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너무 예쁘다.”
모네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된 아내가 말했다.
“모네는 정말 대가지. 정말 넋을 잃고 보게 만드는 작품들인 것 같아."
"일단 크기도 엄청 커서 압도하는 느낌? 이 작품들을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린 거야?”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수련 연작들은 말년에 10년 정도에 걸쳐서 그렸어."
"와... 어쩐지. 근데 10년 동안 작품을 그리면 어떻게 먹고살았대?"
“물론 그 기간 동안 수련 연작만 그린 건 아니지. 그리고 다행히 모네가 이 그림들을 그렸던 시기에는 화가로서 이미 성공해서 엄청 부자였어. 아마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빛을 관찰하면서 그렸을 거야."
"맞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을 그린 화가들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 근데 인상주의랑 빛이랑 무슨 상관이지?"
"흠... 빛을 그린다는 걸 잘 생각해 보면 돼."
"과학이랑 연관되어 있는 거야?"
"어느 정도는? 옛날엔 색깔이 물체 안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알아?"
"응. 뉴턴의 광학 전까지는 그랬지."
"그치. 빛이 투과되거나 반사되면서 색깔이 결정되는 거잖아? 어느 순간부터 시각이라는 감각이 곧 빛이라고 인식했던 화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던 쿠르베 기억나?"
"응. 사실주의 화가."
"맞아. 사실주의자들은 내가 경험하고 본 것들을 그렸지. 인상주의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거라고 보면 돼."
"어떤 측면에서?"
"아마 모네라면 사실주의 화가였던 쿠르베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야."
"쿠르베 선생,
당신이 그렸던 경험,
그 모든 시각적 사실이 본래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건... 사실 '빛'입니다."
빛, 그리고 색깔은 무엇일까.
무심코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법한 이 질문은 역사가 깊다.
이에 대한 해답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이다.
그는 눈에서 빛이 나오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약 100년 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사물 안에 색이 들어 있기 때문에 빛이 없어도 색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빛이 직선으로 진행한다던 유클리드, 물체가 빛을 반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라비아 학제 알하젠 등 빛에 대한 연구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뉴턴의 저서 <광학> 일부 그리고 17세기.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등장한다.
영국의 조폐국장이자 과학자였던 뉴턴이었다.
그는 위 그림과 같이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나타나는 여러 색깔의 스펙트럼을 보며 고유의 색은 동일한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엠페도클레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틀렸던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색은, 알고 보니 빛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잠시 사실주의를 떠올려보자.
인상주의 이전에는 사실주의가 유행했다.
사실주의자들은 그들 주변에 흔히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들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예술이라는 것이 예술가의 경험을 통해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인상주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있는 그대로가 무엇인가요?"
사실주의자들은 '나의 두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것, 즉 나의 경험'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인상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인간이 과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의 요점은 인상주의자들이 '시각'이라는 감각 그 자체를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뇌가 받아들이는 시각이 절대적으로 빛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빛을 그리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 눈을 그대로 담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베르니 작업실에서 수련 연작을 그리고 있는 모네 ( 출처 wikipedia.org ) 그런데 빛은 관찰할수록 신비롭다.
빛은 그대로 있는 법이 없으며 순간마다 변한다.
모네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며 같은 주제인 '수련'을 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빛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지며, 이는 곧 색채도 달라진다는 말과 같다.
그가 긴 세월 동안 지루하게 똑같은 그림을 그린 걸까?
그렇지 않다.
그가 10여 년간 바라봤던 지베르니 연못의 수련은 단 한순간도 똑같았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찰나의 빛에 의해 망막에 맺힌 '인상'.
인상주의자들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순간적인 인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라 얘기한다.
"인상주의가 이 뜻이구나."
아내가 말했다.
“응. 사실은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건 모네랑 연관이 있어. 언론인이었던 루이 르루아(Louis Leroy)가 모네의 그림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순간의 인상만을 그리는 얼간이들’이라고 비평했는데 그게 어원이 돼버린 거지.”
