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남순 Feb 22. 2024

카톡으로 오는 좋은 글에 대한 유감


요즘은 지인들과 전화 통화보다는 카카오앱을 더 많이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꼭 전화를 해야 하는 상황, 즉 자식의 결혼소식이나 부모님의 부고를 알리는 일 같은 것도 집안의 큰 경조사도 요즘은 대부분 전화를 대신한 메신저로 소식을 받게 된다. 이런 경우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려야 하기 때문일 거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식이 담고 있는 무게감에 비해서 소홀히 취급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기도 하다.  또 상대는 그렇게 했는데 다음번 내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는 전화로 연락을 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며 머뭇거리게 된다.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 관습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카톡으로 받은 소식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상대의 분주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옹졸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받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메신저가 편리한 소통을 위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간 약속을 잡을 때는 전화나 대면보다는 오히려 카톡으로 하는 것이 더 간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메신저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단점은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는 감정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안으로 개발된 것이 이모티콘이겠지만, 이모티콘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지인들 중에는 아예 카카오앱 사용을 하지 않는 사람도 꽤 여럿이다. 시간과 때를 배려하지 않고 오는 문자에 대한 피곤함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같은 이유로 카카오 알림 벨 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해 놓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리는 벨소리는 정신적 피로감을 가중 시겨서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일들에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인들에게 오는 중요한 알림도 있지만 내가 하루에 받는 대부분의 문자는 의류나 보험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다. 요즘은 꼭 필요한 자동차 보험을 들 때도 관련 상품과 무관한 의료 관련 안내를 받겠다는 동의를 강요받는다. 새로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고 나면 여지없이 건강 관련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전화가 증폭한다. 필수보험인 자동차 보험을 가입하고 난 뒤에 개인의 건강 상태나 재정상황을 고려한 개인 선택 사항인 치아보험이나 여타 건강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전화에 시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시달림이 불편해서 필수항목이 아닌 것은 거절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곤 했다.  보험 설계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문서에는 미필수동의 항목이지만 현실에서는 필수항목이 되었으니, 거절을 하고 싶으면 6개월 후에나 직접 홈페이지를 찾아가서 거절을 누르라며 끝까지 상냥함을 유지한다. 수락은 상품을 가입할 때 해야 하지만 거절을 할 때는 너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종신 계약을 의미할 뿐이다. 수락을 거절로 바꾸기 위해서 홈페이지를 방문한 기억은 없다. 홈페이지 가입이 새로운 광고에 접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카톡을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카톡이 가진 편리성 때문이다. 가족단톡방이나 성향이나 성격에 따라 만들게 되는 단톡방은 그중 카톡만이 가진 우월한 점이다.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피해 또는 방해를 받지 않고 소공체 구성원들끼리 소통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문장 하나로 다수의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며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은 엄청난 편리성이 있다. 기존의 문자와 비교하게 되면 카톡의 편리성과 장점은 훨씬 더 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카톡을 사용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신하여 떠안게 된 불편이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들이다. 불평은 늘어놓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불편할 뿐이고,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방법으로 대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인들이 보내오는 글 중에서 광고글과 다름없는 피곤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있다. 그것은 '좋은 글'로 명명된 것들로 이것은 다른 이의 글을 옮겨 적어 놓은 글이다. 인생에 관한 짧은 격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인생에 충고를 하는 그럴싸한 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글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켰던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가 서로를 모르는 지인 두 명에게서 같은 내용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종류의 글이 가지고 있는 심각성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는데 있다. (나) 사고(思考)의 거름망을 가동치 않고 읽게 되는 글들은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도 나는 톡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그만 보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자칫하다가는 편견이 많다거나, 남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또는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갑갑함을 느꼈던 사람이 혼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몽테뉴의 책 <에세>를 읽으면서 나는 공감의 기쁨과 시원하게 까발려진 내용을 발견하고는 절을 하느라 책에 얼굴을 박을 뻔도 하였다. 숨기고 감추고 있던 내 목소리를  몽테뉴의 이름과 말에 기대어 내 비겁을 외쳐보게 되었으니, 신나지 않을 수 없다.


"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다면? 세네카에 의지한다.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고 싶다면?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우리에게도 무척 익숙한 세네카(BC 4)와 키케로(BC 106)는 기원전 사람으로, 로마시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철학자, 문학자이다.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그들(남의) 말을 인용하기를 즐겨했던지 몽테뉴는 '다른 이의 지식에 기대어 있는 그들을 '앵무새'로 비유하며, 그런 사람들의 행위를 '남에게 매달려 구걸' 하는 짓으로 단정했다.

몽테뉴는 남의 지식에 '구걸'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의 가치로써 정립되는 것, 즉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우리는 무슨 말을 하나?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세, 258-


내가 지인들의 카톡에서 불편을 느꼈던 지점도 아마 그 부분이었을 것이다. 선별한 좋은 글을 지인들과 공유하며 공감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글이라면 자신의 생각 한 두 줄 정도 넣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글 두어줄 적다고 해서 밥을 짓지 못해서 가족들의 저녁을 굶기는 사태가 일어나거나, 출근 시간에 늦어 해고를 당할 정도의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은 테니 말이다. 몽테뉴가 <에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유하며 본래 자기고 있던 '나의 목소리'를 내라. 내가 지인들의 카톡을 받고 느꼈던 유감을 몽테뉴를 통해서 얻게 된 답이다.


*** 몽테뉴는 1533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법관, 외교관, 보르도 시장을 지낸 사람으로 1592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37세의 나이에 모든 공적 활동에서 은퇴를 선언하고는 <에세>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죽기 집필을 했던 몽테뉴의 <에세>를 몽테뉴의 <수상록>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어판을 재 빈약한 것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역자는 밝힌다.

"에세 (essai)는 '시험하다', '검사하다', '경험하다', '처음 해보다', '해 보려고 애쓰다'를 뜻하는 동사 에세이예(essayer)'에서 그가 만들어 낸 명사"로 몽테뉴에 의해서 '에세'라는 장르는 창조'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하나보다 둘이 낫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