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의 교감
어린이집이 끝나는 오후 3시 전후가 지나면 이곳 동네 놀이터는 금방 아이들로 북적대서 정신이 없어진다. 가끔씩은 큰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아이들 또래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까지의 아이들이다.
이중 대략적으로 보면 6~70% 이상의 아이들은 돌보미와 함께 오는데,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듯, 태반은 백인 아이들을 돌봐 주는 유색 인종 돌보미들이다. 돌보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쉽게 보인다. 그런데 아무런 관계없는 내가 보기에도 아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애들에게 무관심한 이들이 가끔씩 있다.
한 손으로 성의 없이 그네를 밀며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는 사람들.
물론 그 사람들도 많이 피곤할 테고 쉴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너무할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부모나 가족이 아니어서 사랑하는 마음이 덜하다는 건 뻔한 이유이다. 정말 아이들을 잘 챙겨 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보다 근본적으로는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한가 가 다른 것 같다. 돌보미 일이 물론 생계 수단 중 하나도 되겠지만, 진심으로 이 아이들을 좋아해서 돌보느냐, 아니면 적당히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생각이냐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아이들과의 교감을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로 이어진다.
서울에 있는 약 2년 반의 시간 동안 3명의 돌보미 아주머니를 만났다.
첫 번째는 어머님의 몇 다리 정도 건넌 친구분이셨는데 보모 경험은 전혀 없었으나 본인이 기회가 된다면 해 보겠다는 의사를 표하셨다. 하지만 결국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넉 달 만에 그만두셨다.
두 번째는 몇 번의 면접을 거쳐 선택한 조선족 아주머니. 이 분은 일주일 만에 내가 직접 잘라 버렸다. 첫째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 힘들다고 일 시작한 지 며칠 만에 클레임을 하는데, 어린아이들의 그 정도도 못 받아줄 정도면 적합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만났던 분이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셨던 분이다. 이 분이 아이들을 돌보는 걸 볼 때면 정말 진심으로 우리 아이들을 예뻐해 주는구나 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엄마 없이 지내는 동안은 때론 아빠보다도 더 세심하게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실 수 있던 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이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참 행운이었다. 솔직히 엄마, 아빠라 해도 결코 늘 즐거운 마음일 수만은 없는 아이들 돌보기를 진심으로 해주셨으니까.
아이들을 돌보는 데 있어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같이 지내는 시간 동안 보여 주는 반응과 교감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는 이야기 에너지가 나오는 아이들은 자신과 같이 있는 어른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반응을 보여 주는 것에서 또 새로운 기운을 얻는 것 같다. 그러니 아이들은 상대가 제 에너지에 반응하지 않으면 풀이 죽어 제 기운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아이들을 돌보려 한다면 진심으로 교감하고 반응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 괜히 애꿎은 다른 이들만 아이들을 잘 보살피지 않는다고 흉을 봤지만 때론 나도 그런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본다. 힘들어서 병원 놀이하는 척하면서 누워 있기. 문자 확인한다고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딴짓 하기. 두 녀석 싸우는 소리에 지쳐 둘 다 울어도 모른 척 하기. 적으면서 생각해 보니 끝도 없이 나올 기세다.
다행히 요즘은 두 녀석 다 조금 더 철이 들었는지 아빠가 힘들다고 하면 ‘아빠, 잠깐 쉬어.’라고 허락해 주는 때도 아주 가끔은 있다. 그럴 때면 그 작은 마음이 고마워 잠깐 눕고 기운을 차려 더 많이 놀아 주게 된다.
확실히 육아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일도 많아졌다. 대부분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반성하게 되는 것이지만, 어떻게 잘 해야지라고 다짐하게 되는 것도 있다. 오늘은 그간 아이들에게 얼마나 공감해 주었는지 나부터 돌아보게 되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잘 해 봐야지. 이러고 또 어느 날인가 똑같은 반성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