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는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책의 저자인 김화숙 작가는 브런치에서 '꿀벌 김화숙'으로 활동하는 작가이며 나와는 온라인 글벗이기도 하다. 간암 극복기인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 (김화숙, 생각비행, 2022)에 이어 두 번째 발간한 이 책은 첫 책의 프리퀄쯤 된다고 작가는 밝힌다.
두 책 모두 작가의 성장 이야기다. 성장은 아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성장을 위해 매 순간 가뿐 숨을 쉰다.
아픈 시간을 통과하며 성장을 거듭하는 김화숙 작가를 작가로, 또 동료로 응원한다.
김화숙 작가의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를 읽었다.
제호에서 보이듯 이 책은 종교로, 또 가부장적 질서에서 순종과 침묵을 강요받으며 착한 목자를 꿈꾸던 이십 대를 넘어 목사의 사모로, 또 세 아이의 엄마로 살다가 간암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몸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며 ‘그림자’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각성하게 된 한 여성의 홀로서기, 작가로 변신하기까지 삶을 여정을 그린 책이다.
책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김화숙 작가는 여자 나이 마흔에 이르렀을 때 인생 전반전과 다른 후반전의 삶을 고민을 질문한다.
2장에서는 30대 목사 사모로 살았던 여자의 이야기다. 이 시절 김화숙 작가는 ‘스스로를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이라고 회상한다.
3장에서 작가는 1980년대를 살았던 20대 피 끓는 청춘이 관통했던 1980년대의 한국 사회와 그녀가 몸담았던 선교 단체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시기에 대해 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가스라이팅‘을 이야기하며,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탄식을 한다.
4장은 2천 년대로 되돌아가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며 묻고 공부를 시작하던 것들을 기술한다. 예술가, 사회복지사, 미자립 교회 사모로 살며 한편으로는 자기 주도적으로 세상을 탐색하며,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시기다.
5장은 ‘50대 이후 본적 후반전 이야기이다. 2014년 암 수술 이후 판이 뒤집힌 새 삶의 면면을 보여준다.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에 다 싣지 못한 새 몸 새 길 이야기, 매체에 쓴 글, 그리고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행동하는 중년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왜 쓰고 싶지?”
“그 누구도 다시 여러분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지 못하게 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절(메시지 성경)
작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내가 겪은 부당한 일을 내 딸과 다음 세대는 겪지 않기를 소망”하며 글을 쓴다고 했다. “이제 더는 그 누구도 사람에게 종의 멍예를 씌우는 일을 보고 싶지 않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교회의 이름으로도, 사랑과 권위의 이름으로도, 국가의 이름으로도.”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는 작가 스스로를 강제하며 속박했던 지난 시간의 자신을 다독이며 ‘화해’하는 책이다. 나아가 가부장제의 위계로 ‘순종과 침묵’의 그림자 생활을 강요받았던 동시대의 여성들과 ‘소통’과 연대를 꿈꾸며 함께 손잡고 새‘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를 희망하는 제안서이다.
p120~121 - 문제는 그때 내가 배운 사마리아 여자가 너무 납작한 이름이었다는 점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영혼의 목마름, 정욕, 음란의 대명사였다. 본문에 전혀 그런 내용이 없는데도 말이다. 세상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사랑에 목마르고 의미에 목마르고 자기를 찾아 방황하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사마리아라는 정치적, 사회적 맥락은 가볍게 지나치고 여자에게는 죄를 무겁게 덧씌우는 게 과연 예수의 관점이었을까? 남작 한 사마리아 여자가 20대의 내 이름이 될 줄 몰랐다. 내 목에 주홍 글씨가 되고, 자가 혐오의 덫에 걸리게 할 줄도 몰랐다.
p122- 사마리아라는 차별과 멸시의 땅에서 여자라서, 여러 남편을 전전해서, 왕언니는 더 멸시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과오나 죄와 상관없는 운명의 장난일 가능성이 높다. 사회의 낙인과 배제에서 왕언니는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예수와 영혼의 대화를 했고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장벽을 스스로 깨고 세상으로 나갔고 입으로 예수를 알렸다. 여성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혁명 같은 일이었다.
p127- 눈치 9단인 나는 여자의 미래를 스캔하고 말았다. 결혼에 별 뜻도 없었으면서도 결국 결혼하면 모든 것을 버리게 되리란 걸 알았다. 꿈을 추구하면 사명에 방해만 되고 이중으로 힘만 들 것이었다. 죄 사함, 구원, 부르심, 택정함, 사명... 여기에 도취되어 갔다. 사마리아 여자라는 납작한 자아를 가진 나는 ‘죄인’이었고 늘 회개했다, 그럴수록 나는 하찮아졌고 다른 사람 ‘섬기는’ 일만 중요해졌다.
p132- 그날 내가 버린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내 전공 공부도 꿈도 버렸다. 내 개성도 목소리도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마저도 버려지는 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환상에 취해 어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고 있는지 그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자취방에 돌아오니 엄마는 없고 쪽지만 한 장 있었다.
“잘난 딸년들 잘 살아라. 에미는 떠난다. 찾지 마라.”
p148- 소감은 자유로운 감상을 쓰는 글이 아니었다. (...) 주어진 텍스트에 근거해 믿음을 고백학 죄를 회개하는 글이어야 했다. 은혜로운 소감을 쓰기까지 사람에 따라선 여러 번 퇴짜를 맞기도 했다. (...) 내 소감 발표가 끝나을 때 담인 C가 코멘트를 했다.
“드보라는 똑똑한 죄인인 걸 잊으면 안 돼. 자유분방하고 언변이 좋으니 양들도 따르지. 형제들의 마음을 뺏기 쉬워.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기 쉬운 죄인인 걸 기억해야 해. 어떻게 해야 내게서 주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할까, 그걸 투쟁해야 해.”
p155~156- “양치라고 풀타임 하게 했더니 연애질이나 해? 이 어려운 시기에 깨어 충성해도 모자랄 판에 하나남이 역사를 훼방하는 년이 제정신이야? 역사를 말아먹을 년. 형제를 유혹해 실족시킬 년. 한 형제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을 년이라는 거 알지?"
p183~184 - “가부장적 기독교라는 골방에 살던 내게 《여성신문》은 바깥으로 난 창문과도 같았다. ‘여성’이라는 화두는 창으로 비쳐 드는 햇살이었다. 나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남성의 돕는 배필이나 그림자 말고 인간 여성으로 가득한 새 세상을 보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버지니아 울프, 마리아 미즈, 또 하나의 문화, 이효재, 장필화, 한국염, 고은광순...《여성신문》에 나온 인물을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