“비평을 할 게 아니라 한 점이라도 더 사놨어야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보면 그렇지? 아마 자손들이 크게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19세기 미술계를 보면 그래도 이 정도의 비판은 견딜만한 수준이었다는 거야. 모네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을 겪은 화가가 있거든."
"누구?"
"인상주의의 출발점을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야. 사실 마네가 없었다면 모네도 없었을지도 모르거든.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마네? 이름만 봐서는... 설마 친형제인가?”
“땡. 둘이 가깝게 지내기는 했어. 그치만 모네에게 마네는 대선배라고나 할까?”
마네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판사였고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쉽게 화가의 길을 허락받을 수 없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살롱전'에 출품하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 무렵부터였다.
살롱전은 당시 19세기 화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전시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곳이었으며, 한편으론 자신들의 그림을 구매하고 후원해 줄 부르주아를 만날 수 있었던 생존을 위한 행사였다.
마네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선보였다.
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그 해 심사위원단이 유난히 엄격했고 출품작 5천여 점 중 3천여 점이 거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1863년 낙선전 카탈로그 불만이 거세지자 나폴레옹 3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거절된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도록 했다.
그 유명한 1863년 낙선전이다.
낙선전에는 거절된 3천여 점의 작품 중 1,600여 점이 공개되었다.
나머지 1400여 점의 주인들은 낙선전에 출품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낙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아 했는데, 이는 미래의 고객들에게 선입견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네 또한 이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낙선전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누군가는 작품의 가치를 알아줄 것이라는.
낙선전은 성공적이었다.
첫날만 7000명의 관람객이 몰려들 정도로 전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낙선전이 열린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풋내기들의 작품을 비웃으러 전시회장에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낙선전에서 마네의 작품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앞에 모여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들은 마네의 작품을 보며 술렁이며 이와 같이 말했다.
"무슨 화가가 그림을 이렇게 못 그려?"
<The Luncheon on the grass> Edouard Manet,1863 (출처 wikipedia.org)
마네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신랄한 비난의 대상이 되며 구설수에 올랐다.
작품을 감상하던 황후가 화가 나서 부채로 그림을 내리치기도 했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훼손될까 봐 작품을 최대한 천장에 가까이 달아 전시하기도 했다.
일단 비평가들은 마네의 기본적인 소양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개울에서 목욕을 하는 듯 보이는 여인은 원근법 없이 너무 크게 그려져 작품 전체가 평면적이라는 점, 일부 묘사에서 대충 그린 듯 붓질이 그대로 드러나 작품이 세밀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화면 앞쪽에 정물들이 아카데미 회화의 전통적 규칙을 어기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신 같은 사람이 화가가 될 자격이나 있느냐?"라는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사실 19세기 미술계를 상상해 본다면, 마네가 이러한 치욕을 겪은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이 회화 작품에 대한 인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대상이 캔버스에 옮겨질 때 그 대상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일종의 합의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화가가 되는 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루이 14세에 의해 설립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처음부터 명암의 상호 작용에 기초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교육받았다.
마치 우리가 처음 수학을 배울 때 수(數)와 연산을 배우듯 말이다.
그들은 고대 조각상을 보고 그리며 명암의 농도에 맞춰 입체감을 나타내는 연습을 했고, 이것이 몸에 밴 후에는 모든 사물과 인물을 그리는 데 활용했다.
이후에는 해부학과 색의 혼합, 대비, 채도 등의 커리큘럼을 거쳤으며, 이에 따라 화가라면 갖춰야 할 기본 소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감상자들이 이러한 훈련에 의해 그려진 작품들을 보며, 이것이 우리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마네의 작품은 이러한 미술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빛을 관찰하며 아카데미의 기초적인 규칙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했다.
예를 들어, 옥외의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입체감이 사라진다거나 그림자 또한 반드시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아카데미가 만들어낸 통념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왼쪽< The balcony> Edouard Manet / 오른쪽 <Rhetoricians at window> Jan steen (출처 wikipedia.org)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위 두 그림을 비교해 보자.
