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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Oct 20. 2020

17년째 같은 동네

과거의 나와 마주하기


17년 동안 같은 동네에 살았다. 2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아파트 단지 내 이사였다. 그렇게 7살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풍경을 보여 집을 나서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아침, 수도 없이 걸었던 산책길을 걸으며 한 동네에 오래 살면 좋은 점에 대해 생각했다.

- 걸을 때마다 새로운 추억에 잠길 수 있다.

- 다녔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변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 계절에 따라, 년도에 따라 익숙한 듯 다르게 변하는 풍경이 새삼스레 예쁘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니, 동네에 애정이 더 생기는 듯했다.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연못을 바라보며 유년의 기억이 떠올렸다. - 작은 연못이 꽁꽁 얼마큼 추운 겨울이었다. (이제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동네 어린이들이 저마다 어디선가 판때기를 구해 들고 나와 빙판 위에서 썰매를 탔다. 금세 작은 연못은 썰매를 타는 볼 빨간 아이들과 장갑을 낀 채 썰매를 끄는 어른들로 북적였다. 나와 아빠도 그중 하나였다. 손과 발이 어는 줄도 모르고, 아빠의 팔이 저려오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났던 기억이다.


연못 앞에 멈춰 서서 위의 기억을 곱씹고는, 더 오래 걷고 싶은 마음에 동네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대학교가 있어 상점들이 늘어선 그 거리는 17년 동안 조금은 변했고, 조금은 그대로이다. 그래서 더 보는 재미가 있는 곳.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예전 나의 모습들과 마주했다.


[갑을문고] #그 자리 그대로 #나만 바뀌었다

중, 고등학생 때 교과목 문제집을 사러 갑을문고를 찾았다. 갈색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는 문제집 이름만 대면 책 더미에서 슥슥 찾아 건네주셨다. 대학생 때는 소설과 에세이를 사러 갔다. 어느 순간 주인장이 바뀌었는지 도서가 더 다양하게 입고되기 시작했고, 책에는 정성스러운 후기가 붙어있었다. 그게 좋아서 공허할 때마다 책과 후기 메모를 보러 갔다.

내가 변하는 동안 갑을문고는 항상  자리에서 적절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딱 떡볶이] #순간이 강렬한 곳 #정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들어갔다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18년의 여름쯤.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나는 친구와 딱 떡볶이를 먹으며, 아 입맛이 돌아온다며 폭식을 했다. 끊임없이 떡과 튀김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도 울상이었던 그날, "괜찮다"는 말 대신 "잘 먹어야 힘이 난다"라고 말하며 앞에 있어준 친구가 어찌나 힘이 되던지.

때로는 '어떤 날'이라는 정의보다 특정 '순간'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다. 가령 '콘서트에 간 날', 보다도 '가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나 '노래에 전율이 일었던 순간'이 더 생생한 것처럼 말이다.

이날은 '친구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면서 잘 먹으라는 말을 건네준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이곳은 (자주 가는 곳은 아니지만) 동네 친구와만 떠올릴 수 있는 잊지 못할 순간이 깃든 곳.


[동네 작은 슈퍼] #동네 슈퍼에서 배운 교훈 #예의를 지키는 것

원래는 친구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동네 슈퍼였다. 노오란 해가 내리쬐는 날, 하굣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슈퍼에 들어서면 아저씨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 첫 입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콤했던지.

나는 좋았지만 아저씨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려서 잘은 몰랐지만) 동네 작은 슈퍼는 매출이 높지 않았다. 동생이 어린 마음에 아저씨께서 꺼내 주시기도 전에 자연스레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은 날, 엄마가 동생을 많이 혼냈다. 아무리 친해도, 평소에 주신다고 해서 먼저 그렇게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나도 그때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

슈퍼의 자리는 주인이 바뀌어 잠시 다른 가게(고등학교를 다닐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변했다가 지금은 또다시 슈퍼가 되었다. 예전 슈퍼와 구조는 같은데 가격은 2배, 3배가 되었다. 예전 그 향수가 괜히 떠올라 옆의 편의점에 가지 않고 슈퍼로 향한다. 새로운 주인아저씨도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건네며 장사를 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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