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길지가 않다.
어린 시절, 집에 읽을 만한 책이 위인전 밖에 없었다.
수십 권을 읽고도 크게 와닿는 사람 없이 스무 해를 넘기며 살았다. 책으로 만나는 사람들보다, 살면서 마주하는 귀한 순간이나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시리도록 무섭던 아버지께서, 늦은 밤 마을 어귀 노점 부부에게서 남은 풀빵을 몽땅 사오셨을 때. 그날따라 친근했던 술 냄새.
고등학생 시절, 용돈을 모아 모아 친구와 햄버거를 원 없이 먹겠노라고 만난 주말. 긴 건널목을 부축 끝에 간신히 건너신 할머니. 해진 바지에 다친 무릎. 그리고 세상에 퍼붓던 저주.
"병원비 밖에 없어서 저 산에서부터 걸어왔다. 아무도 믿어주질 않고 도와주질 않는다."
약 1분간의 치열한 회의 끝에 건네드린 햄버거 값=택시비.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생에 첫 진실한 회의.
군부대로 돌아가는 버스 안, 몸이 아픈 아이들을 돌보고 계시다며 모금을 해달라던 여자 스님. 휴가 나가는 이병들에게 부모님 선물하라며 가짜 시계를 팔던 상인들이 떠올라 창밖만 보던 날.
빈 모금통으로 돌아서다 하시던 말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맥주 몇 잔과 함께 작은 아들 생각이 떠올라 전화하신 어머니.
집 뒷산 유기견들이 너무 불쌍하다며 울던 어머니. 녹음해놓고 마음이 힘든 날, 꺼내 듣고 싶은 목소리.
진심을 담은 말과 행동과 표정이, 다른 이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때. 그게 아주 짧거나 작은 순간이라도 소중하게 여겼던 때.
졸업을 앞뒀을 때, 좋아했던 소설 속 작가의 말.
"살아왔던 어떤 순간들이 점이 되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게 삶입니다."
내가 만든 수많은 점들은 어떤 그림이 되려 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고민했던 날.
다시 오늘로, 우연히 읽던 책에서 나온 이야기.
'나는 괜찮다.'에서 '당신도 괜찮은가요, 당신도 이 세상이 살 만한가요.'로의 변화.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것보다 더 높은 성품은 없다는 말.
사는 건 핑계가 많아 무언가를 잊는 건 무척 쉽다. 과거에서 지금을 비춰보며 미래를 볼 힘을 얻는 건, 역사뿐만 아니라 내 삶도 포함이 된다. 일과 사랑과 경험과 부끄러움 모든 것을 통틀어...
꿈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앞으로의 시간을 그려봅니다.
말을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 믿기에, 생각을 글로 남깁니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 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덧, 미나리아재비꽃에 독성이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요. 작가 분은 그것까지 생각해서 그곳에 사랑이 머문다고 하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