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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작가 Mar 17. 2024

연극이 끝난 후

로코코(Rococo) 미술

"사방팔방이 거울 천지네."
아내가 말했다.


"그래서 '거울의 방'이지 않을까? 재미있는 건 당시 프랑스에는 품질 좋은 거울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대. 지금도 유리로 유명한 베네치아에서 전량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럼 어떻게 한 거야?"

"자존심이 셌던 왕이라 이 사태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어. 만들어내기만 하면 국가와 독점 계약을 하게 해 준다는 조건을 걸어서 결국엔 국산화에 성공했지."

"아 자랑하고 싶었던 거구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출처 thirdeyetraveller.com)

"루이 14세가 기술과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거야. 빛을 많이 반사되어서 더 넓어보이고 밝은 것 같지 않아?"

"그러네. 루이 14세가 그 태양왕 맞지?"

"맞아. 왕권신수설과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사람. 사실 루이 14세가 즉위했을 때가 4살이었거든."

"4살? 엄청 여기저기 휘둘렸겠네." 

"그러다 보니 자라면서 강력한 왕권에 대한 열망이 있었대."

"조선시대 정조 같은 느낌이네."

"비슷하지. 루이 14세는 실제로 되게 노력을 많이 해. 일반인들도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와서 왕의 위엄을 볼 수 있게 하면서 직접 소통했었고 귀족들을 궁전에서 살게 하면서 서서히 그들의 영향력을 뺏어왔지. 뭔가 사람들에게 왕의 권위를 은근히 스며들게 했던 거야."

"되게 똑똑한 방식인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자기도 태양왕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응."


"왜 하필 '태양왕'인 것 같아?"



역사 속 어린 왕의 등장은 혼란을 야기한다.

이는 루이 14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너무도 어렸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약 20년간 그의 어머니였던 안 도트리슈와 추기경이었던 쥘 마자랭이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섭정 과정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루이 14세의 어머니가 스페인의 공주였고 추기경이 이탈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외국인들이 프랑스를 휘두르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4세가 즉위했을 때 프랑스는 전쟁 중이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발발한 '30년 전쟁'은 국민들에게 과도한 증세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결국 1648년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으며, 루이 14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파리를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의 나이 불과 11살 때의 일이었다.

이 날의 공포는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어린 왕은 훗날 꽃이 만개하길 고대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 절대주의의 씨앗을 심었다.


1661년

마침내 루이 14세에게 직접 통치 시대의 막이 열렸다.

봉건 사회였던 당시 루이 14세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것은 두 가지였다.

바로, 귀족과 교황이다.

이에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귀족들을 궁전에 거주하게 하며 엄격한 예절과 행동 규범을 따르게 하며 왕실에 대한 충성과 예의를 보이게 했다.

또한 그는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왕권신수설'을 전면에 내세웠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절대적인 것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태양 장식 (출처 themodernpostcard.com)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루이 14세가 이용한 것이 '태양'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테마는 태양이었다.

궁전을 둘러보다 보면 위 그림과 같이 태양을 형상화한 여러 장식을 볼 수 있으며, 궁전의 정원에는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아닌 태양신 아폴론주인공으로 한 분수도 볼 수 있다.


금성의 위상 변화 (출처 en.wikipedia.org)

사실 이 당시 교회에서 '태양'은 입 밖에 꺼내고 싶지도 않은 존재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천체 관측을 통해 지동설을 입증하며 기독교 교리에 흠집을 냈기 때문이다.

그는 목성을 공전하는 위성들을 발견했으며, 금성의 위상 관측을 통해 금성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1633년, 그는 종교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더욱이 교황은 갈릴레오의 책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그 누구도 더 이상 이와 같은 논란을 제기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이로부터 약 30년 후, 루이 14세보란 듯이 이 논쟁을 다시 수면 위로 등장시켰다.

루이 14세는 교회의 결함을 파고들 수 있는, 즉 우주의 중심인 '태양'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루이 14세가 착용했던 아폴로 신 의상 (출처 en.wikipedia.org)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온갖 태양 장식을 버무리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태양이 되기를 자처했다.

연극 <밤의 발레>에서 루이 14세는 아폴론 분장을 하고 나타나 귀족과 대중들 앞에서 악의 무리를 섬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이 스스로 광대가 되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의 계산은 딱 맞아떨어졌다.

사람들이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되었고, 그를 '태양왕'이라 부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 그래서 태양왕이구나."
아내가 말했다.


"응. 아마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없었다면 '지구왕'이나 '달왕'이었을지도?"

"지구왕? 무슨 용사 이름 같네."

