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래 봬도 물 건너온 머그야!”
내가 뚝배기 받침보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이 집에 온 건 내가 먼저야. 그러니까 가은 엄마가 결혼하기도 전이야. 내 고향은 코펜하겐이야. 코펜하겐이 덴마크 수도라는 건 알고 있지? 난 거기에서 왔어. 가은 엄마가 코펜하겐에 왔을 때 날 데리고 왔지. 처음 가은 엄마가 날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할 때 난 내가 선택되리라는 걸 알았어. 가은 엄마 눈빛이 달라졌고 두근대는 심장소리도 살짝 들려왔거든. 그런데 문제는 내가 너무 비싸다는 거였어. 다른 사람들 선물을 사느라 돈도 없는데 40유로나 되는 날 산다는 게 좀 망설여졌나 봐. 그런데 가은 엄마는 날 가졌어. 다른 사람 선물이 아닌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말이야.
내 몸은 약간 푸른빛이 도는 흰색인데 덴마크의 유명한 건물들이 잔뜩 그려져 있어. 한마디로 내 몸을 보면 코펜하겐 전체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가은 엄마가 공모전에서 상을 받으면서 부상으로 여기 한스 안데르센 생가가 있는 덴마크에 오게 됐거든. 가은 엄마가 작가인 건 알고 있지? 그래서 한 때 난 진열장에 상패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아주 잘 나갈 줄 알았지. 그런데 정말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니까. 가은 엄마가 결혼이란 걸 하면서 난 가은 엄마 작업실에서 옮겨 신혼집에 왔어. 아기를 둘이나 낳고 그 아이들이 크면서 내 자리는 점점 바뀌어갔어. 아이들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이고 내 몸에 볼펜 똥이 묻고 색연필 때문에 더러워져도 가은 엄마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된 어느 날이었어. 원래 청소를 좋아하는 가은 아빠 따라 가은 엄마가 억지 청소를 하고 있었어.
“이거 안이 엄청 더러운데 버릴까?”
가은 아빠가 내 속을 가은 엄마한테 보여줬어. 가은이 난장판 책상 서랍 정리를 하다가 가은 엄마가 날 쳐다봤어.
“안 돼.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
가은 엄마가 날 데리고 가더니 한참을 봤어. 날 보면서 시간 여행을 잠시 다녀온 것 같더라고. 분명 행복한 기억일 텐데 왜 저렇게 얼굴이 죽을상인지 난 이해가 안 됐어.
“닦으면 돼. 그리고 내가 당신 모범사원 상패 갖다 버리 자고 하면 버릴 거야?”
가은 아빠는 아무 말도 못 했어. 사실 날 버린다는 건 너무하잖아. 아무리 볼펜 똥이 묻고 색연필로 더러워져도 난 이래 봬도 코펜하겐 머그잖아. 가은 엄마가 날 정성스럽게 닦아주었어. 쓱싹쓱싹 닦으니까 야호! 원래 멋스러운 내 모습을 찾게 된 거야. 그때 가은 아빠가 아이들을 불렀어.
“가은아. 나은아. 잠깐 나와 봐.”
두 아이는 게임 중이었나 봐. 휴대폰을 손에 들고 나오더라고. 무슨 일인지 후딱 해치우고 들어가서 다시 게임을 하겠다는 계획이겠지?
“여기 엄마 컵에 붙은 스티커 다 떼. 누가 엄마 소중한 컵에 스티커를 붙였어?”
“난 아니야.”
“나도.”
“둘 다 안 붙였으면 귀신이 붙였겠네.”
귀신이라는 소리에 가은이는 정말 귀신을 본 것처럼 무서워했어. 정말 가은이는 누굴 닮았는지 겁이 많아.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언니가 붙였잖아. 내가 봤거든.”
하고 나은이는 이제 난 볼 일이 없다는 듯 방으로 다시 들어갔어. 그러자 가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가져가서 내 몸에 붙은 스티커를 떼는데 한 손은 휴대폰을 들고 한 손에는 나를 들고 정말 불안해서 못 있겠더라. 날 떨어뜨릴 것만 같았거든. 그때 가은 엄마가 날 구해줬어.
“됐어. 안 떼도 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가은이가 들어간 방문이 닫혔다고 하면 내가 너무 오버한 걸까? 방문이 닫히고 가은 엄마는 날 주방으로 가져왔어. 날 어디에다 놓을까 생각하다 찬장에 놓더라고. 사실 하나 말해줄까? 난 머그컵이지만 한 번도 머그컵으로 쓰이지는 않았어. 물도 한 번 안 따라 마셨다니까. 그래서 난 이제 내가 뭐로 쓰일까 궁금했어. 그런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처음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어. 다른 식기들과는 달랐지. 그런데 어느 날 내 몸에 하나씩 들어오는 게 있었어. 그 면을 먹을 때 쓰는 나무젓가락 있잖아? 그게 내 몸에 들어오더라고. 그런데 하나같이 나무젓가락이 다 거꾸로 들어왔어. 설거지를 한 나무젓가락 수분을 거꾸로 꽂아 말리는 거야. 난 내가 이렇게 다시 태어날진 몰랐어. 정말 울고 싶더라. 지금도 난 아주 잠깐 찬장이 열릴 때만 빛을 보고 늘 어두운 곳에 있어. 내가 이렇게 어두운 곳에 있으면 나의 빛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난 그게 두려워. 오늘도 내 마음만큼이나 어두운 이곳에서 할 일도 없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가은 엄마 전화 벨소리가 들려왔어.
네 언니. ……글이요? ……안 써요. ……너무 안 되니까 ……전혀 안 쓰고 지냈어요. ……합평 공부방에요? ……제가요? …… 꼭 쓰고 싶은 게 있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