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리겠다?"
아내가 말했다.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가 했던 말이야. 사실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지."
"사실주의는 뭐야? 사실적으로 표현하겠다는 건가?"
<Holy Trinity> Masaccio,1428 (출처 en.wikipedia.org) "그건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미술사 전반에 걸친 화가들의 숙제 같은 거였어. "얼마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가?"의 문제인 셈이지. 마사초의 원근법 기억나?"
"사람들이 벽화를 보고 벽에 구멍이 난 줄 알았었다던 작품이잖아."
"맞아. 원근법 말고도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단축법,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 등 다 사실적 표현과 관련이 있어. 그치만 사실주의는 사실적 표현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봐야 하지. 쿠르베의 말을 잘 곱씹어 보면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천사가 이 세상에 없으니 못 그리겠다는 거니까... 내 두 눈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만을 그리겠다는 의미인가?"
"맞아.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자면 여기서의 사실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돼. 사실주의자들은 예술의 원천이 예술가의 경험에 있다고 봤던 사람들이거든. 위 작품 <오르낭의 매장>도 쿠르베가 나고 자랐던 오르낭 지역의 장례식을 그린 작품이야."
"자신이 겪은 일을 그린다는 거구나.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 같은데 이게 미술사에서 그렇게 큰 변혁이었나?"
"엄청난 변화였지. 알쏭달쏭하면 이전 미술사조와 비교해 보는 게 좋아."
"바로 전이면 낭만주의?"
왼쪽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자크 루이 다비드 / 오른쪽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출처 wikipedia.org)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다비드나 제리코 작품을 보면 언뜻 봐도 '사실'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이지 않아?"
"사실이 곧 경험이라면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전혀 사실적으로 그린 건 아닌 것 같고..."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는 자기 말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고전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누가 보더라도 전쟁 중에 사비니 여인이 이렇게 완벽한 구도로 중재를 했을 것 같진 않잖아? 인물들은 조각상처럼 그려졌고 로마 시대 이야기인데 배경에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이 등장하기도 하지."
"뭔가 어색하긴 해. 전쟁 중인데 피 한 방울 안 보이는 것도 그렇고. 제리코의 작품은 그래도 사실적이지 않나?"
"음... 사실주의 화가들이 봤을 땐 낭만주의 작품들이 너무 감정적이라고 본거야."
"그림에 감정을 담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메두사호의 뗏목>은 역사적 사실일 뿐 화가인 제리코가 저 현장을 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는 거지."
"아... 경험."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도 틀림없이 기록에 의한 역사적 사실이긴 해. 그렇지만 이걸 직접 경험했냐고 묻는 순간 사실이 아니게 돼버리는 거지."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리겠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사실주의 이전, 즉 과거의 미술사조는 비교적 오랜 시간 지배력을 이어갔다.
고대 이집트 3,000년.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까지 1,500년.
그 뒤로 이어진 중세 시대는 1,000년의 세월 가량 지속되었으며 미술은 각각의 시대와 궤를 같이했다.
종교와 신앙, 선민사상을 앞세운 그 시대의 통치자들은 그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지배세력의 힘은 서서히 분산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미술사는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사조를 만들어냈고 변화의 주기 또한 상당히 빨라졌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등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다채로운 미술사조가 이 시기에 등장했다.
어떻게 100년 안에 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 시작에는 낭만주의가 있다.
( 19세기 낭만주의 : https://brunch.co.kr/@bb02810c2cd7432/18 )
낭만주의 화가들은 캔버스에 들끓는 감정을 담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캔버스 속에 집어넣은 '감정'은 커다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감정이 미술사 속 나비의 날갯짓이 된 이유는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감정이 작품에 녹아들자 그림은 한 사람의 일기장, 에세이, 혹은 사진 앨범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다시 말해, 미술 작품이 곧 그들의 삶과 경험 그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그들의 일기장에는 예수가 행했던 기적이라던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작품의 주제 또한 다양해졌다.
의뢰인에게 휘둘리기를 거부한 화가들은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제의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관심을 갖게 된 분야가 하나 있었다.
사실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화'이다.
우리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려냈던 풍경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듯이,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조금 벗어난 바르비종(Barbizon) 지역에도 이를 기억했던 화가들이 있었다.
<Groupe de chênes, Apremont> 테오도르 루소,1852 (출처 wikipedia.org) 위 작품은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테오도르 루소의 작품이다.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는 참나무, 그늘 아래 작게 표현된 인간과 가축들, 얼룩덜룩한 하늘.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석회암 절벽과 무성한 숲으로 우거진 프랑스 쥐라 지역을 여행하다가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는 주변에 공존하는 광활한 자연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배워나갔다.
