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똑똑하고, 늘씬한데, 옷까지 잘…? (1)

그 앞에서 나는 실로 햇병아리였다

by 고장 난 배터리

나는 1년 보직의 원칙에 따라 첫 보직이었던 종합민원실 민사문건 접수·입력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표류하다 기착(寄着)한 곳은 형사과의 국민참여재판 재판부.

아직 법원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돼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국민참여재판부라는 낯선 곳으로 적(籍)을 옮겼다.


국민참여재판이라는 것은 미국의 배심재판을 일부 시험적으로 도입한 재판형태인데 유럽의 대륙법계 색채가 짙은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히 이질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36년 일제 통치를 겪은 탓에 일본의 영향으로 유럽의 대륙법을 받아들였다.

해방 이후 미 군정 3년, 그리고 이어진 미국의 영향으로 정치와 법률 분야에서 영미(英美) 계통의 제도도 일부 수용했다.


사회가 안정적일수록 과거의 것을 답습한다.

현재의 안정이 과거의 완결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기존의 것을 섞고, 재조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된다.

이건 생존을 위해 치는 발버둥이다.


우리나라가 큰 틀에서는 미국처럼 대통령제를 택하면서도, 그 아래 부통령이 아닌 총리를 둔 것이나 대륙법 체계를 따르면서도 영미법계의 배심재판을 일부 도입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도태되지 않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발버둥을 쳐왔는지 알 수 있다.


배심재판을 도입하는 데는 아마도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법원에서 적잖은 기간 일해 본 사람으로서 감히 추측하건대 배심재판을 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사법 불신이 나날이 커지는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을 재판에 참여케 해 상호 이해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래도 밖에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에는 이해도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제도는 내게도 매우 낯설게 다가왔다.

사실 공무원이라는 이름만 달았지 나는 겨우 입사한 지 1년밖에 안 된 햇병아리였다.

게다가 판사님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된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만 했던 판사라는 사람들을 이제는 거의 매일 만나게 된 것이다.


국민참여재판부는 합의부로 구성되어 있다.

재판장 1명, 배석판사 2명.

판사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가 한꺼번에 총 3분의 판사님을 모시게 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원했던 건 아닌데…’


지금은 이미 십수 년 이상 20명 넘는 판사들을 만나면서 판사들에게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다.

다만 내 업무지시자로서 판사에게 어려움은 여전히 느낀다.

그런데 그때는 이제 막 법원이라는 낯선 환경에 던져진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려움보다는 불편함이 더 컸다.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이라니……’


어디 세상일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그저 주어진 대로 해낼 뿐.

나는 1년 전 나의 첫 계장님께 들었던 얘기처럼 대놓고 신기한 듯 판사들을 관찰하진 못했지만 내 나름의 방식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세 분의 판사님을 조용히 지켜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첫 관찰 대상은 좀 너무 ……했다.




기본적으로 ‘판사’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최상위 엘리트 계층 중 하나다.

재산이야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많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법률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이 5천만 국민 가운데 상위 0.01% 안에 드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판사라면 엄청 똑똑하고, 엄청 칼같이 정확하고, 엄청 빈틈이 없겠지?’


내가 생각하는 판사의 이미지는 생체로봇 그 잡채였다.

실제로 부장님(원래는 ‘부장판사’가 정식 명칭이지만 법원 내에서는 통상 ‘부장님’으로 줄여 부른다)을 만나봤더니 내가 상상했던 것에 딱 들어맞는 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거리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코로나 이후로 이 문화가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재판이 있는 날마다 판사들과 법원 직원들이 함께 점심을 먹는 문화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의 식사 분위기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들 가운데서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단연 부장님이었다.

아마도 어색한 침묵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야기꾼을 자처했으리라.


일주일 혹은 2주일에 한 번.

지금 생각해 보면 법원 내의 문화인데 안 하기도 멋하고, 자주 식사를 하자니 대화에 공백이 생길까 걱정되고.

부장님도 식사 약속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참, 이런 거 보면 높은 자리에 있다고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만약 조금 더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이라면 고군분투하는 부장님이 안쓰러워서라도 내가 나서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겠지만 판사라는 신기한 존재들을 여전히 불편하게 여기고 있던 당시의 나는 그저 묵묵히 밥을 먹기 급급했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직원들을 배려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부장님을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판사님들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식사 자리에서의 부장님보다 일할 때의 부장님을 더 많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나는 어설프기 그지없는 직원이었다.