"그리고 자기가 거울에 눈이 팔려서 못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방에 미술 작품도 있어."

"어디에?"

"음... 자기 머리 위에."

<거울의 방 천장화> Charles Le Brun, 1681~1684년 (출처 namu.wiki )

"와... 천장화는 볼때마다 대단한 것 같긴해. 그리기 진짜 힘들었겠다."

"4년에 걸쳐서 그린 작품이야. 대부분 루이 14세를 우상화하고 그의 통치를 헌정하기 위한 그림들이지. 가장 중앙에 있는 그림이 제일 크지?"


(아래) <The king rules by himself> (위) <The pomp of France's neighboring powers>, Charles Brun

"이 그림에 사실 모든 게 담겨있다고 보면 돼. 아래 부분에는 루이 14세의 강력한 절대주의가 표현되어 있고 위에는 경쟁자의 위치에 있던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국들이 적대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사실 거울의 방이 여러 공식 행사나 조약들이 행해졌던 장소거든. 루이 14세는 타국의 대표들과 사신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동안 거울의 방에서 프랑스의 굳건함을 보여주고 싶어 했대. 그만큼 루이 14세는 왕권에 진심이었어."

"궁전이 마냥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하지가 않구나. 이 그림도 바로크 시대의 미술인거지?"

"맞아. 이 당시의 미술은 왕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였다고 보면 돼. 당연하게도 고전주의를 지향했고 아름다움의 기준과 주제도 확고했지. 어찌 보면 이 천장화가 바로크 미술의 마지막 회인 셈이야."

"바로크 미술이 언제 끝나는데?"


"연극이 끝난 후,
태양왕의 죽음 이후야."



신이 되고자 했던 태양왕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건축물에 탐닉하지 말라. 전쟁을 많이 하지 말라."

그가 왕위를 계승받게 될 5살짜리 루이 15세에게 남긴 말이다.


<L'Enseigne de Gersaint> Antoine Watteau,1720 (출처 fr.wikipedia.org)

연극이 막을 내리자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베르사유 궁전을 만들었다.

위 앙투안 바토의 작품 <제르생의 간판>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눈여겨볼 점은 왼쪽의 하인들이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보관하기 위해 상자에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다.

그토록 강력해 보이던 태양왕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에 오른쪽에서는 사치스러운 모습의 귀족들이 새로운 그림들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껏 들떠 보이는 귀족들은 다소 과장된 몸동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경이 곤두선 채 생활했던 귀족들의 엄격한 예절 동작들이 아직 그들의 몸에 베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절대주의의 권력은 귀족들에게 이양되고 있었다.

또한, 미술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날 '로코코'라고 불리는 이 양식은 당시 귀족들의 사치, 향락, 쾌락주의적인 특징을 가진다.


<Madame de Pompadour> Francois Boucher,1756 (출처 fr.wikipedia.org)


바로크가 교회와 왕의 권위를 내세우는 거대하고 남성적인 양식이라면, 로코코 양식에는 여성적인 느낌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녹아 있다.

위 그림은 루이 15세의 연인으로 알려진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로코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로코코 시대의 '트렌드세터'였다.

화려한 장미로 수놓아진 에메랄드색 드레스, 목에 걸린 우아한 리본, 부드러운 핑크빛 입술과 볼, 그리고 로코코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들.

화가 프랑수아 부셰는 그녀를 마치 동화 속 화려한 여주인공처럼 표현했으며, 이를 통해 그녀가 당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퐁파두르 부인이 단순히 로코코의 아이콘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20년간 루이 15세의 연인이자 조력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지성까지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손에 들려져 있는 책, 오른편 아래 구석의 빨간색 백과전서는 그녀의 지식과 학문적 소양을 의미한다.

또한, 탁자 위의 깃털펜과 편지봉투는 그녀가 나라의 공식업무까지 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나 교육 기회 등을 증진시키기 위해 힘썼으며, 평민이나 하급 귀족 중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덕분에 하급 귀족이었던 나폴레옹은 훗날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전 유럽을 휩쓸며 황제에 등극하기도 한다.


<Swing> Jean-Honoré Fragonard,1767 (en.wikipedia.org)

위 작품은 로코코 미술의 정수라고 불리는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작품 <그네>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다.

여인은 그네 위에서 한쪽 신발을 날려버리며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에 있는 한 젊은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젊은 남자의 가슴에 꽂힌 분홍색 꽃을 통해, 같은 색깔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그의 애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그녀의 은밀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통해 이 둘의 관계 또한 은밀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유부녀다.

