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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남순 Mar 11. 2024

내가 사랑하는 것들

기온이 오르고 바람도 따스한 날이다. 바구니와 호미를 챙겨 들고 텃밭으로 향했다. 나를 밖으로 불러낸 것은 ‘따뜻함’이다. 따뜻한 봄 햇살에 기대어 밖으로 나온 나는 기지개를 활짝 켜고 움츠렸던 추위를 털어낸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노란 황토 흙 위로 거뭇거뭇한 것들이 보인다. 땅에 납작 엎드려 있던 것들은 냉이다. 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향긋한 봄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3월 초, 추웠다 풀려다 변덕을 부려도 올봄은 예년보다 빠르다. 호미가 부드럽게 땅을 파고들어 냉이를 캐낸다. 땅 위로 솟은 잎보다 땅속에 들어있던 뿌리가 서너 배는 더 길다. 흙속에 들어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길고 매끈하게 뻗은 뿌리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다.  크기는 작아도 냉이 향을 따라올 것이 이 계절에는 없다. 봄을 대표하는 나물이다.     


텃밭에서 봄나물이 나오면 내 마음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봄나물만 있으면 누가 찾아와도 배부르게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봄 텃밭은 나에게 다양한 식재료를 제공하는 마트인 셈이다. 누구라도 배부르게 먹일 수 있는 넉넉한 엄마 품 같은 봄 텃밭을 나는 사랑한다.     

봄에 나오는 냉이와 쑥은 만만하다.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열 가지를 넘는다. 새콤달콤 무치는 초무침, 쑥과 냉이를 넣어 부친 부침개,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국, 갖은양념 넣은 무침까지...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다.


대학가에서 와인바를 운영하는 젊은 사장님들이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냉이를 대접했다. 그들을 위해 만든 요리는 냉이초무침이었다.

두 번째 방문한 그들은 와인을 넉넉하게 여러 병 가져왔다. 첫 번째 방문 때 두 사람만 오붓하니 마시려던 와인이 내가 끼게 되면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와인을 잘 마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함께 했던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깨끗이 씻은 냉이에 사과와 달래를 썰어 넣고 레몬즙을 넣어서였던지 와인과도 꽤 좋았다.

와인과 치즈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와인과 보쌈도 꽤 잘 어울린다.    

 

수연 씨와 친구에게는 냉이 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날은 11월이었다. 아직 땅이 얼지 않았기 때문에 냉이 한 줌을 캘 수 있었다. 냉이를 끓인 물에 살짝 데쳤다. 이때부터가 중요하다. 물기를 짜낸 냉이를 정성을 들여 가지런히, 예쁘게 담아야 한다. 그리고 초장도 예쁜 접시에 담아서 냉이를 회처럼 생각하며 초장에 찍어 먹는 거다. 이름 하여 냉이회다. 내가 이름을 붙였다.

계획도 준비도 없이 불쑥 ‘가자~’하고 떠나왔던 여행이었다고 했다. 내가 만들어준 냉이회는 기대하지 못하고 방문한 곳에서 받게 된 환대였던 것일까? 감격하며 접시를 싹싹 비워낸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받은 기쁨이 더 컸다.     


안개꽃처럼 작고 하얀 냉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쑥 철이 시작된다. 쑥도 냉이만큼 부지런하고 강인한 식물이다. 냉이와 쑥만 있어도 나는 부자다.  지난봄에 온 게스트들에게는 건새우를 넣어 쑥 부침개에  부쳐 주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한다.

‘레시피...?’

“아, 왜 그러십니까? 선수 분들께서...!”

주부 경력이 웬만했던 그녀들에게 건새우 외에는 딱히 알려줄 것이 없었다, 진심!!    

 

요즘은 젊은 사람들 중에도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다. 지방 여행을 하면서 사 온 막걸리들을 각자 들고 와 팔도 막걸리 판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밤이 많이 나는 지역에서는 밤 막걸리를 조를 넣어 만든 조껍데기 막걸리도 있다. 인삼을 갈아 넣은 인삼 막걸리, 쑥을 넣어 만든 쑥 막걸리도 있다. 지방색이 들어간 막걸리는 농주를 벗어나 브랜드가 된 것 같다.


막걸리를 들고 온 사람들에게는 나는 기꺼이 부침개를 만들어 준다. 내가 만든 부침개에는 밀가루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봄에는 냉이와 쑥을 넉넉하게 넣어 만들고, 겨울에는 김치 속을 털어내고 김치를 송송 썰어서 김치 부침개를 부친다. 가을에는 밭에서 키운 배추를 뽑아 배추 전을 부친다. 

어떤 재료를 넣고 부치든 부침개와 막걸리는 정말 천생연분이다.   

   

홀로 여행을 하며 3일을 같이 보낸 미연과는 함께 쑥차를 만들었다.

차를 만드는 것은 인내와 기다림이다. 

쑥을 처음 캐본다는 미연에게 캐는 법과 뒷 손질법을 알려주었다. 미연은 쑥을 코에 대고 끙끙 향을 맡아보고 펼쳐서 이것이 무엇을 닮았나 신기한 듯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캔 쑥 양은 많지 않았다.


쑥을 씻어 양지바른 곳에서 물기를 말린 뒤 본격적으로 차 만들기를 시작했다. 

차는 약 불에 만든다. 기름종이를 깐 프라이팬이 따끈하게 달궈지면 애쑥을 넣고 덖기 시작한다. 장갑 낀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놨다 펼쳤다 뭉치기를 반복한다. 쑥이 숨이 죽으면 프라이팬에서 꺼내 쟁반에 펼쳐 김을 빼면서 살살 굴린다. 유념의 과정이다. 여러 번 덖기와 유념의 과정을 반복한다. 

덖고 유념 과정 40여분. 구수하고 향긋한 쑥차가 완성되었다. 뜨거움을 참아가며 쑥차를 완성한 미연의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감을 물었다.

“두 번은 못 하겠네요. 하하하하”

“그렇죠? 그래서 사람들이 사서 먹는 거라니까. 하하하하”     


이런 일들은 아무런 계획도 의도도 없이 시작된 것이 때문에 더 기억에 남고 또 추억이 되는 것 같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하찮은 것이 될 수 있고, 마음을 열지 못한 사람과는 해낼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냉이가 꽃을 피우게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마음을 나누는 것도 타이밍이 맞아야 일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더 귀하다.


다시 봄이다. 텃밭엔 냉이가 자라고 쑥도 움찔거리는 봄이다. 

대단하지도, 별것 아닌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봄

그런 봄을, 그런 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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