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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Mar 04. 2024

전등사 산책

산성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 앞에서 지레 겁이 났다. 불과 얼마 전에 문수산을 오르다가 20분도 안되어 되돌아온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산을 잘 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지경까지 되었는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지럽고 구토가 나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것이 부담은 되었지만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무리하는 것도 피하는 일이지만 중도 포기가 무서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도 살면서 피하는 일이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느긋이 오르리라 마음을 먹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무 계단쯤 올랐을까?  다시 문수산과 같은 증세가 올라왔다. 심장이 요동을 치고 무엇보다 속이 메스껍고 하늘이 노랗다. 쉴 때마다 내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던 남편도 마음이 불편했던지, 

"이래서 산티아고 가겠나." 한숨을 쉰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내 속도로 쉬었다 올랐다를 반복하며 마지막 계단에 올랐다. 큰 나무 밑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분한 것도 같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하다. 내 체력이 이 정도였나, 자괴감과 함께 마음이 복잡했다.



여행을 할 때면 웬만해서는 지역 사찰을 빼놓지 않는다. 절이 가진 고즈넉한 분위기에 절로 심신이 안정되는 평안함과 함께 오래되고 좋은 숲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숲에는 당연하게도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성인 두셋이 손을 맞잡아야 그 둘레를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큼 큰 고목 볼 때면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5. 6 백 년 된 보호수들을 볼 수가 있는데, 말이 5.6백 년이지. 그 세월을 살아낸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겨우 몇십 년을 살면서도 불평과 불만의 보따리가 이렇게나 커다란데, 5백 년. 6백 년의 세월은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지 상상도 되지 없는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볼 수 있다는 바오밥나무는 2천 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라고 한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 시간 앞에 서면 절로 종교적 숭고함을 갖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나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면 때때로 산을 찾을 찾는다.


나무 사이를 그저 걷기만 해도 금세 마음이 편안하다. 넓게 펼친 가치 그늘 안에 들어가 오래된 나무를 그냥 올려다보기만 해도 좋다.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도 좋지만 겨울도 좋다. 잎을 다 떨군 뒤 드러나는 겨울나무의 자태는 얼마나 우아한고 숭고한지!  그 당당한 모습에서 세월의 황홀함을 보게 된다. 견뎌낸 자만이 누리게 되는 '오늘'을 보며 위로를 찾기도 한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라든지 낡고 오래된 물건, 오래된 나무와 같은 것들 앞에서는 삶을 투정할 수 없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낸 것들이 뿜어내는 숭고함에 절로 경외지심하게 된다. 


나는 전등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전등사 숲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전등사에서 숲을 보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전등사를 50프로만 본 것이라고. 

전등사 숲에는 극상림에서 볼 수 있는 수종 중 하나인 서어나무가 있다고. 

숲을 산책하기에는 맑은 날도 좋고

비가 내리기 전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날든 더 좋다고

그런 날의 숲은 칼라(color)가 아니라 흑백 사진 같은 따뜻한 정서가 있다고. 

전등사에서 임명한 홍보대사라도 되는 양 떠들어댄다.


움츠려 봄을 기다린 것은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말을 맞아 봄 나들이 나온 행락객들로 정족산이 소란하다. 연이은 행인들의 발소리에 덤불 속 붉은 머리오목눈이도 덩달아 바쁘다. 숲에는 아직 봄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후회하는 '3가지 껄'이 있다고 했다.

더 많이 놀껄. 더 많이 웃을껄. 더 많이 베풀껄.

많이 웃고, 많이 베푼 것에 대해서는 장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더 많이 놀껄'에는 백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노는 시간을 유예하지 않았다. 

놀고 싶을 때 놀았고 

놀아야 할 때를 놓치지 않고 스스럼없이 어울려서

혼자서도 잘 놀았다. 


돌이켜 보아도 참 잘했다, 스스로를 칭찬하는 일이다.  

몸의 기능이 떨어졌다고 해서 기죽을 건 없다. 탓할 일도 아니다. 중국을 천하통일했던 진시왕도 '시간'을 되찾고 싶어 불로초를 찾아 천하를 돌았지만 결국 실패하지 않았던가!  세상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 


전등사에서 본 나무의 수피이다. 나무의 형태로는 소사나무라 짐작되었지만, 수피를 보고는 확정할 수는 없었다. 수피의 무늬가 매우 아름다워서 여러장 사진으로 담았다.


젊어 한 때 나는 자연안내자 교육을 받으며 나무와 꽃 그리고 새 공부를 했었다. 덕분에 자연에 나가면 조금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전등사 숲에는 고목들이 많다. 나목(裸木)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수피로 이름을 찾는 재미도 있다. 


나무도 저마다의 표식이 있다. 잎이 떨어진 겨울나무에서는 수피가 표식이 된다.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 삐죽 위로 뻗은 나무, 둥근 나무 등 수형으로도 구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세밀한 표식은 수피이다.  사람도 매끈한 피부, 여드름이 많이 나는 피부, 거친 피부, 색이 진한 피부, 하얀 피부 등 저마다 개성 있는 피부색을 가졌듯이 나무도 그렇다.

서어나무 수피는 회색으로 매끈하다. 처음 서어나무 수피를 보았을 때 코끼리 피부가 떠올랐다. 코끼리보다 서어나무 수피가 더 매끈해서 놀랐다. 서어나무에는 회색 수피에 길게 그어진 세로줄무늬가 있다. 그 무늬로 서어나무는 코끼리 피부와 더 닮아 보인다. 


가장 아름다운 수피를 가진 나무로 나는 목백일홍과 모과나무를 꼽는다. 두 나무 모두  매끄럽고 밝은 수피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목욕으로 떼를 벗겨내며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듯, 모과나무와 목백일홍, 그리고 달고 맛있는 포도송이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도 묵은 떼를 벗는다.  스스로 묵은 외피를 벗어내고 매끄러운 속살을 드러난다. 속살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아기 피부같이 매끄러운 나무의 수피에서 쉬 손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나무 보는 재미에 시간을 잊고 있었던가 보다. 어디 있냐는 남편의 전화다.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흙먼지를 쓰고 넓적한 바위에 앉아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멀리서도 알아보겠다. 아직은 꼿꼿한 어깨와 허리를 유지하고 있다.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늠름한 자태로 서 있는 마을 앞 당산나무 같이 든든하게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그가 반가워 뛴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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