왼쪽에 있는 마네의 작품 <발코니>에서의 인물들은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초록 양산을 든 여인은 코도 없이 그려져 있으며,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옷과 여인들의 머리칼은 건물 내부의 어두움에 잡아먹혀 전혀 입체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건물 안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남자는 비교적 화면 안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마네가 이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가 뭘까?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는 그저 인간의 시각을 정확히 포착했고 이를 캔버스 위에 옮겼을 뿐이다.
오른쪽 얀 스테인의 작품을 보자.
우리가 작품 그 어디에 시선을 둔들 화가가 표현해 놓은 섬세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창문 안쪽의 인물들의 표정과 생김새까지 말이다.
만약 마네가 이 작품을 보았다면, 얀 스테인이 시각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엔 훌륭했지만, 시각이라는 감각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왼쪽 '시각의 인식' (주변이 명확하지 않음) / 오른쪽 '시각적 사실' (모든 사물이 선명함) (출처 이과생 아내)
마네는 '시각적 사실'과 '시각의 인식'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눈은 시점이 고정되는 순간, 주변에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묘사가 세밀하지 않다는 점, 붓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근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은 인본주의와 과학에 입각해 그들의 작품에 입체감을 부여했다.
하지만 시각이라는 감각은 현실에서는 르네상스 작품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마네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진정한 시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결국 그가 화가들의 영원한 숙제, 즉 "얼마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가?"의 문제를 풀어줄 실마리를 보여준 셈이다.
"마네의 작품이 미술사의 엄청난 전환점이구나."
아내가 말했다.
"그치? 마네를 현대 회화의 거장이라고 말하기도 해. 완전히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거지. 그래서 여러 후배 화가들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오마주 하기도 했어."
"그래? 익숙한 작품은 아닌데."
<풀밭 위의 점심식사> 클로드 모네,1866 (출처 en.wikipedia.org)
"일단 멀리 갈 것도 없이 모네도 똑같은 작품을 그렸어."
“완전 다른 것 같은데? 모네 작품이 더 예뻐 보인다.”
“맞아. 제목만 똑같아. 마네가 모네보다는 선배였다고 했잖아? 그래서 자극을 받았는지 이 그림을 엄청 크게 그리려고 하다가 결국엔 완성을 못 시켰어. 돈을 벌어야 했으니 이 작품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거든. 어쩌다 월세방의 보증금 대신 이 그림을 집주인에게 맡겼는데 보관을 잘못해서 많이 상해버렸지.”
“아쉽네. 보관이 잘 되어있는 작품도 있나?”
“응. 모네 말고도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오마주한 화가들이 있어. 자기도 알만한 유명한 사람."
"내가 알만한 화가면... 피카소?"
왼쪽 <풀밭 위의 점심식사> 피카소 / 오른쪽 <풀밭 위의 점심식사> 폴 세잔 (출처 wikiart.org // en.wikipedia.org) “맞아. 피카소와 폴 세잔이야.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지.”
"이게 대단한 작품이긴 하구나. 근데 당시 사람들이 비난했던 것도 이해가 가긴 해. 나도 그림만 봐서는 마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거든."
"맞아.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근데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그토록 많은 비난을 받은 이유가 또 하나 있어."
"그래?"
"응. 사실 사람들이 그토록 분개했던 건 회화론적인 관점보다는 화면 중앙에 있는 여자 때문이었거든."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여자가 왜? 옷을 벗고 있어서 그런가?"
"누드화는 마네 이전에도 엄청 많았지. 문제는 당시 관람자들이 대부분 신흥계급인 부르주아들이었다는 거야. 관람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는 이 여자가 부르주아들 입장에서는 존재 자체가 조금 불편한 존재였지."
"존재 자체가?"
왼쪽 <Olympia> Edouard Manet,1863 / 오른쪽 <Venus of Urbino> Titian,1534 (출처 en.wikipedia.org) “이 작품 <올랭피아>는 어떤 것 같아?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같은 해에 마네가 그린 작품이야.”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도 뭔가 잘못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릴 때 영감을 받았던 티치아노의 작품 <Venus of Urbino>을 보면 파악하기 쉬울 거야.”
