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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작가 Apr 07. 2024

낭만에 대하여

19세기 낭만주의 미술

우리는 이따금씩 '낭만적'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로맨틱하다'와도 비슷하게 쓰이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행복한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


진심을 담아 써 내려간 편지.

흐릿한 초점의 사진과 우스꽝스러운 우리의 모습.

지평선 너머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넘겼던  한 잔.

낭만은 심장이 뛰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이 만나는 따뜻한 순간과 같다.


물론, 낭만이 사랑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이에 따르면 낭만의 반대말에 가장 가까운 것은 '현실'일 것이다.

낭만에 있어서 사랑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감정을 빚어내기 때문지 않을까.


낭만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다.

400여 년에 걸쳐 지구의 밤하늘에 도착한 북극성.

산들거리는 봄바람과 따뜻한 꽃내음.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를 담고 있는 듯 떨어지는 빗소리.

낭만은 가까운 현실 속에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노트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도 낭만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유난히 파란 하늘을 보며 자유로이 나는 새들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린 시절의 낭만은 50년 뒤 그가 새의 비행을 연구하던 노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의 노트에는 솔개가 어떻게 날개를 들어 올리는지, 어떻게 꼬리를 내리며 착륙하는지에 대해 관찰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직접 하늘을 날고자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내가 간직한 최초의 기억 중 하나가 솔개라서 그런지
솔개에 관해 쓰는 것은 내게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에게 있어서 비행은 낭만이었다.


<The Third of May 1808> Francisco de Goya,1814 (출처 en.wikipedia.org)


하지만 이러한 감수성으로 낭만주의 미술을 접한다면 꽤나 당혹스러울 수 있다.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을 살펴보자.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스페인 민가의 참혹했던 현장을 보여준다.


관람자는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총격대와 겁에 질린 포로들이다.

총기를 든 집단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불가항력과 같이 묘사되었으며, 바닥에 놓인 사각 조명은 총살을 앞둔 포로들과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이들을 비추며 참상을 러낸다.

화가는 또한 색감의 대조를 통해 화면 중앙에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몰입하게 만든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 오른손에 있는 상처는 마치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 없이 희생되었으며, 좁아 보이기까지 하는 공간은 도망갈 곳조차 없던 그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왼쪽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고야,1823 / 오른쪽 <거인> 고야,1812 (출처 wikipedia.org)


프란시스코 고야는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다.

또한 그는 19세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였으며 당시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앞서 본 <1808년 5월 3일>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거인>과 같은 그의 대표작은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과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프란시스코 고야 위와 같이 섬뜩한 작품을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낭만주의라는 게 무엇일까?



프랑스 대혁명 직후 자코뱅파, 지롱드파 등 여러 세력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것처럼 미술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왼쪽 앵그르 자화상,1858 / 오른쪽 들라크루아 자화상,1837 (출처 wikipedia.org)

전통을 따르려는 자와 전통을 버리려는 자.

다비드가 남긴 '신고전주의'를 계승하려 했던 앵그르와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들라크루아의 이야기이다.


앵그르는 다비드의 수제자였다.

그는 역사화가가 되고자 10대 후반 다비드의 화실에 들어갔고, 당시 미술계를 이끌었던 신고전주의적 화풍의 작품을 곧 잘 그려냈다.

<아가멤논의 사절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01 (출처 artsy.net/artwork)

위 작품 <아가멤논의 사절>은 20대 초반의 앵그르가 그렸던 그림이다.

신화적인 주제, 조각상과도 같이 보이는 인물들, 안정된 구도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고전주의적 표현 방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아카데미의 최고상이었던 로마상(Prix de Rome)을 수여받았고, 이후 로마 유학을 떠나 고전주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공부하게 된다.


왼쪽 <Grande Baigneuse> 앵그르, 1808 / 오른쪽 <La Grande Odalisque> 앵그르,1814 (출처 en.wikipedia.org)


로마에 머물면서 그가 파고들었던 것은 인간의 신체였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인간의 신체에서 드러나는 형태를 중요시했다.

앵그르의 작품은 명확한 윤곽선과 정밀한 묘사, 절제된 관능미에서 느껴지는 차분함 등 고전주의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의 대표작 <그랑 오달리스크>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바를 느껴볼 수 있다.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 허리와 부자연스러운 자세 등 그는 형태를 왜곡하면서까지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하고자 했다.


