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스팽글 필통

by 김진영

“휴! 너무 외롭다. 외로워!


내 안에 든 게 없어서일까? 원래 안에 든 게 없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남 앞에 가서도 당당하지 못하다고 하잖아. 다른 애들 것 보면 별별 것이 다 들어있건만 내 안에 든 건 딱 하나뿐이야. 바로 연필 한 자루지. 그마저도 심이 부러진 연필 딱 한 자루. 아, 또 있긴 있다. 부러진 연필심과 지우개 가루 조금.

그래도 난 기죽지 않아. 안에 든 게 없어도 겉모습은 정말 화려하거든. 아이들이 열광한다는 반짝이 스팽글이 잔뜩 달려 있으니까. 손으로 쓸어보면 각양각색의 반짝이 스팽글이 일어나면서 다른 빛깔을 보여주지. 아마도 아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이게 아닐까 해. 눈이 부시게 환상적이라고 할까? 딱 내 겉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인 거 같아. 그나저나 내일은 가은이가 오랜만에 등교 수업을 가는 날인데 정말 이래도 될까 싶어. 내 속이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은이는 정말 콜콜 잘도 잔다. 아이,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김가은!”

가은 엄마 목소리에 난 눈을 크게 떴어. 가은 엄마 목소리가 굵게 나왔거든. 그 말인즉슨 가은이한테 묵직하게 할 말이 있다는 말이야. 가은 엄마가 화를 참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고.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가은아, 이게 뭐니? 공부하는 학생이 필통에 부러진 연필 한 자루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니?”

엄마는 가은이가 볼 수 있게 내 속을 가은이 눈앞에까지 가져가면서 말했어. 가은이는 눈만 깜박깜박하고 있더라고.

“엄마가 얼마 전에 연필 다섯 자루를 연필 깎지까지 다 끼워서 챙겨줬잖아. 다 잃어버린 거야.”

난 무슨 소리인가 했어. 그때가 언제야? 이번 학기 시작했을 때였나? 난 가은 엄마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어. 지금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상태가 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요!

“요즘은 친구들에게 빌리는 것도 안 될 텐데 학교에 가서 도대체 뭘로 쓰려고 한 거니?”

“학교에 연필깎이 있어.”

“정말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무슨 머시마도 아니.”

가은 엄마가 하던 말을 멈췄어. 지금 세상에 머시마, 가시나를 찾으면 꼰대 취급받는다는 걸 알아서겠지. 하고 싶은 말을 필통 지퍼 닫듯 닫은 다음 엄마는 나은이 필통을 열어봤어.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연필 끼우는 칸도 없는 필통인데 신학기 그대로였어. 달라진 게 있다면 연필 길이가 준 정도. 엄마는 나은이가 정리한 연필들이 흐트러질까 봐 조심하며 가방에 다시 넣었다.

“드르득 드드득 드르득.”

한동안 연필깎이 돌아가는 소리가 가은이네 거실에 가득 찼어.


학교에 왔어. 그동안 연필 한 자루만 있어 외로웠던 나에게 다시 연필과 지우개가 채워졌어. 각도기, 자도 함께 들어왔고. 그들은 한동안 잘 지내보자며 인사를 하더라. 난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했지.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어른의 시선이랄까?

“친구들, 수학 67쪽 펴봐요. 오늘은 예각, 직각, 둔각 삼각형에 대해 배울 거예요.”

가은이는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을 쳐다보며 집중하고 있었어.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내 안에 들어있는 지우개를 꺼내더라고. 아직 지우개 쓸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왜일까 궁금했어. 수업이 다 끝나고 알았지. 오늘 아침 엄마가 챙겨준 지우개에 뻥 구멍이 생겼어. 후유 정말 못 말린다니까. 나도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만 정말 가은이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 평상시 가은이가 말할 때는 보통 크기의 목소리야. 그런데 화가 났다거나 체육 시간에 구령을 붙일 때는 목소리가 얼마나 굵게 나오는지 몰라. 그 목소리의 파워를 알아본 선생님은 가은이에게 체육부장을 시켰어. 난 교실에 있어 가은이 구령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평상시 가은이를 잘 알아서일까? 이곳까지 가은이 우렁찬 구령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어.

“하나 둘 셋넷, 다섯여섯 일곱 여덟!”


