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잠자리에서 내일 아침에는 상추씨를 뿌려야지 마음먹었더랬다. 가을을 준비하는 씨앗으로는 상추씨뿐 아니라 아욱씨도 있다. 6월에 잡히는 ‘밴댕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가을 아욱국은 사립문 닫고 먹는다.’는 말이 있다.
우선 씨앗을 뿌려야 문을 닫고 먹던 열고 먹던가 할 텐데,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에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씨앗을 뿌리자면 풀을 뽑고 흙을 고르고 해야 할 텐데, 그러자면 못해도 한 시간은 쪼그려 앉아 일을 해야 할 판이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 과거 날씨는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어제 읽던 책을 끌어 펼친다.
읽고 있는 책은 당산 김철 전집 3권『일기』이다. 일기에는 당연 날씨가 기록될 터였다. 책을 읽게 된 것도 표제 때문이었다. 요사이 쓰고 있는 <텃밭일기>는 명색뿐이지만 매번 쓰는 것이 쉽지 않다. 책을 읽기 전까지 일기의 주인인 김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 기록된 일기를 읽고 그가 우리나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둘째가 소설가이자 정치인 김한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철의 전집은 2000년 5월 해냄출판사에서 발행한 것으로 총 5권이다. 그중 내가 읽고 있는 3권『일기』는 1978년~1979년에 쓴 일기와 1983년 단식기간(6월 3일~6월 15일) 기간에 쓴 것이다.
일기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애초 누가 볼 것을 의식하지 않고 쓰는 일기는 그래서 솔직하다. 그런 까닭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개인적인 이야기와 인간관계가 생생하게 기록된다. 그런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당 시대를 비추는 역사, 문화, 민속적 자료가 된다. 세공사들이 돌에서 보석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처럼 기록도 그런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의 몫이 된다.
전집 5권 중 단 한 권만 있는 것으로 보아 빌려온 책이거나 어디서 가져온 책이 분명하다. 『일기』라는 표제가 아니었더라면 굳이 읽어보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기는 1978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46년 전 오늘의 날씨는 어땠을까. 지금처럼 기후이변, 지구온난화와 같은 위기감을 느꼈을까? 일기(日氣)를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기록물에서 '더위를 이기기가 참 힘들다’나 '태풍', '침수', '피해' 같은 단어들을 발견하며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무력감에서 찾게 되는 비겁일지라도.
** 일기의 전문 중 날씨에 관한 것만 발췌하여 원문으로 옮겼다.
(1978년) 7월 2일 일요일
아침부터 장마비가 왔다.
7월 21일 금요일
장마가 개서 햇볕이 쨍쨍해진지라 오늘은 매우 더운 날로 느껴졌다. 땀이 흘러나오는데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내가 건강하니까 그렇겠지.
7월 22일 토요일
아침부터 더위가 심한 하루였다.
7월 23일 일요일
지대가 높아서 집안에서 더위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는데 오늘은 방에도 열기가 밴 것을 느낀다.
7월 25일 화요일
더운 날씨는 계속되어 더위를 이기기가 참 힘들다.
8월 11일 금요일
며칠 동안 좀 선선하여지는 것 같더니 오늘은 또 꽤 더웠다. 바람이 있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8월 19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확연히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문득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났다. 감옥에는 추위가 빨리 오는 법. 아침저녁으로 벌써 추위를 겪기 시작할 것 같다. 특히 독방에는.
8월 20일 일요일
종일 비가 왔다. 조그마한 태풍이 근접하였다는 것이다. 20명 안팎의 인명 피해가 있었던 모양이고 약간의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시 변두리에서 공장들과 인가들이 많이 침수된 곳이 있는데 이것은 상하수도 공사를 맡아하는 대기업들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탓이라고 하니 또 한 번 한심한 것을 느낀다.
(1979년) 7월 26일 목요일
아침부터 더위를 느낀다. 혹서의 계절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낮에 34도까지 될 것이라는 예보였다. 사무실에서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위가 압도하는 것이었다.
7월 27일 금요일
종일 더위와 싸운 하루였다.
기온으로는 어제보다 1,2도 낮은 모양인데 이틀째 계속되는 것이어서 그런지 오늘이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8월 2일 목요일
밤부터 비가 줄기차게 계속 내려 아침에 나가는 길에 버스가 30분 이상이나 정지하가까지 했다.
8월 5일 일요일
오랜만에 날이 잘 개고 그만큼 기온이 상당히 높았다. 나는 종일 자리를 깔고 집에서 쉬기로 하였다. 집 안에서 쾌적한 기분으로 지낼 만큼 시원하니까.
8월 6일 월요일
새벽녘에 심한 소나기가 쏟아지는 소리에 좀 놀라며 잠을 깼다. 자주 벼락이 내리쳐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과히 높지는 않지만 능선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일어나서 지붕이 새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기 위해 대야를 가져다 대였다.
라디오를 틀었더니 서울 주변의 이 새벽 호우보다는 어제 새벽의 강원도를 비롯한 각지의 호우가 훨씬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온 것을 알았다. 이 문명 시대에 해마다 이 같은 자연재해가 되풀이되다니.
8월 7일 화요일
오늘은 날이 개고 더웠다.
8월 8일 수요일
더운 날씨였지만 사무실에서 견디었다.
8월 13일 월요일
날로 더 더워지는 것 같으니 어찌 된 셈인가. 아침부터 벌써 열기가 일고 있지 않은가. 입추가 지났는데도.
8월 19일 월요일
날씨 좋은 일요일이었다. 어디 산에라도 가고 싶은 계제인데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