왼쪽 <루이 13세의 맹세> 앵그르 / 오른쪽 <키오스 섬의 학살> 들라크루아 (출처 en.wikipedia.org)

신고전주의의 앵그르가 낭만주의의 들라크루아와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1824년 살롱전에서였다.

먼저, 앵그르는 <루이 13세의 맹세>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는 루이 13세가 자신의 통치권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고자 맹세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나폴레옹으로 인해 무너졌던 교회와 국가 사이의 유대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던 의뢰인에 입맛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앵그르는 이 작품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샤를 10세로부터 훈장을 받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핵심 기관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반면, 들라크루아는 신고전주의 화가들에게 '예술 학살'이라는 평을 들었던 작품 <키오스 섬의 학살>을 선보였다.

이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며 낭만주의의 태동을 알렸다.

작품은 1821년 발발한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키오스 섬에서의 참상을 보여준다.

정신이 반쯤 나가 보이는 그리스의 민간인들, 복부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남자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아내, 젖 먹이 아이를 옆에 두고 죽어가는 엄마, 발가벗겨진 채 끌려가는 여성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 등 그리스의 민간인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으며 무려 7만 명의 민간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노예로 전락했다.

작품을 보고 있자면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화가의 의도를 느껴지는 듯하다.

바로 '참담하다'는 그 감정.

낭만주의 미술의 핵심은 화가의 감성에 있다.


왼쪽 <성 심포리아누스의 순교> 앵그르,1834 / 오른쪽 <안티오쿠스의 병> 앵그르,1840 (출처 wikipedia.org)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맹세>, 그리고 위 작품들은 신고전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의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신고전주의자들은 미술계의 권위를 휘어잡았지만 그들의 화풍은 아직 바로크, 르네상스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시민혁명 이후에 황제정과 왕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개혁의 정신을 퇴색시켰던 프랑스 정치사와 같이 말이다.

반면,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낭만주의 화가들은 다양한 색채, 극적인 운동감을 통해 들끓는 감정을 표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가 아닌 '개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시민혁명의 이념이 미술계에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사실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맹세>와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은 역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표현하고자 했던 두 화가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만약 신고전주의 화가들에게 그리스 독립 전쟁을 주제로 던져주었다면, 용맹하게 맞서 싸우려는 그리스 군인들과 그리스를 지원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군인들 혹은 먼 하늘에서 이를 지지하려는 제우스의 모습과 같은 것들을 그려냈을 것이다.



"감정을 담아낸 미술이구나. 낭만주의가."
아내가 말했다.


"맞아. 우리는 흔히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지만 당시 화가들은 사랑의 감정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 만연해있던 불안, 광기, 상실감 등 다양한 감정들을 그려냈어. 그리고 이로 인해 미술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

"어떤 변화?"

"개성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이야."

"이전에는 개성이 없었던 건가? 자기는 그림만 봐도 누구 작품인지 다 알잖아."

"옷을 생각하면 쉬워. 사극 드라마에서 계급에 따라 옷차림이 정형화되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짜여진 틀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옷이 하나의 개성 표현의 수단이잖아? 옷의 다양한 소재나 생김새, 색깔을 통해서 그게 가능한 거지."

"낭만주의 화가들이 옷을 바꿔 입은 사람들인 거구나."

"맞아. 티셔츠도 입고 정장도 입고 수영복도 입기 시작한 거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1830 (출처 en.wikipedia.org)


"어쩐지 뭔가 역사화 치고 색감이 예쁜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치?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낭만주의 화가들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도 하지만 화풍에서도 극명하게 차이가 있어. 앵그르가 선과 형태를 중요시했다면 들라크루아는 색채에 집중했거든. 자세히 보면 명확한 윤곽선이라는 게 잘 안 보일 거야."

"그러네. 나도 이 그림은 많이 본 것 같다. 이 그림이 들라크루아 작품 중에 제일 유명한 거지?"

"응. 프랑스 혁명하면 떠오르는 작품이지. 근데 사실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작품이야."

"7월 혁명이 뭐였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고 나서 완전히 몰락했거든. 그 뒤로 주변 국가들이 다시 시민 혁명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빈 체제라는 걸 만들어."

