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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Mar 25. 2024

시누와에서 만난 사람들

-안나푸르나 트레킹-


시누와(2340m)를 오르던 중 네팔 할머니를 만났다. 옆에 커다란 보따리를 두고 앉아 쉬고 있었다. 얼굴은 검게 타고 주름이 계곡처럼 펼쳐져 있다. 행색은 남루한데, 이 할머니 치장은 대단하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여자라던가. 귀걸이와 코걸이 목걸이까지 했다.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와 나눈 이야기를 가이드가 통역해 주었다. 가이드 쿠마는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자식들하고 편히 살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 왈, “내사 마 도시에 사는 자식들 집에 살다가 하도 갑갑해서 다시 촘롱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하하하하 우리네 할머니랑 똑같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평생 살던 사람은 봄이면 씨 뿌려 내 새끼처럼 고물고물 키워 내던 땅이 그립고, 머리 위에 이고 살던 하늘이 그립고, 멍멍개 짖는 소리, 이웃 할매가 어깃장을 부리며 우겨대던 그 소리가 그리워서 고향 땅으로 돌아오고 만다. 강화에서 20년째 농사꾼 흉내를 살다 보니 이제는 그 그리움들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쿠마가 자루를 가리키며 곡식을 사가지고 집으로 가시는 중이냐고 묻자, 그것이 아니라 할머니는 지금 씨앗을 뿌리러 가는 중이란다. 할머니는 촘롱에 사는데, 밭은 고개를 넘어 있단다. 자루에는 뿌릴 씨앗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씨앗자루를 등에 지고 할머니는, 말하자면 내가 사는 이강리에서 밭이 있는 내가면으로 다니는 셈이다. 이강리에서 내가면까지 걸어서 가자면 내 걸음으로도 1시간이 조금 넘어 걸린다.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지고 가자면 몇 번은 쉬어야 할 것이고 2시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할머니는 70이 넘었다고 했다.

자루 안에 옥수수와 콩이 들었다고 한다. 고것 심자고 그 먼 길을 오고가는 것이다.

나도 돌아가면 늦은 옥수수와 노란 메주콩을 심을 것이다. 매주콩 심고  보름쯤 뒤에는 서리태콩도 심어야겠지. 그리고 8월 두 번째 주 근처에는  김장배추와 무 씨앗을 뿌려야 한다. 8월에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8월에 웬 김장파종? 놀랄 것이다.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신기했고, 이상했다.  농사를 지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농사와 무관한  사람들 대부분은  양력으로 살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음력 절기로 산다. 8월 둘째 주 근처에 입추가 들어 있다고 하면 수긍이 좀 되려나...?
그래서  배추씨, 무 씨  뿌리고 나면, 조금 센치한 기분에 젖기도 한다. 올 해도 다 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누아에서 할머니를 만나 무척  반갑고 좋았다. 우기인데다가 네팔 상황이 워낙 좋지 않은 때라서 그랬는지, 트레킹 도중에 내가  만난 여행객은 열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 중간중간 마을이 있어서 그나마 사람구경, 그네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지, 마을마저 없었더라면 정말이지 이 넓은 산에 나와 가이드, 그리고 포터 셋뿐일 뻔했다.
 
열사람이 채 되지 않는 만남에는 노부부가 있다.  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서 내려와 거의 도착지점에 이르렀을 때였고 노부부는 반대로 이제 막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 분은 산을 올라도 괜찮을까 염려 될 만큼 머리에 흰 눈이 가득 내려 앉았다. 차림도 단출했고 가이드와 포터도 없이 단 두 분뿐이었다, 할머니는 가냘픈 팔에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할아버지 뒤를 따라 올랐다. 한 계단 올라가서 할아버지는 뒤돌아 할머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내민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힘겨운  걸음을  떼었다. 두 분의 트레킹은 슬로모션이다. 한참을 서서 두 분을 지켜보았다.
포터 껀네는  두 분이 초면이 아닌 듯, 히말라야를 여러번 오신분들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가이드와 포터를 대동치 않는 거라고.
등에 진 배낭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높이 오르진 않을 것 같아  보여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힘겨워 보이는 산행에 두분께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아쉬움이 없진 않으나 잘 했다 싶다. 
손을 내밀고 또 그 손을 잡고 천천히 산을 오르는 두 분이 서로에게 지극하고 정성스럽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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