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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상헌 Apr 27. 2017

나눔의 흔적

진주시 문산읍, 김종호 농민



이야기의 주인공, 김종호 농민





 오늘은 진주에서 '온새미로 농법'이라고 불리고 있는 친환경 농법의 창시자인 김종호 농민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긴 세월의 삶을 세 시간의 인터뷰에 압축하여 풀어가시면서, 인터뷰 시간의 절반을 본인이 아닌 다른 농민들과 농업에 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살아오신 삶의 절반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생각하며 살아오셨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사가 곧 업이 되고 삶이 됐고, 그 삶의 일부를 다른 농민들과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호 농민의 마음과 정신이, 글을 읽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랍니다. 지역 농민의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터뷰는 2017년 4월 21일 진행됐습니다.)






ㅡ농사의 시작

 진주시 문산읍에서 단감과 매실 농사를 짓고 있는 김종호라고 합니다.

농사는 1973년도부터 시작했습니다. 1970년부터 준비를 했어요. 부모님이 농사를 하신 건 아니고, 아버지가 시장의 상인이었어요. 저는 어딘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어요. 장사도 공무원도 싫었고, 농사가 나한텐 제격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 밑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나만 잘 하면 되는 거니까요. 당시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고, 대학에 가지 않고 농사 준비를 했어요.


농장으로 향하는 길(좌),  농장 입구에 있는 삶의 터전(우)


 농사의 지식은 동생에게서 배웠어요. 동생이 당시 농업전문대학을 수석으로 다니면서 배워오는 걸 저한테 다시 알려주는 식이였어요. 그 대학 교수들도 현장 실습이나 교육을 우리 농장에서 주로 진행해서 그 덕도 컸죠. 놓치지 않고 배우려 했고 그때 농업 지식을 정통으로 배웠다고 자부합니다.

농사 시작을 위한 밑천은 제가 스스로 벌었지요. 주로 경운기로 남의 일을 해주고 돈을 받았어요. 어떤 날은 거의 일주일을 쉬지 않고 일하고 길을 가다가 걸려 넘어졌는데, 그냥 그대로 곯아떨어졌던 기억이 나네요.


1973년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자리의 농장




ㅡ친환경 농법 연구

 1996년쯤 농장에 큰 병이 들었어요. 알고 있는 지식과 병에 좋다고 하는 것까지 수소문해가면서 극복해보려 했지만, 97년엔 200만 원 98년엔 300만 원 치도 안 나올 만큼 수확량이 줄어버렸어요. 그때부터 친환경 농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아이디어를 얻은 건 청주를 만드는 방식이었어요. 막걸리를 밀폐된 곳에서 끓이고, 그 수증기를 냉각하면 청주가 돼요. 거기다가 자연물들의 성질을 생각해봤어요. 사람의 체질에 따라 맞는 음식이 있고 약이 되거나 독이 되는 것들도 있어요. 체질에 상관없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고, 어떤 체질에는 약이 되고 어떤 체질에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것도 있어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물에게 음식(영양)이 되거나, 독이나 약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밥상에 올라가는 자연물들을 청주 만드는 방식으로 증류해서 작물과 토양에 뿌려보면 어떨까. 그게 시작이었어요.


이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기계를 찾기 시작했어요. 액체를 끓여서 수증기로 만든 후 냉각하고 다시 액체로 만드는 증류 방식의 기계는 많았어요. 그런데 액체가 아닌 자연물을 증류하는 기계는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1999년에 자비로 700만 원을 들여서 필요한 자재를 구하고 직접 기계를 만들었어요. (이하 탄화 기계)

탄화 기계를 완성하고, 기계 안에서 속옷만 입고 며칠을 보냈습니다.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을 해야 해서 불을 지펴놓고 계속 관찰한 거지요. 기계 만드는데 한 세월, 기계 관찰하고 보살피는데 한 세월 보내니 아내가 나중에는 나랑 살지 말고 기계랑 살라고 한 소리 했었어요.