물론, 풍경화를 선택한 그에게 있어 화가의 길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중심에는 여전히 신고전주의파가 건재했으며, 그들에게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 새로운 발상을 했던 화가들이나 풍경화가들은 조롱거리였다.
아무리 멋진 풍경일지언정 그 안에 영속성을 지니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5살 무렵, 루소가 견습생이 되었을 때 시절 그의 앞에 놓여졌던 것은 무미건조한 고전주의 회화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스승들에게 실망했으며 그림의 주제를 찾기 위해 파리 국경을 넘어 여행을 시작했다.
<The village of Becquigny> 테오도르 루소,1867 (출처 en.wikipedia.org)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풍경화가들은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은 곧 경험이고, 경험은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었기 때문이다.
슈브뢰즈(Chevreuse), 오베르뉴(Auvergne), 퐁텐블로(Fontainebleau)와 같은 지역들은 그가 여행을 하며 자연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했던 대표적인 지역들이다.
루소는 작품에 엄청난 시간을 쏟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엉키고 설킨 나무뿌리의 생김새, 바위와 돌이 가지는 질감, 배경에 따라 변화하는 색채 등 그는 작은 부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베키니 마을>과 같이 온전히 완성된 작품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위 작품 역시 무려 10여 년에 걸쳐 그려진 작품이다.
위 작품은 1857년 루소가 피카르디를 여행하던 중 머물렀던 시골 휴양지의 풍경이다.
파란 하늘과 곧게 뻗은 길, 아늑해 보이는 오두막, 작게 그려진 강아지 등 작품은 루소가 절묘한 위치에서 바라봤던 평화로운 마을을 품고 있다.
또, 작품 중앙에는 말을 탄 여행자가 보인다.
나무 그늘에 가려진 채 흐릿하게 표현된 그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루소의 관점이다.
그가 광활한 풍경을 보고 겪으며 깨달은 것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먼지와도 같은 것이라는 것이었다.
루소의 작품은 '인간과 이들이 만들어낸 인공물은 거대한 자연 속에 잠시 동안 존재할 뿐이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The Forest in Winter at Sunset> 테오도르 루소,1864 (출처 wikipedia.org) 루소의 작품은 한편으로 엄숙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따사로운 봄날의 화사한 석양이 아닌 한 겨울 칠흑 같은 암흑의 일몰을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인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풍경화가이자 사실주의 화가였던 그는 가장 열정적이었던 2~30대를 통틀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년 동안 계속해서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그의 작품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금씩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바르비종 지역으로 온 뒤였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도 제대로 된 후원자는 없었다.
더욱이 아내의 정신병, 연로한 아버지로 인해 계속해서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루소는 사실주의에 입각해 있는 그대로의 것을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 작품처럼 주제를 선택함에 있어서 자신의 고된 삶에서 비롯된 비관적인 감정이 드러나게 된다.
<퐁텐블로의 숲>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1846 (출처 wikipedia.org) 위 작품은 루소와 함께 대표적인 바르비종파 화가로 꼽히는 코로의 작품이다.
고요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위 작품은 바르비종 지역의 퐁텐블로 숲 속에서 소치기와 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코로의 풍경화 또한 많은 비평가들에게 비판을 받았었다.
그는 평생 동안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코로의 인생은 루소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다.
위 작품이 그려진 1846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신고전주의 전통을 거부했던 혁신적인 발상, 야외 작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낭만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그의 작품에 대해 "현학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코로의 작품은 단순한 색채로 인해 매혹적이다."라고 평가했다.
<A Morning. The dance of the Nymphs>, Jean Baptiste Camille Corot,1850 (출처 wikipedia.org) 이후로 파리 미술계에서 코로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또한, 1850년에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던 위 작품 <A morning, the dance of the Nymphs>을 살롱전에 전시했다.
이 작품이 코로의 전환점이 된 이유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나폴레옹 3세가 이 그림을 직접 구입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신화적인 주제를 보여준다.
신화에 등장하는 정령들을 뜻하는 님프(Nymphs)들의 아침을 주제로 한 위 작품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위 작품의 님프들은 루소의 풍경화 속 인간들처럼 자연 속에 고요히 존재한다.
코로가 신화를 그려냈던 방식이 명백히 바르비종파의 것이었다는 뜻이다.
