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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Feb 14. 2024

사랑은 어려워.

이별에도 예의는 필요해

도미토리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기대치가 있는 것 같다. ‘멋진 여자를 만나게 될까?’ ‘혹은 멋진 남자를 만나게 될까?’ 

청춘들은 “사장님, 사랑 그거 참 어려워요.”라고 나에게 하소연한다. 실연의 고통으로 아프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그러나 밝게 빛이 난다. 미래가 창창한 젊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다. 


“ 누구에게나 사랑은 어려워. 너희들만 힘들겠니? 나에게도 사랑은 어려워요.”    

 

청춘 남녀가 모이는 곳이다 보니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단연 연애와 관련된 비화들이다. 호스트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배꽃 집에서 연애를 시작한 커플 이 있다는 것과, 잘되어 결혼을 하게 된 사례를 뒤늦게 전해 듣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는 재방문한 게스트다. “사장님 그때 왔던 누구와 누가 혹시 기억하세요? 두 사람 사귀다 헤어졌어요.” 라거나 “키 작고 귀여운 여자랑 키 크고 조용하던 남자 기억나시죠? 두 사람 곧 결혼해요.”

“어머나, 그래? 잘됐다.” 나는 ‘키 작고 귀여운 여자’와 ‘키 크고 조용한 남자’를 기억하려 애써보지만 제시된 단서가 너무 한정적이다. 손님들은 날짜로 그날을 기억하지만 호스트는 모든 주말 손님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배꽃집 호스트가 일주일 간 만나는 손님은 몇 명이나 될까? 물론 비수기와 성수기에 따라서 다르고, 연휴와 크리스마스 같이 특별한 날이 있을 때는 더 많은 손님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오는 단골손님이나, 특별한 인팩트를 가진 손님이 아니고서는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결혼을 앞둔 ‘키 작고 귀여운 여자’와 ‘키 크고 조용한 남자’가 함께 하게 될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해 준 재방문 손님의 이야기를 다른 게스트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혹시 오늘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까? 기대감에 찬 그들의 표정을 볼 때면 미소를 짓게 된다. 청춘 시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누려보길 바란다. 연애도 사랑도, 도전도......     


18년과 2     


2015년 12월 겨울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 얼굴이 어둡고 무거워 보이던 사람이 있었다. 십여 명 가까이 모여든 게스트들은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굴이 어두워 보였던 사람은 다른 게스트들에 비해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술을 마시며 놀던 사람들의 시선이 마당 한쪽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향했을 때 두 사람이 불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 있던 게스트가 “사장님 저 사람들 불 피우는데요?” 하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불꽃이 피어오르는 곳으로 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까 사장님이 괜찮다고 하셔서. 제가 태울게 좀 있어서요.”

“아……. 그랬죠? 맞아요. 그런데 뭘 태우세요?”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랑 선물을 태우고 있어요.” 어두운 남자의 얼굴이 불꽃으로 일렁였다.

“여기 이 친구도?”

“네. 저도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태우고 싶은 것이 있어서 갖고 다녔어요. 근데 형님이 태우신다 하기에 저도 오늘 여기서 태워 버리려고요.”   

  

조용하고 어둡던 사람이 불을 피울 수 있냐고 물어 가능하다고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불꽃이 퍼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 사람이 조용히 그들만의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술 마시던 손님들의 시선을 나를 향해 모였다. “태울게 좀 있데요.” 짧게 대답한 후 물 담을 양동이를 찾아 나는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편지를 다 태운 두 사람 주변으로 게스트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낫을 찾아 주변 풀과 쑥을 베어 불 위에 올렸다. 불꽃에서 피어오른 흰 연기가 긴 꼬리를 만들며 어두운 하늘로 사라졌다. 풀냄새가 진동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상념에 잠긴 얼굴들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명암이 도드라진다.     


마흔이 된 남자는 십 팔 년 동안 사귀었던 연인이 있었다.

여자는 처음부터 독신주의자였다. 오래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여자의 마음을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남자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십팔 년의 추억을 정리했다. 상자는 몇 달 동안  남자의 차 트렁크에 들어 있었다.  남자는 바닷가도 가보고, 산에도 올라가 봤다고 했다.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남자는 여자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는 싫었다. 배꽃 집에 이르러 남자는 예의를 갖춘 이별을 하게 되었다.     


동글한 얼굴의 20대는 2주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여자 친구와 사귄 지 2년 되었다. 그의 손에는 몇 장 되지 않는 편지와 작은 인형 몇 개가 들려 있었다. 형의 18년 연애 이야기를 듣고서 실연의 상처로 흘리던 눈물이 쏙 들어가더란다. ‘2년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러면 안 되는데 형 얘기에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편지를 태운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아주 오래전, 내 얼굴도 20대 청년처럼 동글했을 때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연의 상처로 아파하던 내게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한 개가 아니야. 실연의 상처는 다른 사랑으로 치료돼.”     


평생을 통해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이 몇 개나 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엄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한 개 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것들은 다 지나간 것이 되니까.      

만남의 이유가 다양하듯이 헤어짐의 이유도 저마다 다르다. 모든 만남은 결국 헤어진다. 만남에는 헤어짐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얼굴 어두운 사람이 보낸 사랑에는 존엄이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침묵으로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불빛에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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