"기억난다. 혁명이 일어나면 서로 도와서 진압하자는 거였지."

"맞아. 근데 이미 혁명의 여파가 이미 너무 널리 퍼져있었어. 그래서 당시 왕이었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자 7월 혁명을 일으킨 거지. 그리고 결국엔 입헌군주제가 탄생하게 돼."

 



낭만이 우리 삶 곳곳에 퍼져있듯 낭만주의 작품들은 다양한 주제를 가진다.

상대적으로 정형화된 신고전주의와 달리 낭만주의 작품에는 운동감, 색 그리고 감정이 가득 담겨있다.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1819 (출처 en.wikipedia.org)

위 작품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이다.

제리코는 들라크루아의 친구이자 많은 영향을 준 낭만주의 화가였다.

작품은 1816년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된 뒤 뗏목에 의존했던 147명의 승객들이 겪었던 비극적인 실화를 주제로 한다.


군함이 난파되자 승객들은 아무런 구호품도 없는 임시 뗏목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13일이 흘렀다. 

뗏목이 영국 해군에 의해 발견되며 생존자들이 구조되는 데, 생존자는 단 15명뿐이었다.

그림은 생존자들이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작품을 통해 당시 현장의 처절함과 광기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식인의 흔적들, 아들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절망에 빠진 노인, 삶에 대한 의지로 필사적으로 손짓하는 사람들.

제리코는 작품을 준비하며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병원과 영안실에서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관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낭만주의 화가들이 감정을 그려내기 시작하면서 중요해진 것은 개인의 '경험'이었다.



<노예선> 윌리엄 터너,1840 (출처 wikipedia.org)

언뜻 보면 아름다운 석양을 그린 것 같은 위 작품은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이다.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의 색깔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걸작 중 하나이다.


<노예선> 역시 1783년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다.

당시 노예를 운반했던 선주는 항해 중 바다에서 실종된 노예에 대해서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지만 자연사한 노예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챙길 수 없었다.

노예를 싣고 수개월간 항해하는 환경에서 노예들은 병들기 일쑤였다. 

위 작품은 선주가 보험금을 위해 죽거나 병든 노예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던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터너는 순수한 색채가 뿜어내는 감정을 통해 이 참혹한 사건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불그스름한 태양과 굽이치는 잿빛 파도, 멀리 떠나가는 노예선과 바닷속에 수장된 노예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강렬한 색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격렬한 색채는 여러가지 감정으로 이어진다.

태양의 붉은색은 피의 공포를, 검은빛 그림자와 파도는 참극의 어두움을 암시하며, 작품은 당시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희망 섞인 감정을 표현한다.


<악몽>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1781 (출처 de.wikipedia.org)

퓌슬리의 <악몽>은 마치 관람자가 이 상황을 몰래 쳐다보다 들킨 듯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다.

침대 위에는 새하얀 의상을 입고 축 늘어져있는 여인과 어두운 배경 속 괴물이 등장한다.

악몽을 상징하는 괴물은 여인을 깊은 잠에 빠져들게 만든 듯 보이며 그녀 위에 앉아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다.

작품은 악몽이라는 소재가 주는 공포의 감정을 전달하는 듯 보인다.


사실 괴물을 통해 악몽이 주는 두려움을 표현하려 했던 상상력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지만 작품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로 화가의 사랑 이야기이다.

퓌슬리는 작품을 그리기 수년 전 여행 중 친구의 조카인 안나 란돌트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의 청혼은 거절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들은 그림 속 여인이 안나이며 그녀 위에 올라탄 괴물이 화가라고 추측한다.

다시 말해, 작품이 실연의 아픔과 분노, 그녀를 갖고자 했던 욕망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낭만주의는 사적이고 은밀한 것을 주제로 한다.

마침내 미술이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 것이다.

사실 이처럼 개인이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미술사에 있어 커다란 변화였다.

낭만주의 이전 미술의 이면에는 늘 시대와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각 미술사조의 이름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석기시대, 이집트,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중세 시대까지 미술사조의 이름은 시대나 국가에서 따왔으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미술은 당시 유행했던 양식의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낭만주의는 미술사의 변곡점과 같다.

화가들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더 이상 왕이나 종교 이야기도, 교훈도 아니었다.

그들이 표출하고자 했던 것은 다양한 감정, 즉 '낭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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