2000년에 경남 농업기술원에 유사한 성능의 탄화 기계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술원을 드나들며 연구를 했어요. 나중에는 기계의 사용 목적이 다르다 해서 연구가 중단됐습니다. 후에 두 번 더 기계를 제작했어요. 최종적으로는 2012년에 지금의 탄화 기계가 설치됐지요. 경상남도와 진주시, 진주시 농협중앙회의 지원을 받았어요. 제작한 탄화 기계의 명의를 제 이름으로 한다기에 거절하고 관리만 하겠다고 했어요. 나라의 재산으로 만든 거니 제 것이 아니지요.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탄화 기계(좌), 탄화 기계 조작부(우)

탄화된 감자의 잔재(좌), 약재로 쓰이는 증류수(우)


탄화 기계 작동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종호 농민




ㅡ자연 그대로, 온새미로

 한 종류의 자연물의 효능을 시험하고,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하우스 기준으로 3년이 걸려요. 노지에서 실험하면 10년은 걸릴 텐데, 그나마 시설(하우스)에선 계절과 시간이 압축적이라 3년 정도로 줄어든 거죠. 실험할 작물의 땅에 반은 약재를 뿌리고 반은 뿌리지 않고, 비교하면서 변화를 확인하는 겁니다.


혼자서 하기에는 힘든 작업이라 2007년에 '비화학적 병해충 방제 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농법에 관심 있는 농민들이 모였지요.

'비싼 가격이 아니라, 적정한 가격의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연구한다.'

' 연구회의 공동 활동(정기 모임, 연구 활동, 자연물 재배/채취 활동 등)에 반드시 참석한다.'

이 두 가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공동 활동에 세 번 불참하면 제명하기로 했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구회의 회장을 하면서 저 기준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엄격하게 지켜서 회원들의 불만도 꽤 심했어요, 융통성이 없다고. 농법을 다른 농민들과 처음 공유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농사 지식과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다들 농사 꽤나 한다는 사람들인데, 생전 처음 듣는 소릴 하니까 믿을 수가 없는 거죠. 원래 하던 농법을 다 버리기도 힘들고. 사기꾼 소리도 참 많이 들었어요.


탄화 농법, 증류 농법 등으로 제각각 불리던 것을 2013년에 '온새미로 농법'으로 통일했어요. 뭐든 이름이 있어야 귀해지는 거니까. 농법에 관련된 특허도 그때 받았습니다.

온새미로 농법은 장점이 많아요. 일단 자연물 그대로 혹은 자연의 부산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순환적입니다. 예를 들어 연꽃이 지고 나면 흉하다고 뽑아서 버리는데, 그걸 우리 농민들이 그 마을에 말하고 직접 뽑아 가는 거지요, 대신 치워주겠다고. 하동이나 대평 녹차 단지에서 드문드문 남은 녹차 잎을 싹 쳐내서 정리해버릴 때가 있어요. 그걸 받아가는 거예요. 코스모스도 약재인데, 그건 농지에 심어서 직접 길러요. 독이 있다고 알려진 장록(자라공)도 균제로 아주 훌륭합니다. 땅에 떨어진 매실도 약재로 쓰이고요. 지천에 나는 쇠비름도 좋지요. 고삼, 감자, 귤껍질, 계피도 좋고. 그래서 약재의 값도 일반 농약에 비해 오히려 저렴합니다.


농법을 제대로 지키면 농산물에 식물성 오메가-3와 식이유황이 생성되고, 맛과 향도 훌륭해집니다. 기본적으로 농산물은 맛있어야 사람들이 찾는다고 생각해요. 하루는 온새미로 교육을 하는데, 누가 묻더라고. "친환경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농민이 팬티만 입고 약을 쳐도 되는 게 친환경이요!"

농민 스스로가 안전해야 농산물도 안전하고 먹는 사람도 안전한 거요. 어려운 말 말고, 그게 친환경이요.


