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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능 May 19. 2024

그들이 '인상파'라 불리는 이유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

"7시 35분?"
아내가 말했다.


"응. 무슨 사주 보는 거 같지? 도널드 올슨이라고 천문학자 중에 명화 속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내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 있어. 그 천문학자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 속 태양과 그림자의 각도, 항구의 배치도 등을 분석해서 나온 결론이래."

"대박."

"정확히는 1872년 11월 13일 아침 7시 35분경에 모네가 르아브르 항구 옆 라미라우테 호텔에서 본 광경이라고 하더라."

"디테일이 장난 아닌데? 과학이 정말 대단하긴 하다."

" 천문학자를 흥미롭게 만들고 분석하게 만든 모네가 더 대단한 게 아닐까?"

"둘 다 대단하지. 근확실 정확한 시점을 알고 보니 어딘가 더 아련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그치? 같은 공간에 서서 거장들이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대화를 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몽마르뜨 언덕의 예술가들 (출처 이과생 아내)

"파리는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더 낭만적인 거 같아. 여기 몽마르뜨도 원래 예술가들의 마을이었다는데?"

"월세와 생활비가 저렴해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대. 모네나 르누아르 등 여러 인상파 화가들부터 소설가, 음악가들의 활동지였어."

"분위기가 너무 좋다!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화가들이라니."

"정말 낭만이 넘치는 도시지. 자기 근데 그거 알아?"

"뭐?"

"이렇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사실 얼마 안 된 일이야."

"엥? 언제부턴데?"

"딱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19세기 중반부터야. 그전엔 대부분 화실 안에서만 작업을 했었어."

"그래? 그럼 이전 풍경화들은 어떻게 그린거지?"


왼쪽 방광을 이용한 물감통 / 오른쪽 튜브 물감


"이전에 풍경화를 그릴 때는 스케치정도만 야외에서 하고 화실 안에서 채색 작업을 했었어. 야외에서 색칠하기가 힘들었거든."

"어째서?"

"우리가 흔히 쓰는 튜브 물감이라는 게 없었어. 정 야외 작업이 필요하면 동물들의 방광에 물감을 넣어서 다녔는데 이게 한 번 개봉하면 다시 닫을 수가 없어서 물감이 말라버리고 이동 중에 새어 나오기도 해서 야외작업이 되게 힘들었.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튜브 물감이 미술사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발명품이었어. "

"물감은 너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는데 인상주의에 영향을 줬다니 신기하네."

"꽤 많은 영향을 줬을 거야. 이전의 같은 작업 방식은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서 찰나의 인상을 담기에는 무리가 있었거든. 그리고 산업 혁명 덕분에 튜브 물감이 금세 대량생산되면서 물감의 가격도 떨어졌대. 덕분에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지."

" 원래는 그림이 취미의 영역이 아니었구나."

"치. 그리고 당시에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기차라는 이동수단이 생겨났거든. 사람들이 장거리 여행도 할 수 있게 지. 당시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뭘 했을 것 같아?"

"여행하면 사진이긴 한데...당시엔 사진이 없었던 거지?"

"지금처럼 쉽게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지. 자기 말처럼 우리가 여행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추억을 남기고자 했었어. 그중 몇몇 사람들은 그림을 그렸고 내 생각엔 이렇게 취미로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은 분명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거야."

"이상한 점?"

"막상 야외에 나가서 그림을 그려보니 마네의 말처럼 아카데미 회화론이 잘못되었다는 거지."

"마네가 주장했던 게 뭐였지?"

"화실 안에서의 빛과 야외의 빛이 다르다는 것."



미술 역사상 하나의 단일 작품으로 가장 많이 비난받은 사람이 누구일까?

주인공은 아마도 1863년 낙선전에서의 에두아르 마네일 것이다.

그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비난했던 것은 아니다.

화실 안에서의 빛과 야외의 빛이 다르다는 마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젊은 화가들이 있었다.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드가, 피사로와 같은 화가들이다.

