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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Dec 30. 2020

모르는 사람에게 더 솔직할 수 있다

넷플릭스 <대시 앤 릴리>

“나이와 하는 일을 몰라도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소재는 많습니다.”


2020년 1월, 스피치 수업을 들으면서 깨달은 것이다. 얼굴만 아는 채로 수강생들은 서로의 앞에 서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피치를 들으면 감상평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나이도 하는 일도 모른 채였기 때문에 외부 요인이나 편견의 개입은 없었다. 아는 게 서로의 말 뿐이라서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어땠냐고?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구나 싶었다. 일주일에 고작 2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10명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입으로 말하지 못했지만, 일기장에는 수십 번도 더 썼던, 그런 이야기들을 그들 앞에서는 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 감정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말한 건 실로 처음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스피치를 준비하는 15분 동안 토해내듯 정리해서 5분 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데, 각자가 말을 하다가 스스로의 솔직함에 놀랐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남한테 처음 해보는데..’가 스피치의 시작인 경우가 많았다. 감정에 대해 용기 내어 말한 날, 수강생 중 한 명은 나에게 따로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저랑 너무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서,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다’며 마지막 날에는 커피를 챙겨주었다. 6번 만났지만 인생의 굵직한 스토리와 요즘의 고민까지 알 수 있었던 수업. 서로의, 나의 솔직함에 놀랐던 6주였다.


우리의 수업이 ‘말’이 매개였다면, <대시 & 릴리> 속 둘의 매개는 ‘글‘과 ‘행동’이다. 취향도, 성격도, 크리스마스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정반대인 둘은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빨간 노트로 글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노트를 주고받는 규칙은 도전을 실천하고 느낀 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쪽이 '이렇게 한 번 해봐.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야.’라며 도전을 제안하면, 다른 한쪽이 이를 실천한 뒤 어땠는지 감상을 남긴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재미로 시작한 도전들은 각자가 갇혀 있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럴수록 노트에는 더 솔직한 이야기와 감정이 담긴다.

그렇게 각자 속 깊이 있던 이야기를 꺼내고 일생일대의 도전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위로도 받는다. 그 위로는 일상 속 행동과 선택에 있어서도 꽤 큰 힘을 발휘할 지경에 이르고,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전 처음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들이 어떤 생뚱맞은 도전을 하면서 새로운 감정 앞에 서게 되는지, 또 결국에는 글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지는 스토리 상의 매력 포인트니, 더 깊게 언급은 하지 않겠다.)


노트를 통해 이어지는 감정과 사랑에 빠지는 서사가 말도 안 되게 감동적이긴 하다. 현실은 기적 없는 크리스마스라지만, 여전히 기적이 존재하는 그런 스토리였다. 그래도 이 드라마를 보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스피치 수업에서 겪은 감정 때문이 아닐까.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서로에게 감상평을 남겼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대시와 릴리도, 스피치 수강생이었던 우리도, 여전히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나눴던 글과 대화가 서로에게 엉뚱한 기대감만 주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솔직한, 깊은 속내를 안다. 그게 우리의 전부는 아닐지도, 여전히 그 속내는 우리의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꽤나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했다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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