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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May 14. 2024

아이는 안다.

그림책 1-국시 꼬랭이


작은 도서관이 만들어진지는 10년도 더 된 것 같다. 처음 도서관을 만든 주체는 '주민자치회'였다.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주민자치회에서 마을에 도서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반가웠으나, 새로 생긴 도서관은 명색이 무색할 정도로 오래된 책들과 허술한 공간과 관리 부족으로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람들 마음이 나와 별반 다름없었던지 가끔씩 방문한 그곳은 사람 온기를 찾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다가 작년에 다시 가본 그곳은 그 사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 들인 책장에는 신간들이 장류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고, 나무 책상과 의자가 들어와 있었고, 냉. 난방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일주일에 두 번 전문 사서가 출근을 하고 있었다. 방치되다가 없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새로 단장을 하고 제법 이름에 걸맞은 작은 도서관으로  면모를 갖추어진 것이  반갑고 기뻤다.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그러다 출근한 사서를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감을 쌓게 되었다. 사서는 일주일에 두 번 여기 출근을 한다고 했다. 요일을 정해서 순환 방식으로 다른 도서관 관리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도서관이 너무 좋아져 좋다는 내 말에 왜소한 사서는 '공을 많이 들였다'라고 대답했다. 사서의 수고에 화답하듯 책상 위에 마련된 대출장에 대출자의 이름이 빼곡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환경을 간추 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서는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 정보를 주었다. 참석해보고 싶었으나 시작한 지가 꽤 되어서 합류는 어렵겠다며 내년에 신청을 해보라고 했다.

훌쩍 해가 바뀌어 문자로 프로그램 안내를 받았으면서도 신청기한을 넘기고 말았다. 무심함을 변명하자면, 문자로 발송되는 문서들을 읽기에는 내 눈이 너무 낡은 탓이다. 작은 화면을 이리저리 밀어가며 글씨를 읽는 것이 힘들어 PC로 읽어야지 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관심이 크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림책 읽는 모임'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어떻게 진행되며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는지 그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낡은 눈과 관심부족으로 잊었던 거다. 책 반납을 하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그림책 모임 정보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림책 모임 하루 전날인 수요일이었다.

"내일 10시에 프로그램해요. 참여만 해 봐도 괜찮으니까 관심 있으시면 한번 와 보세요."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끌렸다. 핸드폰에 알람설정을 해 두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또 잊어버렸을 것이다.

목요일  오전 10시,  입구에서는 책장 뒤 맨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참석자가 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도서관에는 사람의 온기로 처음으로 따뜻했다.

사람들 앞에는 골라온 책이 놓여 있었다. 진행을 맡은 분은 긴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젊어 보였다. 40대로 보이는 진행자는 현역 동화작가였다. 참여자들은 대체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눈 어두운 나이에도 책을 가까이하려는 그들이 아름답다.

"한 주간 어떻게 보냈는지 근황토크를 하고 있었어요." 진행을 맡은 그림책 작가가 나에게 말해주었고, 옆에 앉은 사서는  "오늘은 주황색이니까, 저쪽 동화코너에 가셔서 주황색과 관련 있어 보이는 책 한 권 가져오세요." 나직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매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깔 중 한 가지 색깔의 책을 선정해서 읽는다고 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임에 흥미가 갔다.

서가에서 고른 책은 <국시 꼬랭이>라는 (이춘희 글, 권문희 그림-사파리 출판사) 그림책이었다. 책 등에 주황색이 들어간 책이었다. '꼬랭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고 익살이 느껴져서 선택을 했다.

근황토크를 마치고 각자 가져온 그림책을 읽는 시간을 가진 후 참석자들이 책을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책 소개를 끝낸 사람이 다음 사람을 지명했는데, 첫 번째 했던 사람이 나를 지목해서 두 번째로 그림책을 소개하게 되었다.



많지 않은  글씨와 커다란 활자로 되어 있어 눈의 피로가 적어서 좋다. 김영희 작가였나? 먼 이국에 살면서 닿지 않는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닥종이로 빚어냈던 분. 그 작가의 형상들이 뛰어다니는 것 같은 인물들이 내 어릴 적 추억을 돋는다. 콩밭 매는 날, 엄마는 새참으로 '국시'를 끓인다. 형 성원과 동생 재원이 는'국시꼬랑이'를 더 먹겠다고 투닥투닥 싸우다가 화해를 하고 불에 구운 국시꼬랭이를 동네 아이들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는 훈훈한 내용이다. '꼬랭이'는 '꼬리'의 비표준어로 강원, 경남, 전라, 제주, 충청, 평안, 함남, 황해, 중국 요령성에서도 넓게 쓰이는 단어로 검색된다. '꼬랑댕이'라고도 한다는데, 꼬리, 꼬랭이, 꼬랑댕이, 세 개의 단어는 어디에 갔다 붙이든지 둥글고 경쾌한 느낌이 날 것 같다. 꼬랭이가 붙은 이 그림책도 경쾌하고 따뜻했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성원과 재원처럼 나에게도 두 아들이 있다. 둘은 세 살 터울이 난다.

큰 아이는 정적이고 조용했다. 밖에서 놀기보다는 내 옆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렸다. 반면 세 살 늦게 태어난 작은 아이는 온 아파트 사람들이 다 알만큼 유명했다. 아파트 사람들이 부르는 작은 아이의 이름은 '백구호집 아들'이었고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는 '맨발의 총총'이었다. 109호 집은 우리 집 호수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맨발의 총총은 어디서 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하루는 영현이 엄마가 총총의 유래를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집 작은 아이와 영현이는 단짝이었는데 두 녀석이 특히 종일 맨발로 돌아다녔다. 맨발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지나가던 어른들이 '재들은 맨 잘의 청춘이구먼' 했던 말을 듣고 저희들끼리 '맨발의 총총'이라 부르게 된 거란다.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세 살 때였다.


백구호집 아들로 불리며 작은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어찌 건강하던지 세 살 많은 제 형도 상관이 부하 다루듯 해댔다. 어느 저녁 셋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있었고 두 형제는 나란히 앉아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는데 둘이 한 개의 레고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을 하던 작은 아이 입에서 제 형을 향해 욕을 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세 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욕이 아니었다. 못 들은 척하고 귀를 세우고 다시 들어봐도 욕이 분명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작은 아이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상황으로 보아 작은 아이도 나쁜 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너 지금 형한테 뭐라고 했지, 뭐라고 한 거야?"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씨바로옴아" 눈을 내리깐 작은 아이는 발음도 되지 않는 말을 아주 작게 말했다.

"그 말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형아들."

"그 말이 좋은 말이야, 나쁜 말이야?"

"나쁜 말..."

"이렇게 이쁜 입에서 나쁜 말 하면 요, 안 요?"

"안돼."


나는 이쁜 아이입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는 이쁜 입으로는 이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안다. 나쁜 말인 줄도 알고, 떼쓰면 안 되는 것도 알고, 어떤 행동이 엄마를 힘들게 하는 줄도 안다. 아이가 안다는 것을 어른들이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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