“뭔지 알 것 같기도 해. 티치아노가 그린 여인은 뭔가 신화 같은 성스러운 느낌이랄까?”
“그치? 자기 말대로 비너스, 그러니까 여신의 누드화지. 근데 마네는 여신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작품에 그려버렸어.”
“그게 비난을 받을 일인가?”
“미술계에서 누드화를 그릴 때의 불문율이 있었어. ‘본 것’이 아닌 ‘알고 있는 것’, 즉 일반적으로 누드화는 비현실의 존재를 그리는 시대였거든. 반면 <올랭피아>는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이라는 실제 인물이 모델이었어. 당시 유명한 코르티잔이었으니 사람들이 빅토린을 단 번에 알아채버린 거지.”
“아... 마네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거구나. 비너스를 볼 일은 없으니.”
“맞아. 그리고 작품명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부들이 가명으로 많이 쓰던 이름이었거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듯 보이는 모델이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시선을 주도하고 있는 모습이 논란을 만들어낸 거지."
"아... 근데 코르티잔은 뭐야??"
"명문가는 아니지만 미모로 권세가의 후원을 받았던 여자들을 부르는 말이었어. 단순히 매춘 행위를 넘어서 예술적 교양이나 고급 취미를 갖춘 사람들이라 궁정에 드나들 만큼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 코르티잔 중에 자기가 알만한 정말 유명한 사람도 있어.”
“누구?”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사진 (출처 나무위키) "자신이 파리의 마지막 코르티잔이었다고 말했던 사람, 코코 샤넬."
왼쪽 <Music in the Tuileries Gardens> 마네,1862 / 오른쪽 <The old musician> 마네,1862 (출처 en.wikipedia.org)
마네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빅토린 뫼랑이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의 모델이자 그를 인상주의의 출발점에 설 수 있게 해 준 것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 1860년대 초 의욕에 차 있던 마네를 사로잡았던 주제는 파리.
도시의 모습이었다.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늙은 음악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시 파리가 지금과 같이 활기차고 낭만이 있는 도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리의 곳곳을 거닐던 마네가 빅토린을 만나게 된 것이 이 시기 즈음이다.
둘의 첫 만남은 마네의 화실 근처에서였다.
마네는 싸구려 카바레에서 기타를 들고 나오는 빅토린과 마주쳤고, 직감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뮤즈가 될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화실에 와 포즈를 취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네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단 번에 거절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하는 음악가였으며,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녀에게 마네는 띠동갑 차이가 나는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왼쪽 <Street singer> 마네,1862 / 오른쪽 <빅토린 뫼랑 초상화> 마네,1862 (출처 en.wikipedia.org)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빅토린은 마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버렸다.
마네는 그녀를 고집스럽게 따라다녔고, 결국 빅토린은 마네의 작품 <거리의 가수>에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마네의 뮤즈가 되었다.
<거리의 가수>에서 빅토린은 체리를 먹으며 카바레의 문을 나서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네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그가 받았던 강렬한 빅토린의 인상은 아마 그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빅토린의 초상화 역시 같은 해에 그려졌다.
초상화에서는 빅토린 특유의 불그스름한 머리색과 매력적인 외모가 드러나며, 가수, 화가, 댄서 등 다양한 매력을 가진 그녀의 신비로움이 담겨있다.
빅토린이 마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감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부터 1년 후 마네는 인생 최고의 걸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를 완성했다.
빅토린 역시 두 작품의 모델로서 등장하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누드모델이 되었다.
<The railway> 마네, 1872 마네의 작품에 빅토린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위 작품 <The railway>이다.
<철도에서> 속 빅토린은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마네는 <올랭피아> 이후 빅토린을 둘러싼 추문들로 인해 곤욕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마네의 절친한 동료였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알프레드 스티븐스(Alfred Stevens) 등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 활동하며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을 남겼다.
