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능 Mar 31. 2024

혁명의 시작과 끝에 서있던 남자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등장인물만 200명이 넘는다고?"
아내가 말했다.


"응. 거의 3년간 그린 작품이야."

"화가가 누군데? 엄청 힘들었을 것 같다."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야. 기존의 고전주의가 조화와 균형미,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신고전주의는 역사적 사실과 이념을 위해 존재했던 미술이거든. <나폴레옹 대관식>을 보면 아름다운 느낌은 아니지 않아?"

"그러게.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다들 한 곳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나폴레옹이 더 대단해 보이는 느낌?"

"딱 그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거야."

"아름다움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대를 담으려는 목적의 그림이다. 이 뜻이구나."

"맞아. 그래서 신고전주의가 순수예술과 가장 거리가 먼 미술사조이기도 해. 한눈에 봐도 나폴레옹의 권위를 위한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일단 작품이 엄청 커서 압도되는 것 같아. 저 왕관을 들고 있는 게 나폴레옹이지?"


자크 루이 다비드 스케치. 나폴레옹이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있다.

"맞아. 원래 대관식에서는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왕관을 가로채서 직접 들어서 썼대. 정말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지. 다비드도 처음엔 그런 모습을 그렸는데 교회 측에서 엄청나게 항의를 해서 수정된 거야."

"그래서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는 모습인 거구나."

"응. 어찌저찌 그림이 수정되긴 했지만 이쯤 되면 사실상 종교와 권력이 분리된 거지. 뒤에 성직자들을 보면 들러리처럼 보이지?"

"들러리를 넘어서 뭔가 침울해 보이네."


왼쪽 <율리우스 카이사르> 두상 / 오른쪽 <나폴레옹 대관식>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럴 만도 해. 보통 교황이 있던 로마에서 대관식을 했었거든. 근데 나폴레옹은 교황을 베르사유 궁전까지 불러냈지."

"정말 패기가 엄청나네."

"또 재미있는 게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도 그려져 있어. 참석을 안 했다기보단 할 수 없었던 사람."

"누구?"

"나폴레옹 바로 옆 쪽에 보면 1,800년 전 사람이 그려져 있어. 로마 황제정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

"율리우스 카이사르? 뜬금없이 왜?"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공화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든.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에 정통성이 부족했던 거지. 그래서 황제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그림에 집어넣은 거야."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람이 아니었어?"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트 가문은 원래 이탈리아 계통이야. 그가 태어난 코르시카도 이탈리아의 영향 아래 있었던 시골이라고 보면 돼."

"이건 처음 알았네."

"재미있는 건 나폴레옹이 1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이탈리아 사람이었다는 거야.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직전에 이탈리아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코르시카 공화국이 생긴 거거든. 그 뒤로 프랑스가 쳐들어왔고 이때 보나파르트 가문이 프랑스 쪽으로 전향해 버린 거지."


"이민자 신분이었구나. 근데 어떻게 황제 자리까지 오르게 된 거지?"
 


18세기에 들어서며 프랑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호화스러운 로코코 문화에 흠뻑 젖어 있을 무렵 라이벌 관계였던 영국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왼쪽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1776), 오른쪽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 (출처 wikipedia.org)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완성시킨 것,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만들어 영국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기틀을 마련된 것이다.

반면 당시 프랑스의 주된 산업은 여전히 농업이었다.

그들의 철강 산업, 석탄 산업은 경쟁력이 없는 수준이었으며 더욱이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부터 이어진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기회를 포착한 곳은 의외로 대서양 너머의 땅 미국이었다.

증기기관과 국부론이 탄생했던 1776년,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영국과 전면전에 들어선 것이다.

이에 프랑스는 막대한 돈을 들여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결국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어느 정도 영국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Oath of the Horatii> Jacques Louis David,1786 (출처 wikipedia.org)

어마어마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평민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많은 부를 쥐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세금을 내지 않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대중들의 불만을 사그라뜨리고 지지를 얻고자 위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의뢰했다.

왼쪽의 호라티우스 형제들이 로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듯 대중들에게 희생의 메시지를 던지며 국고를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알바롱가 사이의 전쟁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인접해 있던 두 도시 국가는 지속적으로 분쟁과 불화를 겪고 있었는데, 그들은 대규모 전면전을 하는 대신 각 도시의 대표자를 세 명씩 뽑아 대결을 한 뒤 전쟁을 끝내기로 했었다.

이때 로마의 대표자가 위 작품에 등장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 알바롱가의 대표자가 쿠리아티 삼형제였다.

대결의 승자호라티우스 형제들었다.