 온새미로 농법을 무료로 개방하기 시작한 건 2012년이었어요. 연구회 회원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절에 다녔었는데, 스님에게 '도'가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스님께서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이 결정에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살면서 항상 나만의 목표를 가져왔고,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농법을 무료로 개방한 덕에 좋은 점도 많아요. 농법을 배운 사람들이 실제로 각자의 작물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특이한 점이 있는지를 모두 공유하기 시작한 거죠. 지금도 사람 수와 장소에 상관없이, 원한다면 어디든 가서 농법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농민들이 알수록 가치가 커지는 농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농민들이 쓸 약재들(좌), 진주시 영양교사들에게 온새미로 농법에 관한 설명 중인 김종호 농민(우)




ㅡ특별한 기억, 노무현 전 대통령

 2008년 10월 어느 날에, 한창 일하고 있는데 양복 입은 다섯 명이 농장으로 걸어서 오더라고. 한 명은 여자고, 네 명은 남자인데. 으레 뭘 팔러 온 사람들이거나 이상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어요. 여자분이 불쑥 다가오더니 명함을 줬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님(이하 노 전 대통령)의 비서관이라고 소개하더라고. (2008년 2월에 대통령직 퇴임) 노 전 대통령께서 친환경 농법에 관심이 많은데 소문을 듣고 내일 농장에 방문하고 싶으시다고 허락을 구하 왔다고 그래, 난 진짜 사기꾼이라 생각했어요. 아니, 대통령이 온다는 것도 황당한데 허락을 맡고 온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한참을 이야기했어요. 뒤에 남자들은 경호원들인데, 경호 동선을 살펴야 한다고 농장을 둘러보고 싶다 했어요. 그 당시 농장이 한창 일할 때라, 먼지며 흙투성이에 엉망이었어요. "이거 농장이 엉망이라서 어떡합니까."라고 하니 비서관이 그러더라고. 일하는 농민의 농장에 흙이 있고 먼지가 있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노 전 대통령께선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그래요.

그 사람들 가고 그때부터 새벽까지 청소를 엄청 했지. 농장으로 가는 길목에 몇십 년 된 큰 나무가 있는데 그것도 직접 베어 버리고. 지나가려면 고개를 푹 숙여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나. 나중에 비서관하고 경호원들이 엄청 고마워했어요.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서 노 전 대통령께서 정말로 오셨어요 (2008년 10월 31일 방문). 진주 문산에 정말 별난 농민이 있다고 들어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왔다 하셨어요. 농장을 둘러보고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어요. 온새미로 농법과 농업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어요. 보통 급이 되는 공무원들 만나보면 다 자기 자랑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기 바쁜데, 노 전 대통령은 중간중간 궁금한 걸 물어가면서 이야길 쭉 들어줬어요. 그게 정말 인상 깊었어요. 온새미로 농법에 관한 이야길 다 듣고는, "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농법에 관심도 많지만, 당신은 진짜 별나고 대단한 사람이요."라고 그래.


2008년10월31일, 노무현 전 대통령 농가 방문 기념 사진
2008년10월31일, 노무현 전 대통령 농가 방문 기념 사진. 김종호 농민의 가족과 함께.


그러고 시간이 돼서 근처에 식사하러 가셨어요. 나는 남아서 뒷정리하고 있는데 비서관이 돌아오더니 같이 식사하셔야 된다 하더라고. 식당에서 또 2시간 정도 이야길 했어요. 그땐 도울 게 없냐고 물으시더라고. 같이 있던 연구회 농민들하고 내가 똑같이, 도와줄 필요가 없다 했어요. 이 온새미로 농법을 연구하는 이유가 우리 농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니까. 그러니까 또 그래. 진짜 별난 사람이라고, 정말 자부심이 있다고. 어디 가도 도와달라는 말 안 하는 데가 없는데...


가시려는데, 농장 입구에 매화나무 심어놓은 걸 참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그래서 방문 선물로 드렸지. 나중에 알았는데 그 나무가 지금 봉하마을 어디에 있다고 해요. 그러고 1년에 한두 번은 농장에 찾아와도 되겠냐고 하시더라고, 여기가 참 마음에 든다고. 물론이라 했지. 내가 말은 그렇게 하고 매년 네다섯 번은 찾아오게 할 심산이었어. 그런데 그 후로 오시지 못했지... (2009년 5월 23일 서거)

노 전 대통령이 살아계셨으면 이 온새미로 농법이 더 널리 알려졌을 거라는 생각도 문득문득 합니다.