코로는 평생 동안 바르비종 지역의 퐁텐블로를 여행했다.
이는 아카데미에 만연해있던 장르의 위계 안에서 풍경화의 위상을 높이고 19세기를 '풍경화의 시대'로 기억하는 데 기여한 바르비종파 화가들과의 깊은 관계를 나타낸다.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1857 (출처 wikipedia.org) 위 작품은 사실주의 화가 밀레의 대표적인 작품 <이삭 줍는 여인들>이다.
여전히 신고전주의에 빠져있던 화가들은 밀레의 작품을 보며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 의미 없는 이런 장면을 뭐 하러 그리는 것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작품은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하층민의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담고 있다.
<The Slave Ship> 터너,1840 (출처 wikipedia.org)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는 것 또한 흥미롭다.
강렬한 색채와 함께 비극적인 사건을 담고 있는 위 작품 <노예선>을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삭 줍는 여인들>에는 어떠한 극적인 사건도, 줄거리도, 끓어오르는 감정도 없다.
세 명의 여인은 추수가 한창인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을 뿐 그녀들의 모습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녀들은 있는 그대로 캔버스 위에 존재할 뿐이다.
밀레의 작품은 코로, 루소의 작품들과도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인물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작품은 농업과 자연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제목과 더불어 위 작품의 주제가 세 명의 하층민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수확 후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사람들은 대량의 수확물을 수레에 싣고 있고, 말을 탄 감독관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밀레가 왜 하필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을 그렸을까?" 하는 것이다.
왼쪽 <씨 뿌리는 사람> / 중앙 <쉬는 추수꾼들> / 오른쪽 <한낮의 휴식> 밀레 (출처 en.wikipedia.org)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며 새로운 세상이 올 것만 같았지만 하층민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과 빈부격차 등 사회적 불평등을 겪고 있었다.
1848년, 대혁명 발발 후 59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당시 유권자는 프랑스 인구의 고작 1%에 불과했다.
결국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당시 국회였던 보르베(Bourbon)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고, 2월 혁명이 일어나며 루이 필립의 군주제를 무너뜨렸다.
밀레의 작품은 이처럼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담고 있다.
세 명의 여인이 이삭을 줍고 있는 장면을 주제로 선택한 것은 당시 지주에게 보내져야만 했던 수확물과 달리, 별다른 가치가 없어 지주에게 빼앗기지 않았던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어 가야만 했던 그 시대의 불평등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여인들의 옷과 모자는 혁명의 이념을 담고 있는 프랑스 삼색기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밀레 역시 바르비종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실주의 화가였다.
그러나 그가 자연 속에서 농민들의 현실을 관찰했고 이러한 노동 계급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드높여주고자 했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구스타브 쿠르베,1854 (출처 en.wikipedia.org)
사실주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
아니면 사실, 곧 화가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
아니면 밀레와 같이 사회적으로 불편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
'사실주의'라는 직접적으로 명칭을 부여한 것은 구스타브 쿠르베였다.
쿠르베는 1855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이를 ‘사실주의 쿠르베 전'이라고 했다.
위 작품은 쿠르베가 시골길에서 친구와 후원자로부터 인사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밀레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쿠르베의 작품에는 그 어떠한 우아함도, 유려함도, 다채로운 색채도 없다.
쿠르베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는 미술 작품이 가지는 관습, 편견,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자 했다.
바꿔 말해 그의 사실주의는 예술적 순수함을 추구한다.
쿠르베의 작품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나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려진 작품이 아니었다.
사실주의가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림이 가지는 '영속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시 지난날의 거장들을 돌이켜 보자.
이집트 화가들은 파라오의 영원을 위한 그림을 남겼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가들은 영원불멸의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이는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를 거쳐며 고전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남아있다.
중세 시대 이콘화 속 성경 교리와 가르침은 세상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영속성을 지탱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속성이 남아있는 것이 미술사 전반에 걸쳐 그려진 초상화이다.
19세기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까지 그려졌던 수많은 초상화는 그 자체로 의뢰인들의 영원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사실주의 작품들은 예술가들이 이러한 영속성과 이별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찰나의 인상을 포착해 회화에 접목시켰던 인상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후기인상주의 화가 세잔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쿠르베에게 물었다.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건가요?"
쿠르베는 자기가 그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색을 칠해 넣고 있던 것이다.
작품이 완성된 후 쿠르베가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린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린 것이 나뭇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그가 천사를 그릴 수 없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