어둑한 곳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남편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등 뒤에서 그네를 밀어주고 있으며, 왼편에 있는 큐피드는 불륜 관계를 눈 감아주겠다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놓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귀족들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유로운 연애를 갈망하면서도 사회적 체면과 위신에 갇혀있었다.

작품명이 그네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네는 불륜의 상징이었다.

진자운동을 하는 <그네>는 자유연애와 사회적 체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그들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소재였으며, 프라고나르는 이와 같이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그림들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된다.




"불륜 이야기라 그런지 재미있네."
아내가 말했다.


"그치? 사실 이 당시 불륜은 요즘의 불륜이랑은 좀 달라."

"어떤 게?"

"잘 생각해 보면 결혼이 사랑을 전제하게 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 우리나라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결혼식날이 되어서야 서로 실물을 처음 본다던지 집안 어른들끼리 상대를 정해놓고 결혼을 한다던지 했던 게 비교적 최근 일이잖아?"

"정략결혼이었던 거야?"

"맞아. 사랑이 결여된 결혼인거지. 그런 와중에 강력했던 지배자가 사라졌고 억눌려 있던 자유로운 연애, 사치와 탐욕 같은 욕망들이 귀족들 사이에서 분출된 거지. 어찌 보면 지금의 불륜의 의미보다는 내가 원하는 상대와 사랑하고 싶었던 거라고 보는 편이 맞을 거야."

"이때가 자유 연애의 시작이구나."

"우리가 루브르에서 본 작품에서도 이 시대의 연애를 엿 볼 수 있는 작품이 있어."

"어떤 작품?"


<Pilgrimage to the Isle of Cythera> Francois Boucher,1717 (출처 en.wikipedia.org)


"<키테라 섬의 순례>라는 작품이야. 키테라 섬은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뒤 처음 발을 디딘 곳이거든. 그림은 젊은 남녀들이 반려자를 찾고 있는 장면이지."

"사랑의 느낌이 폴폴 나네. 멀리 천사들도 날아다니고."

"그치? 근데 모두가 행복했던 건 아니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미술은 그러한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미술 작품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당시 프랑스의 전체 인구 중 귀족은 단 1.3%에 불과했다.

석기시대부터 로코코 미술까지 평범한 사람이 주연이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The broken vessel> Jean-Baptiste Greuze,1771 (출처 en.wikipedia.org)


여기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화가가 있다.

방탕한 로코코싫증을 느끼며 계몽주의를 지지했던 화가 '장 바티스트 그뢰즈'이다.

그는 귀족적 자유주의를 표현하는 대신 주로 하층민의 삶을 그렸다.

위 작품 <깨진 항아리>는 앳되보이는 한 하층민 소녀의 사연을 담고 있다.

순진함을 가득 담고 있는 큼지막한 눈망울, 보랏빛 머리띠,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분홍꽃.

작품이 소녀의 아리따움을 표현한 것일까?


작품을 응시하다 보면 우리는 이내 불편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소녀의 원피스와 머플러 등 옷매무새가 헝클어져있으며, 오른손에 걸친 항아리가 깨져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원치 않는 관계로 인해 처녀성을 잃은 소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소녀는 한쪽 가슴이 드러나있으며 그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듯 넋이 나가 보인다.

또한, 두 손을 움켜쥔 자세는 사실 소녀가 꽃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쥐고 있음을 표현했으리라.

깨진 항아리는 소녀의 순결이 깨졌음을 암시하며, 커다란 눈망울과 표정은 하층민으로서 미래에 닥칠 불행을 예견하고 있는 소녀의 체념을 담고 있다.


이렇듯 장 바티스트 그뢰즈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우수에 찬 것처럼 보이는 소녀의 눈망울은 의지와 상관없이 순결을 잃은 그 분통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했던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The father's curse> Jean-Baptiste Greuze,1777 (출처 en.wikipedia.org)


위 작품은 장 바티스트 그뢰즈의 또 다른 작품 <아버지의 저주>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관람자의 시선을 끄는 것은 왼편의 아버지이다.

그는 역동적이고 분노에 가득 찬 모습으로 아들을 노려보고 있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옷가지는 이들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상대적 약자인 어머니와 딸들 아버지와 아들을 중재시키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오히려 두 사람의 감정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화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계몽주의와 함께 부를 축적해나가고 있는 시민계급과 절대주의자 간의 대립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는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태양왕이 재림하던 시절에도, 귀족들이 키테라 섬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순간에도 하층민의 삶은 처참한 수준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재정난에 허덕였지만 왕과 귀족들은 이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으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온갖 특권과 면세 혜택을 받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장 바티스트 그뢰즈가 위 작품을 완성했던 시점은 1777년.

프랑스 대혁명을 고작 12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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