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함 속에서 보이는 명징함 - <SNOWLAND>

사진가 민병헌에 관한 소고

by 최다운 바위풀

예전에 민병헌 작가님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잡초>부터 시작해서 <SNOWLAND>까지 참 아껴 두고 좋아했었는데, 한동안 관심을 못 가졌었네요.


며칠 전부터 문득 생각이 나서 찾아 보니 14년까지 전시 활동하시는 기사도 보이고 꾸준히 작업 중이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EBS 기획특강으로 작가님에 대해 이야기 한 유튜부 영상도 있더라구요. 이건 시간 될 때 볼 생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kMdAxpSm18)


아래는 2008년에 작가님의 <SNOWLAND>에 대한 생각을 적어 두었던 글인데 브런치에 올려 봅니다. 예전에 쓴 글들을 다시 보면 참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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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함 속에서 보이는 명징함 - <SNOWLAND>


흐릿하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해 보이는 것은 없다. 명확한 형태는 보이지 않고 희미한 윤곽만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언뜻 본다면 잘못 인화된 사진쯤으로 보일 법도 하겠다.


민병헌의 <SNOWLAND>를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흐릿함이 작품을 감상할수록 내 마음 속에서 명확해져 간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눈에 보이는 뚜렷함이 아니다. 저 멀리 눈 덮인 언덕 너머로 희뿌옇게 보이는 나무의 끝자락에서,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조차 힘든 사진 속 풍경 저 너머에서 혹은 화면 가득 메운 검은 숲을 배경으로 희뿌옇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어떤 명징함이 전해진다. 뚜렷한 건 없는데 뚜렷하다. 아니 사실 뚜렷한 것이 없다는 건 단지 시야가 뿌옇다는 이유로 내린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민병헌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명백한 것이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존재는 명백함을 담보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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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LAND>를 감상하다 보면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오직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만 천착한 작가의 옹골찬 고집 말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타협하지 않는,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의지가 이 사진집에는 담겨 있다. 자신에 대한 평론이나 일체의 사진 외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민병헌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러한 고집은 당연한 것 같다.

민병헌은 사진 전공자가 아니다. 몇몇 사진가에게 사사 받았다고는 하지만 무협지로 보자면 변변한 뿌리가 없는 사파에 속할 것이다. 한국 사진계에서 이러한 그의 배경은 그가 더 자신만의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이 되기도 한다. 평론가 박영택의 표현처럼 민병헌이 돌올 할 수 있었던 힘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고집과 기존의 것 – 제도권 내의 사진 시류 - 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진 제도권 밖에서 사진가로서 성장한 것은 이러한 시류에 얽히지 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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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재개발 지구”, “별거 아닌 풍경” 등의 초기 연작에서 민병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이 시기 그의 사진에는 경계와 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 “잡초”를 거쳐 “안개”, “하늘” 등의 연작으로 오면서 형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대신 윤곽이 들어 왔다. 그리고 그 윤곽들은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갔다. 화면을 가득 메운 하늘 아래 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땅의 윤곽(“하늘” 연작 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SNOWLAND>는 이러한 후기 작업들에 더 가깝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여전히 화면은 뿌옇고 명확히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금씩 제 속살을 드러내는 윤곽만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뿌연 풍경 속에서 뿌옇지 않은 느낌이 전해져 온다. – 작가가 그런 느낌을 의도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내가 감상할 때는 그렇게 느껴진다. – 명백한 것이 없는데도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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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병헌의 초기 연작들보다 이러한 후기 연작들을 더 좋아한다. 보여 주지 않으면서 혹은 스스로가 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무언가가 보이는 사진들이다. 그러한 사진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민병헌의 작업들은 한 마디로 “멋지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떠한 작업들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사진을 찍는 한국의 한 사진가인 그를 늘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 참고 서적

<SNOWLAND>, 민병헌, 도서출판 호미, 2007

<열화당 사진문고 – 민병헌>, 박영택, 열화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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