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기 놀이
이 글은 사진/문화 매거진 겸 커뮤니티 B급사진(https://bphotokr.com)에 쓴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오늘의 중요한 일: 메밀꽃필무렵에 가서 칼국수 먹기
오늘의 반성: 윤이한테 큰 소리 낸 일
오늘의 착한 일: 윤이한테 엠엔엠 나누어 준 일
내일의 할 일: 눈사람 만들기
큰 아이가 어디서 배웠는지 요즘은 가끔씩 일기를 쓰자고 한다.
지난여름 제주 여행 중에 화첩이 없어서, 대신 끄적거리라고 동네 점방에서 사 준 것이 마침 그림일기장이었는데, 아마 어린이집에서 일기란 것에 대해 배웠나 보다. 그래서 가끔씩 그 일기장에 몇 줄씩 끄적거리며 노는 것이 요즘 새로 발견한 재미 중의 하나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그림일기장엔 오늘의 중요한 일, 착한 일, 반성, 그리고 내일의 할 일을 쓰도록 나누어져 있는데, 지난 주말 아침엔 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말을 건넨다.
"아빠, 오늘의 착한 일은 뭐 하지?"
"음, 뭐 할까?"
아침 댓바람부터 그날의 일기를 쓰려니 마땅히 그날의 착한 일이 생각나지 않은 모양이다. 반성할 일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금방 찾았는데 말이다.
"아, 그래. 그럼 윤이랑 M&M 나눠 먹고 윤이랑 M&M 나눠 먹기를 착한 일로 써야겠다. 윤이야, 일로와 봐."
그러더니 오빠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온 동생과 함께 M&M 몇 개를 꺼내 나눠 먹는다. 자기 딴에는 일기에 정해져 있는 걸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일 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미소가 지어졌다.
이십 대 중반의 근 몇 년 동안은 매일 같이 일기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그날의 감정을 적기도 하고, 독후감을 쓰기도 하고, 가끔씩은 되지도 않는 시도 끄적거려 보았더랬다. 하지만 그 뒤로는 다시 일기 쓰기를 시도해 봐도 중간에 접기가 일쑤라 예전처럼 꾸준히 일기를 쓰지를 못 했다.
그런데 아이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조금 더 충실히, 그리고 자주 내 하루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같이 할 수 없다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와 내 주변의 일들을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좋을 것 같다.
가끔씩 아이들에게서 배운다는 말이 이런 것 같다. 아무런 사심과 선입견 없이 말하고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때때로 잊고 있던 것들을 상기시켜 주는 좋은 자극제다. 이렇게 오늘도 하나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