ㅡ농민, 그리고 농업

 농업 교육을 보면 답답한 점이 많습니다. 전체 농민들을 한데 모으는 게 아니라, 작물 별로 나눠서 교육을 해요. 가지는 가지, 배는 배, 고추는 고추... 작물의 생장은 공통적으로 교육할 수도 있어요. 원리가 같다는 겁니다. 작물에 관한 공통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매우 적어요. 하물며 지금의 교육 내용은 요리로 치면 파를 몇 cm로 썰고 두부를 어떤 모양으로 썰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겁니다. 이렇게 배워선 한계가 생겨요. 작물에 대한 공통 이론을 꿰뚫고 나면 내가 다른 작물도 키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유연해집니다. 뿌리가 중요하고 땅이 중요하다는 말과 같은 겁니다. 현재 농업 교육의 더 큰 문제는, 농민이 함께 뭉치질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어디 모임이나 단체 교육에 가면, 작물 별로 항상 모여 앉아요. 사소할 수 있지만 이런 부분이 농민이 서로 어울리고 함께하는 걸 방해한다고 생각해요. 농민은 서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힘을 모아야만 해요.


온새미로는 부지런함이 바탕이 돼야만 실천 가능한 농법입니다. 2주일에 1회 관행 농약을 친다면, 같은 효과를 보기 위해서 온새미로는 3~5회는 나눠서 뿌려야 해요. 한 번 덜 치는 건 괜찮겠지 해서 안 치면 제대로 된 온새미로의 효과를 보지 못해요. 온새미로 농법은 단순히 자연물로 만든 약재를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농사짓는 과정 자체의 변화를 말하는 겁니다.

농산물은 아이와 비슷합니다. 하루아침에 병이 오고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약 70일 이전에 원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충제, 균제, 영양제 이 세 가지 효능의 온새미로 약재를 균형 있게 꾸준히 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온새미로 농법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연구회 모임도 출석 규정이 엄격한 거고, 약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연 부산물을 수확할 때도 끝까지 함께 하지 않으면 한 방울도 나눠주지 않는 거예요.
홍시는 익을 대로 익어도 절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떨어지길 기다리면 먹을 수 없고, 스스로 따야 하는 거예요. 부지런함은 온새미로뿐만 아니라 농민과 농업의 기본이 돼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

 


영글어가는 매실, 6월 초에 수확할 예정이라 한다.




온새미로 농법으로 이루고 싶은 거요? 이 농법이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꿈꾸는 덴 돈이 들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 물질이 아닌 정신에 남는 흔적... 그거면 충분합니다.



인터뷰를 잠깐 쉬며, 생각에 잠긴 모습





마무리하며, 글쓴이의 덧붙이는 말.

그 어떤 농민들보다 많은 이야길 해주셔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만 추려도 무척 긴 내용이 됐습니다.

김종호 농민은 농사꾼이라면 다른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농사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온새미로 교육 외에는 농법에 관한 일체의 홍보나 상업 활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온새미로 농법은 훌륭한 장점들이 많습니다. 자연물들로 약재를 만드는 순환적 농법이며, 맛과 영양소가 뛰어나고 작물의 개별 중량까지 증가시키기도 합니다. 진주텃밭의 많은 농민들이 온새미로 농법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수고로움이 상상 이상이라고 합니다. 평소 농사보다 배로 힘들다는 겁니다. 농민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어야만 결과가 따른다는 정직한 의미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탄화 기계 초기 설치 비용이 상당하다는 점, 그리고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탄화 기계를 관리하며 약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 현재는 김종호 농민이 농장에서 기계를 관리하고, 농민들에게 나눠줄 약재도 홀로  만듭니다. 세월의 탓도 있지만, 탄화 기계가 작동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열기와 미세한 입자에 오랜 시간 관리해온 김종호 농민의 건강도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약 18년의 시간을 오로지 농민들의 힘으로만 연구해왔다는 점이 이 단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점'으로 만들어 내고, 농법을 상용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민들의 실용적인 연구에 공공기관의 연구와 행정적 지원까지 뒷받침된다면, 많은 농민들이 활용하고 그 결과를 서로 공유한다면 그 잠재력이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김종호 농민이 바라는 대로, 온새미로 농법이 많은 농민들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에 흔적이 남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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