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함과 성실함의 관계
어떤 사물, 개념에 대한 이미지는 첫인상에 의해 좌우된다.
특정 집단의 실제 평균이 어떻든 처음 경험해 본 그 집단의 샘플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들에 대한 첫인상이 오래도록 고정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처음부터 너무 빡빡한 분들과 함께 일했었다.
고작 2년 차에 모든 능력치가 최고등급을 찍은 무쌍 캐릭터들을 만나버린 탓에 한동안 내게 판사라는 사람들은 시작부터 나와 다르게 태어난 우월적 존재들이었다.
그러다 전혀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게 된다.
이른바 노력형 천재 혹은 성실함으로 남들보다 앞서가는 유형의 판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책임과 의무가 크면 클수록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 한마디만 하더라도 부담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판사라는 직업은 공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공개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영구적으로 남기기까지 해야 한다.
법원에서 생산하는 모든 기록과 문서는 법률적으로 보존기간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사건을 결론짓는 종국문서, 즉 판결문 또는 결정문 종류는 영원히 폐기하지 않는 영구보존 문서다.
한 사람이 내린 판단이 영원히 남는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판사들이 매 순간 얼마나 큰 부담을 가질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판사들은 매우 꼼꼼한 편이다.
오히려 내가 처음 경험했던 스마트형 판사보다 꼼꼼함과 성실함으로 무장한 판사가 수적으로는 훨씬 많다.
당연히 평균 이상의 지적능력은 모든 판사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소양이다.
이 기본에 똑똑함을 조금 더 더하는지 아니면 성실함 혹은 꼼꼼함을 더하는지에 따라 업무적 특성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약간의 실수조차 허용되지 않는 직업 특성 탓에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부분의 법관들은 하나같이 모두 꼼꼼함을 탑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꼼꼼함과 성실함이 천상계인 분들이 있다.
내가 앞서 풀었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능력 자체로 어나더 레벨이었다면 이제부터 얘기할 분들은 꼼꼼함과 성실함에 있어서는 감히 내가 따라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나더 레벨인 사람들이다.
법원 내에는 소속원들끼리 업무적으로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사내 메신저가 설치되어 있다.
판사와 직원 간에 소통하는 방법이 메신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유형이 이 사내 메신저를 이용해 소통한다.
그리고 그 메신저는 서로를 한 번 대화상대로 추가하면 이후로 보직변경이 이뤄져도 상대방의 접속 여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어느 재판부에서 일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그곳이 유독 일이 많은 재판부였기에 나는 평일에 야근을 하기 일쑤였고, 주말에도 자주 출근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야근을 하는 날은 어김없이 늦은 밤까지 부장님의 접속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정식 근무시간이 아니라면 판사실을 찾진 않았다.
‘어? 그럼 혹시 그냥 집에 가기 싫어서 사무실에 계시는 거 아니야?’
메신저의 접속 여부만 확인했을 뿐 직접 일하고 계신 모습을 본 것이 아니었기에 잠시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부장님에게 결재를 올리는 사람으로서 부장님의 결재 여부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실무관인 나와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부장님은 근무시간 외에도 성실히 각종 전자 문서를 결재하시곤 했다.
‘띠링~♬’
[OOOO카기OOOO 사건 결정문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시간에 상관없이 결재 완료 메시지가 뜨는 걸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계속 결재 올려도 되는 거……, 맞지?’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곤 곧장 다른 문건을 찾아 결재요청을 올렸다.
[결재요청]
그럼 얼마 뒤 또다시 결재 완료 메시지가 떠오른다.
‘띠링~♬’
[OOOO가단OOOO 사건 OOO신청서(채택)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숨 막히는 공방전.
마치 온라인 게임 내에서 진검승부를 겨루는 플레이어들처럼 부장님과 나는 대면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사무실에서 결재를 올리고 또 결재를 완료하며 비대면 업무를 이어간다.
전자결재가 오가는 때는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늦은 밤.
먼저 포기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띠링~♬ 띠링~♬ 띠링~♬’
내가 결재를 올리고, 부장님이 결재를 완료할 때마다 컴퓨터 오른쪽 하단에는 작은 메시지 창이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청명한 알림음도 울린다.
[……]
한참이나 공방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 알리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결재가 안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나는 사내메신저 목록을 열어 부장님의 로그인 상태를 확인한다.
“퇴근하셨군.”
부장님보다 더 오래 일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는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런 뿌듯함이 뇌리를 적시면 나는 이것을 에너지로 삼아 한두 시간 더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물론 내가 먼저 도망가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럴 땐 먼저 전자 결재물을 만들어놓은 뒤 결재를 올리기 직전 메신저로 부장님의 로그인 상태를 확인한다.
“아직 계시네.”
이제 본격적으로 전자 결재물을 전송하기 시작한다.
목록에 있던 사건들이 하나씩 사라지며 결재요청이 진행된다.
머지않아 모든 결재물이 전자결재로 상신되었다.
그리고 나는 재판사무시스템을 끄고 컴퓨터 전원에서 ‘시스템 종료’를 누른다.
“훗.”
앞선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
이번에는 부장님보다 먼저 퇴근을 한다는 묘한 승리감이 하루 종일 쌓인 피로를 살짝 덜어준다.
내일 아침 출근을 하면 아마 오늘 밤 부장님이 결재해 놓은 문서들이 결재 완료되었다며 내 알리미에 떠 있겠지.
‘……?’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부장님이 메신저에 남아 계셔도 되도록이면 퇴근 이후에는 결재를 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야근하는 날들이 하루, 이틀 이어지면서 점차 냉혹한 현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 때문에 남아계시는데 전자 결재 정도는 괜찮잖아?’
그렇게 시작된 비대면 업무는 내가 자리를 뜰 때까지 주욱 이어졌다.
그때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메신저를 열면 시간에 상관없이 거의 항상 그 부장님이 보인다.
그분 한 분만이 아니다.
내 메신저 목록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로그아웃되지 않는 부장님들이 몇 분 계시다.
지금도 나는 매일 아침 컴퓨터를 켜면 습관처럼 사내메신저의 목록을 확인하곤 한다.
나도 모르게 그중 몇몇 부장판사님의 성함에 눈길이 머문다.
‘오늘도 야근하시려나.’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시는 판사님들이 우리나라의 사법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주역들이다.
때때로 사법부를 향한 세간의 오해와 따가운 질타가 쏟아질 때조차도, 이분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사건기록을 검토하셨다.
이분들에게 워라밸은 없다.
제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법원에서 보내며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제 영혼을 갈아 넣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조직에 필요한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실제로 우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조직을 더욱 빛나게 해 준다.
하지만 조직이 조직답게 운영되게 하는 것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성실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스포츠계에 이런 격언이 있다.
공격은 관중을 얻지만 수비는 승리를 얻는다.
유능함과 성실함의 관계도 공격과 수비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조직을 빛내는 건 소수의 천재들이지만, 조직을 유지시키는 건 다수의 성실한 사람들이다.
제 역할 이상을 해내는 판사님들 덕분에 오늘도 법원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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