판사든 계장이든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일 잘하는 베테랑 직원들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사기업에서 경력직을 선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이제 겨우 2년 차.

부장님과 계장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사람이라는 건 환경에 익숙해질수록 더 노련해진다.

굳이 따지자면 익숙한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른 개념이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익숙함이 깊어지면 잘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 역시 지금은 비교적 노련한 공노비가 되었다.

10년을 넘게 일했는데 노련해지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자주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종종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할 만큼 이제는 적잖은 업무에 익숙해져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업무적으로 지적받는 것을 껄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면……, 좋다.

변태는 아니다.

그저 자존심을 세우다가 실수가 발생하느니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고 실수가 발생하기 전에 수정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마도 이런 취향은 2년 차 공무원이었던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그리고 국민참여재판부에서 주로 나를 지적하는 사람은 부장님이었다.


내가 당시 부장님을 보며 가장 놀랐던 건 모든 사건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형사 사건의 1심 합의부는 단기 1년 이상의 비교적 무거운 범죄 사건을 다룬다.

단독 재판부보다 더 심각한 범죄들을 심리하기에 사건기록이 두꺼운 건 기본이고, 판단해야 될 사건의 복잡도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런데 부장님은 마치 모든 사건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지난번 변호인이 제출한 의견서에 보면 피고인이 어제까지 관련 증거서류 제출한다고 했는데 제출됐나요?”

“확인해 보고 바로 올리겠습니다.”

“OOOO고합OOOO 사건에 접수된 국민참여재판신청은 대상 사건이 아니던데 혹시 피고인이나 변호인 측에서 연락 없었나요?”

“아직 없었습니다. 전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매번 부장판사실에 결재를 올라갈 때마다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질문이 날아들지 모르는 채로 만전을 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부장님 입장에서는 내가 적잖이 답답했을 것이다.

즉문즉답을 원하지만 꽤나 자주 ‘확인해 보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을 테니까.


사건을 바라보는 부장님의 시야는 매우 광범위했다.

훗날 여러 판사들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인데, 판사들도 각자만의 업무 스타일이 있고, 마음속에 업무의 구획이 정해져 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부분, 거기서부터 거기까지는 실무관이 신경 쓸 부분. 그러니까 그쪽 파트는 굳이 물어보지 않을 테니 알아서 잘해주세요.’


판사들이 일반적으로 잘 신경 쓰지 않는 대표적인 파트가 바로 ‘송달’이다.

송달은 법원이 검찰 또는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통지를 보내는 행위다.

어렵게 말해 송달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지 사실은 그냥 우편 부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우편을 보내는 이 단순한 행위가 법률절차를 진행하는 데 매우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송달은 곧 통지이고, 통지는 당사자로 하여금 불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당시 부장님은 범위를 가리지 않고 사건 전반에 대한 모든 것을 챙겼다.

그 안에는 송달 상황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겨우 2년 차인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부장님을 보는 나의 시선은 이러했다.


‘천잰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얘기다.

2년 차 신입인 내가 못 미더워서 부장님이 폭넓게 신경을 써야 했을지 모른다.

다만 부장판사는 송달 말고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장판사는 사건을 판단하는 판사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으로 경력이 부족한 배석판사를 가르치는 사수이기도 하다.

합의부 부장판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부담감이 큰 자리다.


그런데 그때의 부장님은 이 모든 것을 컴퓨터처럼 해냈다.

질문의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했던가?

확실히 우리 재판부가 담당하는 사건에 관해 질문하고, 앞으로의 업무처리 방향에 관해 지시하는 부장님의 모습을 보면 그분의 지적 수준이 실로 넘사벽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장님 대학생 때 되게 유명하셨대.”


계장님으로부터 부장님의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 수재들만 모인다는 모 대학의 법대 출신.

그 똑똑한 사람들만 모였다는 그곳에서도 동문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인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내 그랄 줄 알았다.

어쩐지 하드디스크에 입력한 듯 사건에 관한 건 사소한 것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더라니.

확실히 기억력은 탈일반인의 수준이긴 했다.


부장님은 지금껏 내가 직접 만나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그분은 내 인생 최고의 천재였다.

어찌나 그때의 인상이 깊었던지 웬만해선 타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지금도 그분의 함자를 잊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식사 자리에서 침묵을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셨던 그분의 목소리조차 생생하게 기억난다.

겨우 2년 차 햇병아리였던 내게 그분은 참 신기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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