마네의 작품 앞에선 이들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그렇게 이들은 마네를 찾아갔고, <올랭피아>로 온갖 조롱을 받던 마네는 자신을 찾아온 후배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Cafe Guerbois> Edouard Manet (출처 common.wikimedia.org)

이들은 마네의 화실과 근처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 카페 드 바드와 같은 장소에서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거나 마네의 지도를 받곤 했으며, 아카데믹 화풍과 대척점에 서있던 그들은 이때만 해도 인상주의자가 아닌 자연주의자, 사실주의자, 마네파 혹은 그들이 모임을 갖던 동네의 이름을 따서 '바티뇰(Batignolles)' 그룹이라 불렸다.


그렇게 화가들이 한 두 명씩 모이며 인상주의는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70년대에 들어서자 바티뇰 그룹의 후배 화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바로 독립적인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그들은 인상을 담아내고자 했던 자신들의 화풍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지도자 역할을 했던 마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살롱전이라는 믿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 화가들은 이번만큼은 마네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마네의 바람에 따라 수년 동안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여전히 거절당하는 일이 많았고 이는 곧 생계와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제1회 인상파 전시회 카탈로그 (출처 en.wikipedia.org)


그렇게 1874년 30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전시를 열었다.

현재 우리에게 첫 인상파 전시라고 알려지게 된 <Société anonyme des Artistes Peintres, Sculpteurs, Graveurs>이다.

이를 번역하자면 <무명예술가협회전>이라는 뜻인데, 언뜻 보기에도 첫 인상파 전시회에 왜 이러한 이름을 썼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전시회명을 사용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사실 이들이 독립적인 전시회를 원했던 것은 1860년대 후반부터이다.

자금이 부족한 탓에 바로 전시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모네, 바질, 드가와 같은 바티뇰 그룹의 화가들은 훗날 자신들의 전시회에 '자연주의'나 '사실주의'와 같은 이름을 사용해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막상 전시회를 개막할 시기가 되자 화가들은 한편으론 그들의 이름을 쓰기 부담스러워했다.

그들이 수년간 살롱전에서 계속해서 실패하며 결국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격인 마네 조차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바티뇰 그룹의 다른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바티뇰 그룹의 이름을 걸고 전시를 여는 것은 화가로서 성공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과 부합하지 않았다.

대중들에게 또 하나의 낙선전과 같은 인식을 주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찾은 방안은 두 가지였다.

바티뇰 그룹 외부에서 예술가를 섭외하여 같이 전시를 하는 것, 그리고 그 해 살롱전이 시작되기 전에 전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각가, 판화가 등 여러 예술가를 섭외해서 <무명예술가협회전>이라는 광범위한 이름을 사용했고, 살롱전이 시작되기 전, 즉 시기적으로 낙선전이 열릴 수 없는 시점을 선택해 낙선전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고자 했다.


마침내 첫 전시회를 열게 된 바티뇰 그룹 화가들은 말 그대로 혼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들의 전시회는 겨우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살롱전에 4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한 것과 대조적으로 <무명예술가협회전은> 2주 동안 고작 3,500여 명의 관람객을 동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대중들이 그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역사화나 종교화에 익숙하던 대중들에게 이들의 그림은 여전히 '완성도가 떨어지며 내용도 없는 그림일 뿐이었다.


 <발레리나> 르누아르,1874  (출처 en.wikipedia.org)


미술 평론가였던 루이 르루아가 <르 샤리바리>라는 잡지에 쓴 글을 보면 당시 상황이 현장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먼저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르누아르의 <발레리나> 앞에서 놀라며 말했다.


“불쌍한 친구로구먼.
도대체 색채에 대해 뭘 알기나 하는 건가?
데생은 왜 이따위야.
발레리나의 다리 좀 보게나.
발레 스커트만큼 투박하게 표현되었어.”

