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가 애런을 만났을 때

두 예술가의 우정과 마주하다.

by 최다운 바위풀

두 예술가의 우정과 마주하다


<해리가 애런을 만났을 때 (When Harry Met Aaron)>.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나? 당시 집에 VHS 비디오 플레이어를 샀는데 사은품으로 준 테이프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When Harry Met Aaron)>였다. 참 많이도 돌려 봤다. 근 십여 년간 항상 내 인생 영화의 상위에 꼽을 정도로. 당시 뭇 소년들이 맥 라이언의 풋풋한 미소에 가슴 설레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는 달달한 로맨스가 펼쳐졌다.


그럼 해리와 애런이 만났을 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라도 연인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면 아쉽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로렌스 밀러 갤러리를 찾아가 만난 전시 <해리가 애런을 만났을 때>는 제목부터 재치가 느껴졌다. 20세기 미국 추상 사진의 대가인 해리 캘러한과 애런 시스킨드는 실제로 오랜 시간 자타가 공인하는 예술적 동지이자 경쟁자였다고 한다. 캘러한과 가까웠던 한 갤러리스트는 그를 만날 때면 늘 시스킨드가 함께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 두 사진가의 우정을 표현하기에 꽤 적절한 전시 제목 아니겠는가.*


두 사람의 이미지는 같은 추상이라 해도 느낌이 달랐다. 뉴욕 포토리그에서 사진을 시작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던 시스킨드는 바깥의 세상을 그려내기 위한 방법으로 추상을 택했다. 반면 앤설 애덤스의 워크숍을 들으며 사진가의 길로 들어선 캘러한에게 사진이란 내면의 감정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만드는 도구였다. 이 차이가 두 예술가의 추상에 자기만의 색을 입혀준 것이 아닐까.


전시에서 눈길을 끈 캘러한의 이미지는 그의 아내 엘레노어를 담은 다중 노출 사진이었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빛 뭉치 한가운데 여신의 형상처럼 자리한 그녀의 실루엣은 우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캘러한의 사진 인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부인이자 모델이며 뮤즈였던 엘레노어다. 그는 자신이 찍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그녀의 이미지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캘러한의 추상 한편에서 인간적인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녀 때문인 듯했다.


반면 시스킨드의 이미지는 반대였다. 무엇을 찍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그의 피사체들은 낡은 대문이나 벗겨진 페인트칠 조각처럼 쉽게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 안에 숨겨진 질서와 규칙,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때론 클로즈업으로, 때론 흔들리며 담은 프레임 안에서 스쳐 지나갔던 풍경의 이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미지들은 흐릿하게 바라보면 더 명확해지는 매직-아이처럼 모호함 속에서 명징해지는 미를 품고 있었다.


“해리 캘러한과 애런 시스킨드의 대화”라는 전시 부제처럼 두 사람은 이미지를 통해 교감하고 있었다. 아마 둘이 함께 있을 때도 그러지 않았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술과 사진을 논하며 추상의 나래를 펼쳤을 두 대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어떤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해리가 애런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한 번쯤 연인들의 로맨스가 아닌 두 예술가의 우정에 빠져 보면 어떨까.


* 다만 갤러리 디렉터인 로렌스 밀러는 영화 제목보다 1996년에 열렸던 전시 <When Aaron Met Harry : Chicago 1946 ~ 1971>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시카고에서 열린 전시를 위해 로렌스 밀러 갤러리도 작품을 대여해 주었다.




“전시에서 만난 캘러한의 이미지 중 가장 내 마음을 끈 것은 1951년에 찍은 다중노출 작품이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빛 뭉치 한가운데, 마치 여신의 형상인 듯 자리한 아내 엘레노어의 실루엣은 우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장의 필름을 여러 번 노출하여 장면을 겹치는 다중노출은 그가 종종 활용한 기법인데 오직 머릿속으로만 상상하여 이만큼 정확한 이미지를 만드는 감각이 대단하다 싶었다.


캘러한의 많은 이미지가 아내 엘레노어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캘러한은 자신이 찍은 자연과 도시, 사람들의 풍경과 같은 모든 것이 종국에는 엘레노어의 이미지 안으로 녹아들어 갔다고 표현했는데, 덕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20세기 미국 사진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모델 중 한 명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만약 그에게 아내이자 모델이며 뮤즈인 그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캘러한의 이미지가 추상이면서도 어딘가 한편에 인간적인 따스함이 배어있는 건 그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




“시스킨드는 원래 뉴욕 포토리그에서 사진을 시작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그는 사진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파고들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를 꿈꿨다. 그랬던 그가 추상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40년대 초반이다. 그전에는 프레임 안에 비친 사람들의 삶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프레임에 들어온 사물로 시선을 돌렸다. 스트레이트 한 시선을 벗어 놓고 추상의 눈으로 풍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캘러한은 사진가 앤설 애덤스의 워크숍을 들으며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에게 사진이란 자신의 삶과 일상을 그려내는 도구였다. 캘러한이 고민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면의 감정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 수 있을지였다. 사진이라는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그렸다. 두 사진가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시스킨드가 자신 바깥의 세상을 담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추상 사진을 택했다면 반대로 캘러한은 내면의 세계를 바깥으로 표현하기 위해 추상 사진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둘의 이미지는 같은 추상이라 해도 자기만의 색이 배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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