그들은 로마에 승리를 안겨주었고 이들 가문은 로마 시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는 이유는 사건의 내막에 비극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호라티우스 가문과 쿠리아티 가문은 사돈지간이었다.

당시 쿠리아티 가문의 여인이 호라티우스 가문으로 시집온 상태였으며,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여동생은 쿠리아티 가문과 약혼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두 가문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쿠리아티 삼형제는 모두 죽었으며, 호라티우스 삼형제 역시 단 한 사람만이 살아 돌아오게 된다.

호라티우스 삼형제의 여동생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오빠를 보며 로마를 저주했다.

오빠가 돌아왔다는 것이 자신의 약혼자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오빠가 여동생 마저 처단해 버리면서 이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작품을 의뢰받은 다비드는 로마 시대 전설의 본질과 루이 16세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고민했다.

이윽고 그는 위 그림과 같이 전투 장면이나 승리와 축복의 장면이 아닌 '맹세의 장면'을 선택했다.

결의에 찬 자세로 전투에 임할 준비를 하는 아들들, 하늘을 보며 신을 원망하는 아버지, 가혹한 운명에 슬퍼하는 여인들.

다비드는 로마의 전설을 하나의 순간으로 압축하고 대중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작품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는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연하게도 루이 16세 또한 작품을 보고 매우 흡족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심은 루이 16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들이 작품을 보며 희생을 떠올리길 바랐지만, 대중들이 떠올린 것은 국가를 위한 맹세가 아니었다.

용맹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모습에서 그들이 본 것은 혁명을 꿈꾸는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이래서 혁명이 일어난 거구나."
아내가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에 여러 배경이 있지만 사실 프랑스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들과 별 상관없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국인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세금을 쓴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을 거야."

"정작 프랑스는 아직도 봉건사회였던 거잖아?"

"맞아. 그리고 평민들에게는 이런 이념들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을텐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2년 동안 흉작이 들었대. 버티다 못한 농민들이 토지를 귀족한테 넘기고 스스로 소작농이 되기도 했던 거지."

"세금 징수가 제대로 안 됐겠네?"

"결국 루이 16세가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해. 제1신분이었던 성직자, 제2신분이었던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이었던 부르주아와 평민들을 모아놓고 세금 어떻게 낼지 대책을 세우라는 거였지. 웃긴 건 각 신분의 대표자, 즉 3명이서 표결을 하다 보니 2:1로 평민들이 불리했다는 거야. 성직자와 귀족들이 세금 못 내겠다고 버틴 거지."

"사람 수는 압도적으로 제3 신분이 많지 않아?"

"성직자와 귀족은 다 합쳐도 인구의 2%도 안 됐었어. 그러니까 제3 신분들이 전체 투표로 해서 다수결로 하자고 하며 국민의회라는 걸 만들어. 그리고는 이걸 가지고 엄청 싸웠지."

"민주주의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네."

"응. 이걸 보고 있던 루이 16세가 화를 엄청 내. 세금을 어떻게 낼지나 고민하자고 모아놨더니 희생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싸우고만 있었으니까. 결국 국민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회의당을 폐쇄해 버리지."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 이런 거구나."

"그치.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루이 16세는 이때 화를 좀 참았어야 했어."


<Le Serment du Jeu de paume> Jacques Louis David, 1790~4 (출처 wikipedia.org)


루이 16세가 해산을 명령한 뒤 회의당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근처에 있던 테니스 코트에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루이 16세가 하는 수 없이 군대를 동원하며 이들을 진압했는데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를 계기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으며 위 그림의 테니스 코트 서약은 프랑스 대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위 작품 또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이다.

그는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혁명이 발발하던 순간을 묘사하고자 했다.

<테니스 코트 서약>은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징 또한 잘 보여준다.

작품을 뜯어보면 고전주의가 지닌 치밀한 구성과 구도, 그리고 바로크 미술의 짙은 명암 대비를 통해 사건을 강조하는 미적 장치들이 녹아있다.

하지만 정작 다비드는 아름다움을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혁명의 지지자였으며, 다비드는 테니스 코트 서약 당시 눈앞에 펼쳐졌던 '단결력'을 역사에 남기고자 작품을 그렸다.


이 당시 단결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그리고 평민들이 한 곳에 모여 같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은 혁명을 지지하며 불합리한 조세 체계, 극심한 빈부격차, 부패한 왕권과 계급사회 등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La Prise de la Bastille> Jean-Pierre Houël, 1789 (출처 en.wikipedia.org)

그리고 이때부터 민중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봉기했고 약 2주 뒤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켰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789년 8월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문'을 공표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울 권리가 있고 모두 평등하다는 이념아래 마침내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루이 16세가 끝내 항복했다.



"여기서 자유, 평등, 우애가 나오는 거구나."
아내가 말했다.