"역마살이 낀 자유분방한 여인으로, 마네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바람기 있는 여자이다. 그녀의 눈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다."
위 작품 <철도에서>는 이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뒤의 빅토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는 듯 차분해 보이며, 어두운 모자와 진한 푸른빛을 띠는 드레스에서는 지난날의 화려함을 뒤로 한채 앉아있는 한 여인의 왠지 모를 침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쉽지만 <철도에서> 이후로 마네는 빅토린을 그리지 않았다.
빅토린이 더 이상 마네에게 영감을 주지 못했던 탓일까.
꿈을 좇던 열정적인 화가와 꿈이 많던 철부지 소녀는, 어느새 성공한 화가와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A studio at Les batignolles> Henri Fantin-Latour,1870 (출처 en.wikipedia.org)
또한, 이 시기의 마네는 인상주의 미술가들 사이에 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앙리 팡탱 라투르의 위 작품을 보면 마네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며 클로드 모네, 에밀 졸라, 프레데리크 바지유,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여러 인상주의 거장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진중하고 분주해 보이는 작품 속 마네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빅토린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Argenteuil> 마네,1874 (출처 wikipedia.org)
마네가 여러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짙은 인상주의 화풍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의 이전 작품들과 <아르장퇴유>를 비교해 본다면 마네가 붓의 질감을 좀 더 거칠게 드러낸 것을 볼 수 있으며 더욱 많은 빛과 색상을 담아낸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속 두 등장인물의 얼굴과 옷, 배경의 묘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을 통해 인식되는 감각일 뿐이다.
마네는 1874년 살롱전에 이 작품을 출품했지만 다시 한번 거부되었다.
하지만 작품의 낙선은 더 이상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마네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전시회를 열어 살롱전 못지않은 방문객들을 모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그 가치를 증명해 냈다.
더욱이 전통만을 고집하는 아카데미식 살롱전을 비판하는 언론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Monet painting on his studio boat> 마네,1874 (출처 en.wikipedia.org)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곁에서 한 목소리를 내주었던 동료화가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마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일 것이다.
모네는 르아브르 지방 출신의 가난한 화가였다.
그러나 그 역시 마네와 마찬가지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마네가 <아르장퇴유>에서 보여준 화풍의 변화를 보면 그가 모네와 생각을 주고받으며 비슷한 표현 방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토록 절친했던 두 화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이다.
그들은 아르장퇴유에서 이른 아침 센강의 빛을 자주 관찰하며 같이 야외작업을 하곤 했다.
작품은 보트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네와 그의 아내를 주제로 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아늑한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A bar at the Folies Bergere> 에두아르 마네,1882
마네는 40대 중반 무렵부터 건강이 악화되었고, 위 작품을 그린 시점에는 신체를 잘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 작품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건강했던 마네의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그림은 마네의 친구였던 작곡가가 운영했던 술집을 주제로 한다.
작품을 보면 차가운 눈빛의 소녀와 배경을 통해 보이는 활기찬 술집이 미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녀는 관객이기도 한 관람자와의 눈 맞춤을 피하려는 듯 다른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물론, 마네가 그녀가 내비치는 우울한 감정을 작품에 담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한 순간의 인상을 그려냈을 뿐이다.
또 한 가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는데, 바로 테이블 위에 놓인 정물들이다.
말년의 마네는 꽃, 과일과 같은 정물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또한 유리병에 담긴 꽃이었다.
마네의 걸작답게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또한 많은 논란을 만들어냈다.
그림 속 소녀가 사실은 매춘부라는 주장, 원근법과 구도에 대한 비판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시각과 눈을 중요시했던 인상파 화가 마네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구도로 작품을 그렸다는 주장이다.
먼저, 작품을 자세히 보다 보면 소녀의 뒤에 거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왼쪽의 술병들, 소녀의 뒷모습, 그리고 반쯤 잘린 꽃이 반사되어 관람자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논란을 만들어낸 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들이 각도상 어색해 보인다는 점이다.