 <카푸친 대로> 모네,1873 (출처 en.wikiledia.org)

이어서 그는 모네의 <카푸친 대로> 앞에 서서 더욱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정말 꼴불견이구먼!
혓바닥으로 핥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새까만 점들이 거리의 사람들이라고?
내가 카푸친 거리를 걸어갈 때면 저렇게 보인다는 말인가?
설마 나를 놀리는 건 아니겠지?”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1873 (출처 en.wikipedia.org)

분개한 그가 마지막으로 폭발했던 것은 98번 작품, 모네의 <인상, 해돋이>이었다.


“이것 좀 보게, 이것 좀 봐! 도대체 무얼 그린 겐가? 카탈로그 좀 봐주게.”

“<인상, 해돋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상이라. 나도 진작 알고 있었네. 사실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거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무언가 인상이 깃들여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시키고 있었네. 그나저나 참 제멋대로구먼, 정말 설렁설렁 그렸어. 건성건성 그림을 그려 넣은 도배지도 이 바다 풍경화보다는 완성도가 훨씬 더 높겠어.”


루이 르루아는 분노감을 식히지도 않은 채 그날 겪은 일을 써내려갔다.

'인상주의 화가 전시회'.

그가 썼던 기사문의 제목이다.




"기사 제목을 참 잘 뽑으셨네. 이게 인상주의의 어원인거지?"
아내가 말했다.


"응. 순간의 인상을 담는 게 무슨 그림이냐고 비판을 했던 건데 이게 인상주의의 특징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는 말이다 보니 그렇게 부르게 된 거야."

"잘 이해가 안 가는 게... 이게 그렇게 화까지 낼 일인 건가? 그냥 그림을 누가 어떻게 그리던 자유잖아."

"웬만하면 자애롭게 봐줄 수도 있었겠지만 관점의 차이가 너무 컸던 거지. 당시 프랑스 아카데미에서는 사람이면 사람, 사물이면 사물 모두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공식이 있었거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본질 내지는 개념을 바라봤던 거지. 근데 인상파 화가들은 본질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니었어.

"인상을 그린 거다?"


<The public garden at Pontoise> Camille Pissarro,1874 (출처 en.wikipedia.org)


"맞아. 우리가 보는 세상은 빛일 뿐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지. 피사로의 <퐁투아즈 정원>도 절대 정원에 있던 사람이나 나무라는 개별적 대상을 캔버스에 담으려고 했던 게 아니야. 정원과 화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빛에 의한 시각적 작용이 핵심인거지. 결국엔 "얼마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가?"를 두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던 거야."

"되게 복잡하네."

"모네가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나무, 집, 들판 등 눈앞에 있는 사물이 무엇인지 잊어버려라." 그 대상의 본질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지."

"그게 되게 어려운 일인 거 같아. 사과를 눈앞에 두고 사과라는 인식을 버리고 바라보라니."

"맞아. 지금도 어렵지만 19세기 사람들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야. 고대부터 철학자들이 절대적 진리와 본질을 계속해서 강조했었으니까. 헷갈릴 때는 미술사 내에서 생각해 봐도 괜찮아.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피사로의 그림을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게 보여주면 뭐라고 할 것 같아?"

"글쎄?"

"아마 5살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냐고 물어볼 거야. 내 눈에는 세상이 이렇게 안 보인다고 할 수도 있고 이런 장면이나 그리는 게 무슨 화가냐고 할지도 모르지."

"아무리 거장이라도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거구나."

"맞아.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인상주의가 맞고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어.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가 바뀌어가는 과정인거지."

"음... 이제 좀 알 것 같다. 근데 시대가 바뀌는 건 그렇다 치는데 무슨 계기로 빛과 인상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건지? 신기하네."

"물론 우연은 아니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게 있어."

"뭔데?"


<1870년 이전 마네> Paul Nadar (출처 en.wikipedia.org)


"어떤 것 같아? 기가 막히지 않아?"

"이게 왜?"

"이건 '사진'이거든."

"아 이때 카메라가 처음 생긴 건가?"

"맞아. 인상파 화가들이 그토록 좇던 빛을 기똥차게 잘 그리는 친구가 등장한 거야.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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