프랑스 국기

"맞아. 프랑스 혁명의 핵심적인 이념들이지. 현재 프랑스 삼색기의 의미이기도 하고."

"근데 어쩌다가 나폴레옹이 나와서 다시 황제정이 된 거야? 민주주의 체제로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프랑스 시민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루이 16세가 물러나고 나서 상황이 좀 복잡했어."

"왜?"

"아무도 혁명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 일단 혁명에 성공하긴 했는데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거야. 그래서 급진적 성격의 자코뱅파, 그리고 온건적 성격의 지롱드파로 혁명가들이 나뉘어서 대립하기 시작했어."

"자기들끼리 다시 싸우기 시작한 거구나. 누가 이기는데?"

"처음엔 팽팽했는데 결국엔 급진파였던 자코뱅파가 이기게 돼. 결정적 사건이 있었거든."

"결정적 사건?"


<Return from Varennes – Louis XVI's arrival in Paris> Jean Duplessis Bertaux, 1791(출처 wikipedia.org)

"당시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니까 주변국들이 혁명을 막겠다고 프랑스로 쳐들어오고 있었거든. 혁명의 물결이 퍼져서 자기네 나라도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때 루이 16세가 프랑스를 탈출하려고 시도해. 왕이 국가를 버리고 도망갔는데 결국 잡혀버리지. 그러다 보니 군주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했던 급진파가 힘을 얻게 된 거야."

"그래서 결국 단두대로 간 거구나."


<Louis XVI  at the foot of the scaffold> Charles Benazech (출처 wikipedia.org)

"맞아. 루이 16세가 다시 파리로 잡혀오고 나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전 금고에서 그가 주변국과 혁명을 진압하자고 합의했던 문서가 발견돼. 이 지경이 되었으니 초기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절충과 타협을 얘기하던 지롱드 파가 타격을 입게 되지. 당시 급진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라는 말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어. 결국 왕과 왕비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자코뱅파들의 세상이 왔지."

"되게 울림이 있는 말이네. 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라니."

"멋있는 말이지. 근데 로베스피에르는 결정적으로 정치를 못했어. 자기 말에 조금만 반대해도 단두대로 보내버리며 공포정치를 일삼았고 최고가격제를 실시하며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거든."

"최고 가격제는 뭐야?"

"상품의 가격에 상한을 두는 거야. 혁명에 성공했다지만 대중들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나아진 건 없었거든. 로베스피에르는 상품의 가격을 강제하는 게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게 가능한가?"

"처음에는 잘 되는 것처럼 보였지. 우유 가격이 하루아침에 1,000원에서 500원으로 떨어졌으니 좋잖아? 근데 이게 지속가능하지가 않았어. 낙농업자들이 사료값도 안 나오는 가격에 우유를 팔아야 되니 소를 그냥 도축해서 고기로 팔아버린 거야. 결국 소가 없어지니 우유 공급에 문제가 생겼고 우유 가격이 미친 듯이 솟아오른 거지."

"프랑스에는 아담 스미스가 없었던 거네."

"그런 셈이지. 결국 시민들이 혁명에 대한 반감을 가지기 시작하게 돼. 살기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경제적으로도 더 힘들어졌으니까. 그리고 서서히 시골 촌뜨기였던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시작하지."




코르시카 지역 (출처 구글맵)

사실 프랑스 대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나폴레옹은 자신의 고향인 코르시카 지역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사관학교 시절 나폴레옹이 괴롭힘을 당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상류층의 자제들이 모여있던 사관학교에서 촌동네 출신에 이상한 사투리를 쓰는 나폴레옹은 이들과 어울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휴직 후 코르시카로 돌아왔다.

프랑스가 어수선한 사이에 과거 코르시카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파스콸레 파올리와 함께 코르시카를 독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다.

코르시카를 독립시킨 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코뱅파의 급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반면 파올리는 군주제를 주장하는 왕당파였다.

파올리는 결국 나폴레옹 가문이 과거에 프랑스로 전향했던 것을 빌미로 나폴레옹을 반역자로 몰아 구금하고 재산을 몰수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이 사건 이후였다.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 코르시카를 탈출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1792년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그는 프랑스의 니스 지역의 정규군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년 뒤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툴롱 포위전 (출처 나무위키)

나폴레옹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툴롱 전투였다.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주변국들반혁명 연합군을 결성해 프랑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영국과 스페인 군대의 지원을 받던 왕당파 반군을 툴롱 지역에서 몰아내며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공화정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에게도 강력한 인상을 남겼으며 나폴레옹은 24살의 나이에 포병 대위에서 준장으로 특진하게 된다.