거울에 비친 소녀는 남자와 대화를 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입은 닫혀있고 시선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소녀가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면 마네가 소녀를 바라보는 각도상 그림에 남자의 뒷모습이 보여야 할 것 같이 느껴지지만 작품 속에서는 남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말콤 박사 분석 (출처 https://www.getty.edu/art/exhibitions/manet_bar/looking_glass.html)
작품과 관련해서 여러 학자들이 기술적 접근을 통해 수수께끼를 풀어내려고 했었다.
그리고 말콤 박(Malcolm Park)의 최근 연구에서 작품에 적용된 원근법이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위 그림이 이해를 위해 현장을 재구성한 평면도이며, 이를 통해 마네가 자신의 시야 중 아주 좁은 일부분만을 가져와 작품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시야각 사이에 존재한다.
이를 따라가 보면, 작품 속 표현된 모든 것들이 정확한 구도를 가지고 배치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가장 어색하게 느껴졌던 소녀의 뒷모습과 남자의 존재 또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소녀가 마네를 향해 몸을 돌려 서있었기 때문에 정면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고, 남자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서있었던 탓에 거울 속에서 소녀와 대화를 하는 듯 보였던 것이었다.
위 평면도에 따라 촬영한 사진. 작품 원본과 비교해 보면 매우 유사하다. 어쩌면 마네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고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시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에 대해 말이다.
아카데미식 회화론에 매몰돼 착각 속에 빠져있던 화가들처럼, 인간의 시각은 너무나 쉽게 착각에 빠진다.
흔히 인상주의 화가들을 일컫어 '빛을 그린 화가들'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물론, 빛을 그린다는 표현이 왠지 모르게 불가능하고 모호한 일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발생과정을 살펴보면, '빛을 그린다'는 표현은 결국 시각이라는 감각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인상주의자들은 인간이 시각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한순간의 인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이 과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이폴리트 피조의 광속 측정을 위한 톱니바퀴 실험 예시 (출처 superostmk.live/product_details/22731134.html)
313,274,304 m/s.
이는 마네에게 치욕을 주었던 낙선전이 열리기 약 14년 전인 1849년에 프랑스 물리학자 '이폴리트 피조'가 실험을 통해 측정했던 빛의 속도이다.
약 8km 떨어진 거리에 광원과 거울을 위치시키고 그 사이에 있는 톱니바퀴의 회전 속도를 통해 광속을 측정했던 것인데, 이전 방식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수치인 셈이다.
이폴리트 피조의 실험을 통해 측정된 빛의 속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이 과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답은 "아니다."이다.
인상주의자들이 주장했듯, 시각은 결국 빛이다.
태양, 형광등, 혹은 조명 등에 의해 발생된 빛은 나를 둘러싼 모든 시각적 사실들(책상, 사람, 바다, 달...)과 부딪혀 반사된 뒤 내 눈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상(像)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시각 정보는 뉴런을 통해 뇌에 전달되고, 시각 피질에서 이를 해석하는 과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최대 200ms의 시간이 소요된다.
놀라운 것은, 빛은 이 시간 동안 무려 60,000km를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빛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사과 표면에 반사되어 나에게 사과의 이미지를 전달하려 열심히 달리는 빛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운이 좋게도 내 눈에 도착했고 무사히 각막에 투과되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각막에 투과되지 못하고 다시 한번 반사된 빛들도 있다.
이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지구를 여행하기로 한다.
아시아, 중동, 유럽, 대서양을 건너 북미까지.
세계일주를 하고 왔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사과를 인식하는 중이다.
빛이 보여주고자 했던 '있는 그대로의 시각적 사실'이 빛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시각은 불완전하다.
손가락 하나를 빠르게 흔들면 손가락은 2개로 보이기도 하고, 1초에 사진을 24장만 보여주면 이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시각이 때로는 우리를 착각에 빠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볼 수 없다던 150년 전 인상주의자들, 그들이 옳았다.
한 순간의 인상.
우리는 인상을 인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