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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운 바위풀 Apr 04. 2017

사모님이 정확히 뭐라고 하셨는데요?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이 글은 사진, 문화 커뮤니티/매거진 B급사진(https://bphotokr.com)에 쓴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약국 / 서울 / Feb. 2017 / X-Pro 2 + Color Skopar 21mm.

몇 달 전 둘째 아이의 입술 주변이 약간 짓물러 약을 사야겠다고 적어 놓았다가, 근무 시간 중 잠시 짬을 내어 회사 옆 약국에 들렸다.

 

"아이가 입술 주변이 조금 아파서 연고 같은 것을 찾고 있는데요. 물집은 아니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임 약사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정확히 뭐라고 하셨는데요?"

"예? 그게 아니라 제가 아이가 아픈 걸 직접 보고 약을 사러 왔다니까요?"

 

이래저래 해서 연고를 사 왔지만 무언가 씁쓸한 맛이 남았다. 아이가 아파서 약을 사러 오면 부인 심부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이를 돌보는 역할은 당연히 엄마의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질문의 수준이 매우 낮고 공격적으로 느껴져 기분이 상했다.

 

사실 위 얘기는 나만의 매우 국지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내가 그저 조금 더 예민해서 불쾌했던 것일까? 사소한 예이지만 이런 일들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녀 역할에 관한 편견을 잘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만 봐도 그렇다. 왜 에디와 코코몽은 무언가를 만지고 뚝딱거리길 좋아하고, 루피와 아글이는 요리를 잘 할까? (코코몽 한국어 버전에서는 성별이 명확하지 않지만 영어 버전에서는 아글이의 목소리가 여성이다.) 왜 코코몽과 뽀로로는 개구쟁이이고 아롬이와 패티는 얌전할까? 등등. 아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성역할에 관한 정형화된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는 내용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 사회가 어찌 보면 사소한,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것들에 대해 아직까지 얼마나 불감한지 보여 준다. 이는 꼭 성차별 또는 성역할 같은 것에만 해당하지도 않는다. 사실 당신이 조금만 더 예민하다면 – 혹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 이와 같은 불감의 예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어떻게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지금보다 나이가 적었을 때는 급진적인 생각을 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인데, ‘아무리 삼성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망하도록 놔두고 새로 시작해야지. 그 결과와 충격파가 어떻든 간에 말이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조금씩 관점이 변해서 급진적 변화도 있겠지만 작은 것부터 올라가는 방법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겪었던 사소한 불감의 사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쩌면 그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작은 걸음이 모이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결국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결국엔 나와 내 아이들이 자라는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되어 가지 않을까?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


덧) 얼마 전 스토리 펀딩으로 화제가 되었던 엄지장갑 이야기가 우리의 사소한 불감증에 변화를 주는 멋진 시도라고 생각한다. 펀딩은 종료되었지만 잠시 시간 내어 읽어 보시기를 추천한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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