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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Feb 27. 2024

영화 더 웨일- 삶이 화사 하지는 않더라.-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다가 나는 그만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화면은 찰리가 자신의 온 힘을 모아 마치 첫걸음을 떼는 아기처럼 딸 엘리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찰리를 응원했다.


"넘어지지마라. 제벌 제발..."


찰리를 응원한 것은 나만은 아니었다. 엘리도 아빠를 응원하며 그를 향해 천천히 발을 뗐다.


영화를 만든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12년 뉴욕의 한 소극장에서 더 웨일 연극을 보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감독은 웃고 울었고,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영화 본 사람들의 후기 글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글이 많았다. 영화를 보기 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당부의 글도 있었다.



도대체 영화의 어떤 지점이 사람들의 감정을 복받치게 하였을까...?



영화 더 웨일은 일반적인 상업 영화에서 보여지는 스펙터클도, 화려한 명성을 가진 배우도 없다. 오히려 많이 지루했다. 영화라기 보다는 '세일즈맨의 죽음' 류의 등장인물, 공간이 아주 제한적인, 그래서 여간한 인내심으로는 내려앉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연극을 볼 때처럼 지루했다.


영화의 배경은 찰리의 방. 찰리는 272킬로가 나가는 비만환자다. 그는 보조기 없이는 혼자 걷지도 못한다. 그를 돕는 유일한 방문자는 리즈(홍차우)이다. 그녀는 찰리의 동성연인의 여동생이다.

찰리는 결혼을 해서 딸 엘리를 낳고 살다 뒤늦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고 가정을 버리고 떠났다.

그의 연인은  복음주의 교인이었고 교회의 목사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신앙과 자신의 성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살을 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찰리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영문학 교수로 온라인 수업을 이어갈뿐, 세상과 단절 된채로 그는 비만 환자가 되었다. 그의 비만으로 심각한 심장질환을 앓게 되었다. 찰리는 죽음이 곧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찰리의 딸 엘리가 찾아왔다. 엘리는 낙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빠 찰리에게 자신의 실패는 찰리가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찰리는 엘리가 8살 때 '모비딕'을 읽고 쓴 에세이를 들어 엘리에게 "너는 대단한 아이다"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엘리는 그런 그를 더 경멸한다.


두 사람의 서로 나누는 대화는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 엘리는 찰리를 탓하고 찰리는 엘리를 추켜 세운다. 엘리가 찰리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을까? 찰리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다. 관계가 공허하다. 마치 물없이 마른 빵을 잔뜩 입에 우겨 넣고 삼켜보라고 강요 하는 것 같았다.

모든 영화적 장치는 이것을 의도한 것처럼 답답하게 짜여 있다. -소파를 꽉 채운 찰리의 거대한 몸, 물건들로 꽉 들어찬 찰리의 방, 엇갈리는 대화, 가끔씩 열리는 문 밖에서 종일 내리는 비까지.- 모든 배경이 우울하고 답답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굳게 닫힌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싶었다. 찰리의 방에 신선한 공기를 가득 채워 넣고 싶었고, 찰리에게 너의 희망을 찾아!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단촐한 출연자(5명)와 고정된 장소(찰리 방), 그리고 반복되는 대화 등 모든 답답한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뿜어내는 생동감은 대단했다. 특히 찰리를 연기한 배우브랜든 프레이저의 파랗고 커다라 눈을 볼 때면 그나마 답답함이 사라지곤 했다. 커다란 그의 눈에 담긴 딸에 대한 애정으로 그나마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살이 찌면 눈도 작아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찰리역의 눈 크기가 작아지지 않아 영화를 보는 내내 신기했다.), 사악한 (엘리 엄마는 딸을 그렇게 보았다.) 엘리(세이디 싱크 분)와 리즈(홍 차우 분) 의 연기도 무대위 배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동작과 소리가 컸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다. 그녀들의 소리로 들려주는 영화의 메시지는 난해했다. 분명한 것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장면들이 우리들의 일상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서로를 돕고 싶어지만 마음과 달리 드러나는 표현(행동)에서는 핀트가 맞아 떨어지지 못한다. 객관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모호함이 있다. 서로는 서로에게 최선의 선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구원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자신의 관점으로 서로를 돕는 우리들의 모습. 우리는 삶이 밝고 화사하며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으나, 실은 찰리의 방처럼 답답하고 칙칙하며 단조롭다는 것. 그러나 서로 어긋날망정 서로를 사랑하며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지지하며 응원한다는 것.

시종일관 서로가 원하는 것들이 묘하게 틀어져 있던 찰리와 엘리는 마지막 순간 몸을 돌려 서로를 향해 발을 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울음이 터져나왔던 순간이.


나는 찰리를 응원했다. "넘어지지 마. 인간으로서 너의 품위를 지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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