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8월 23일 금요일
서동요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로 기억한다. 현전 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로 알려진 서동요는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과 정을 통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알고 보면 아이들이 부를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도 서동은 제가 팔던 마로 아이들을 꾀어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이들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는 곧 성안에 널리 퍼져 궁안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임금님은 대로하여 어여쁜 셋째 공주 선화를 궁밖으로 쫓아냈고, 서동은 갈 곳 없는 선화공주를 꾀어 결혼에 성공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서동薯童의 한자를 풀면 '마 소년' 쯤 된다. 서동이 아이들을 꾀어내기 위해서 주었던 것도 '마'라고 알려진다. 그러니까 적어도 마는 삼국시대부터 식용했던 식물이다.
내가 텃밭을 갖게 되었을 때 산에 자주 다니던 동생이 마 씨 몇 개를 주었다. 마는 큰 관리 없이도 잘 자랐으나, 땅속 깊이 박혀 있는 뿌리를 캐는 일이 큰 일이었다. 마를 캐는 힘으로 태산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생을 몇 번 하고 난 뒤에는 마에 시들해졌으나, 외면한 내 마음과 달리 해마다 퍼져 빈 공간을 뚫고 여기저기서 싹이 올라왔다. 더욱이 마의 주성분인 뮤신은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물질이다.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콧물 같은 액체가 쭉쭉 늘어나서 입에 넣는 것도 꺼려졌다. 그때만 해도 건강한 음식보다는 혀가 좋아하는 음식이 더 좋을 때였다.
또 다른 마가 내게 찾아온 것은 십수 년이 지난 몇 해전이었다. 마라며 손에 쥐어주는데 선뜻 받기 싫었다. 거무스름하고 울퉁불퉁한 것이 짐승의 마른 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캐기 힘든 땅속뿌리가 아니라 줄기에서 열매로 수확할 수 있어 하늘마라고 부르며 둥근 마, 우주마, 열매마 등 부르는 이름도 여러 개였다. 봄이 되어 씨앗을 심었으나 싹이 나오기까지 또 하세월이었다. 몇 번을 묻어둔 보물을 확인하듯 땅을 파보고 난 뒤에야 싹이 올라왔다.
마는 덩굴식물로 왼쪽돌기로 타고 오른다. 반대로 오른쪽으로 넝쿨을 타고 오르는 것도 있고 오른쪽 왼쪽 가리지 않고 형편에 맞게 넝쿨을 뻗는 덩굴식물도 있으니 덩굴식물의 세계도 알고 보면 개성적인 생명들의 집합체다. 하늘마는 싹이 트는 시간이 길어서 그렇지 싹이 튼 뒤에는 쑥쑥 잘 자랐다. 게으름뱅이 잭이 소와 맞바꾼 콩나무처럼 하늘까지 뻗어 올라가 보물을 가져다줄 기세로 나날이 새롭게 자랐다. 보물같이 영롱하지는 않았지만 줄기에서 콩알만 한 열매가 맺혔다. 뿌리를 먹는 마도 줄기에서 같은 모양의 주아를 맺는다. 하늘마의 줄기에서 자라는 주아는 뿌리마의 주아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크다. 열매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왜 하늘마, 둥근 마, 우주마, 열매마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지 이해가 된다.
7월부터 하늘마 열매가 달린다. 일하다 오며 가며 따 먹기가 수월하다. 땅속 깊이 박힌 마를 캐낼 때의 고생을 생각하면 줄기에 달린 하늘마를 향해 '너 최고야!"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하고 싶다. 말 잘 듣는 자식이 이쁘듯이 농부눈엔 짓기 수월한 작물이 이쁘다. 썩 달갑지 않던 뮤신맛도 자주 먹다 보니 오이나 토마토처럼 입에서 잘 받아들였다. 마는 '산에서 나는 장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건강에 좋은 식물이다. 밭에서 일을 하며 자주 하늘마를 따 먹다가 오래전 들었던 말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근 20여 년 전의 이야기다. 여행 중에 만난 언니였다. 언니는 일 년에 한 번씩 네팔에서 두어 달 살며 네팔과 인근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당시로도, 지금으로도 쉽지 않은 삶을 살던 언니였다. 싱글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텃밭 농사를 지어 수확한 싱싱한 쌈 채소를 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이렇게 좋은 거만 먹다가 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게 되는 거 아닐까?" 팔자 좋은 넋두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노인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언니는 때를 놓친 생명의 누추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밭에서 키우는 하늘마는 열 그루쯤 된다. 가족이 먹기에 적당한 양이다. 하루는 SNS에 내가 쓴 글을 보고 하늘마를 구매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떤 사연이 인지는 묻지 않았으나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전해졌다. 재래시장에 가시면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전했지만, 절박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끊으면서 농사를 '제대로' 잘 지어야겠다 다짐하게 되더라. (제대로란 말에서 살짝 기침이 났지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새로운 결심 이후 하늘마를 많이 재배하게 되었을까? 즉답은 피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