


판사님의 꼼꼼함은 법정에 들어가서도 발휘되었다.

변호사가 제출한 문건에 조금이라도 애매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갔다.


“그러니까 OO월 OO일자 준비서면에 기재한 내용이 사진 속 저 계단이 안쪽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에요 아니면 위로 연결된다는 말이에요?”

“아, 그게……”


만약 변호사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매우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제가 알기론……”

“아니, 사건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얘기를 해야지. 변호인이 알기로는 어떻다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 그게 맞아요?”

“제가 다음 변론기일 전에 정리해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


판사님의 꼼꼼함 앞에서 대충(?) 일하는 변호사들은 모두 곤욕을 치렀다.

마치 원피고가 낼 변호사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당사자들을 대신해 변호사를 채근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원고가 청구하는 게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예요?”

“아마……”

“아마라니? 원고 변호인이 원고가 뭘 청구하는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이건 나한테 죄송할 일이 아니지.”

“그게……”

“……”


사건을 잘 파악하지 못한 채 법정에 들어온 변호사들은 식은땀이 절로 나는 침묵을 맛봐야 했다.

이전까진 아마 사건 파악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어도 ‘그럼 다음번에……’라는 말을 하면 대부분 난감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으리라.

그로 인해 변론기일이 한 번쯤 늘어지겠지만 변호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판사님은 결코 그런 태도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엄격한 잣대는 어쩌면 판사님의 특이한 경력에 기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판사님은 변호사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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