<The death of Marat> 자크 루이 다비드, 1793

나폴레옹이 공화국의 군인으로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던 당시 민중들의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점점 더 강도 높은 공포 정치를 휘두르고 있었으며, 물가 역시 하늘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혁명은 점점 더 과격해져 갔고 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파의 공화정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자코뱅파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마라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로베스피에르, 마라와 함께 자코뱅파의 일원이었던 다비드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위 작품을 남겼다.


작품은 욕조에서 업무를 보던 마라가 욕조 아래 떨어진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혁명주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감옥에 가둬놓고 숙청했던 9월 학살 사건 이후 충격을 받은 지롱드 파의 여인 샤를로트 코르데가 피부병으로 인해 욕조에서 일을 하던 마라에게 접근한 후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작품에서 마라의 모습은 마치 순교자와 같이 묘사되었는데, 이를 통해 자코뱅파의 권력이 위태로웠던 이 시점에도 다비드가 열성적인 당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1년 뒤인 1794년 지롱드파와 부르주아 계층을 필두로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

자코뱅파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고 자코뱅파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말 다비드의 작품 속에 프랑스 혁명이 전부 녹아있네."
아내가 말했다.


"그 부분이 되게 미스터리 하긴 해."

"어떤 부분이?"

"다비드는 루이 16세 시절에도 잘 나가던 화가였어. 혁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데 갑자기 등을 돌려 급진파의 핵심 인물이 되는 것은 다비드 입장에선 엄청난 리스크였다는 얘기지.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다비드를 곁에 두는 게 찜찜했을 수도 있을 거야."

"그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는 거겠지?"

"물론 대단한 화가였지. 다비드 자체가 신고전주의 미술의 상징이기도 하고 이후의 미술사조도 그의 제자들이 이끌어나갔거든. 흥미로운 건 로베스피에르 이후에 나폴레옹, 그리고 루이 18세까지도 다비드를 원했다는 거야. 정치 체제가 극변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거지."

"나폴레옹은 어쩌다 다비드와 인연이 된 거야?"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자크 루이 다비드, 1799 (출처 en.wikipedia.org)

"나폴레옹이 다비드를 다시 불러오게 된 계기가 있어. 그가 1799년에 쿠데타에 성공하며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작품을 보고 엄청 감명받았다고 하더라고."

"작품은 이제 전쟁을 그만하자는 의미인 것 같은데?"

"맞아. 급진파였던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 처형 이후에 감옥에 가게 돼. 그리고 가치관이 많이 변한 거지. 아마 후회도 많이 했을 거야. 혁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다 보니 신물이 났고 더 이상의 분열이나 갈등을 그만하자고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거지."

"진짜 작품 제목을 안 봐도 뭘 말하고 싶은 지 바로 느껴진다."

"그치? 다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 화가로서 살아있는 권력에 붙게 . 그리고 자기도 많이 봤을 법한 유명한 그림을 그리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작품이야."

왼쪽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1801 / 오른쪽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폴 들라로슈, 1850 (출처 wikipedia.org)

"교과서에서 봤던 그림 같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갔을 때 오스트리아 군이 이탈리아에 있던 프랑스군을 공격했었어. 그래서 나폴레옹이 원정에서 돌아온 후 오스트리아 군을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고 있을 때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야."

"거의 온 우주를 정복한 것 같은 느낌인데?"

"재미있는 건 50년 뒤에 다비드의 그림이 사실적이지 못하다며 폴 들라로슈라는 화가가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는 거야.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엄청 차이가 나지?"

"왜 통치자들이 다비드를 원했는지 알 것 같다."

"그치? 나폴레옹은 이 그림도 엄청 마음에 들어 했어. 다비드를 불러서 똑같은 작품을 더 그리게 했지."

"그럴 만도 하네. 작품을 보면서 영웅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도 영웅이었어. 위기에 빠졌던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다시 복원했으니까."

"그리고 황제가 된 거구나."



<나폴레옹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1806 (출처 wikipedia.org)


자크 루이 다비드는 말 그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과 끝에 서있던 남자였다.

그는 루이 16세의 왕정, 로베스피에르의 공화정, 나폴레옹의 황제정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격변의 시기를 살아가며 그가 겪었던 모든 것을 그림으로 남겼다.

사실 화가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다비드에게 위 작품 <나폴레옹 대관식>은 개탄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테니스 코트 서약에서 보았던 그 단결력과 자코뱅파 시절 혁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지를 불태웠던 시절들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손으로 왕관을 쓰던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이 다비드를 찾아왔다고 한다.

한 시간가량 위 작품을 감상하던 나폴레옹이 마지막에 다비드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 유럽을 정복하러 떠났다.



이전 15화 연극이 끝난 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