내가 가은이를 만난 건 2학년 때야. 가은이 생일날 가은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게 바로 나야. 그래서인지 가은이는 지금 4학년인데도 나를 쓰고 있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날 가은이 남자 친구가 날 사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사실은 말이야, 나한테 눈길을 주는 아이는 없었어. 분명 난 화려한 스팽글이 달렸지만 내 전체 몸이 파란색이잖아. 여자아이들이 싫어하는 색이야. 요즘은 안 그런다고 하지만 아직 핑크를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있어도 하늘색도 아닌 파란색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드물어. 파란색이라고 해서 남자아이들 눈에 띄느냐? 그것도 아니었어. 여자아이들만 좋아한다는 스팽글이 잔뜩 붙어 있었으니 날 갖겠다는 남자아이는 없었지. 난 참 원망도 많이 했어. 처음 날 만든 사람을 말이야. 왜 내 피부색을 파란색으로 해서 이렇게 인기가 없게 만들었는지 정말 따지고 싶더라. 나와 함께 진열대에 있었던 피부색이 핑크인 필통은 제일 먼저 떠나갔고 보라, 노랑, 흰색 모두 떠나갔어. 하지만 날 사 가는 아이는 없었어. 그땐 정말 울고 싶더라. 눈물 때문인지 먼지 때문에 내 화려함도 차츰 가려지는 것 같았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날 싸고 있는 비닐에 뿌옇게 먼지가 쌓여갈 때쯤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실실 졸고 있었어. 그때였어. 누군가 날 집어 들어 올렸어. 난 졸다가 대체 무슨 일인가 했지.

“파란색인데 가은이가 좋아할까?”

가은이 남자 친구가 날 건네주자 남자 친구 엄마가 말했어.

“좋아할걸. 가은이는 축구도 잘하고 카드놀이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그럼 이걸로 하자. 마음에 안 들면 바꾸라고 하지 뭐.”

“가은이는 안 바꿀 걸.”

난 그때 내가 누군가의 생일 선물이 된다는 게 무척 기뻤기 때문에 가은이가 어떤 아이일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내가 더는 이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런데 늘 가은이와 함께 하다 보니 가은이에 대해 정말 찐으로 알 수 있게 되더라고. 바로 그날을 난 잊을 수가 없어.

요새는 아이들이 학교도 날마다 못 가고 점심시간과 하교 후에 운동장에 나가서 놀 수도 없지만 불과 이 년 전만 해도 안 그랬어. 아이들은 점심시간과 하교 시간이 되면 그들에게 밥보다 중요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한 놀기 위해 운동장으로 튀어나왔어. 마치 건물은 참고 있다가 토해버리는 것처럼 아이들을 내보냈어. 한 명 한 명이 나오다 나중에는 왈칵왈칵 아이들을 모두 쏟아냈지. 나도 그날 가은이를 따라 나왔어.

“이거 내 전화번호야.”

양 갈래 머리 여자아이가 가은이에게 종이를 내밀었어. 가은이는 얼른 가방에서 날 꺼냈어. 아이들은 꼭 그런 건 필통에 넣어 놓잖아. 그래서 그날 가방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학교 운동장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거야. 가은이는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학교 스탠드에 내팽개치더니 가방 위에 날 올려 놓아주었어. 정말 뻥 뚫린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속이 다 시원하고 깜깜한 가방 속에 있을 때보다 정말 살 것 같더라. 난 이때다 싶어 눈이 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에 맘껏 내 모습을 뽐냈어. 좀 뜨거웠지만 반짝반짝 얼마나 내가 멋있었을지 꼭 보고 싶었어. 그때였어. 가은이가 막 달리기 시작했어. 난 운동장을 그렇게 빨리, 전속력으로, 끝까지 가로질러 달리는 여자아이는 처음 봤어. 누가 보면 뒤에서 엄청 무서운 괴물이 쫓아오는 줄 알았을 거야. 다른 아이들은 다들 놀이 기구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는데 가은이는 계속 달렸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가은아,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물었지만 가은이가 내 목소리를 들을 리 없으니까 대답할 리도 없었지. 그런데 대각선으로 달려 운동장 끝까지 닿더니 마치 내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는 거야. 처음엔 쟤가 왜 저러나 했어. 그런데 막 달려오는 가은이 얼굴에서 느껴지는 게 있더라. 아까 대각선으로 달릴 때는 수학 시간에 남자애가 던진 블록에 맞아 아파했던 가은이의 얼굴이 있었고, 이쪽으로 달려올 때는 뭐든 똑같이 가르치는데 나은이가 더 잘한다는 칭찬하는 어른들 목소리를 듣고 있는 가은이 얼굴이 보이더라고. 그 얼굴을 보니 더는 가은이가 뛰는 걸 못 보겠더라고. 난 눈이 부시다는 핑계로 살짝 눈을 감았어. 그날 다행히 가은이 엄마가 학교로 가은이를 데리러 와서 대각선 달리기는 두 번으로 끝이 났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니, 이거 가은이 필통 아니야? 왜 나와 있는 거지?”

가은이 엄마가 같이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을 의식해서 말했어. 엄마들은 피식 웃기만 했는데 정말 머시마 같은 딸을 키우느라 걱정이 많겠다고 하는 것 같았어. 가은이 엄마가 지퍼를 열어보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안 봐도 내 안이 어떨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나도 연필 자국 천지에 좀 낡았어. 그래도 스팽글은 아직 멀쩡해. 그래서 생각해보니 난 가은이랑 정말 잘 어울리는 필통이라는 생각이 들어. 색깔과 장식까지 모두. 난 말이야. 내 안에 연필이, 그것도 부러진 연필 딱 한 자루만 있다고 해도 가은이를 따라 날마다 학교에 가고 싶어. 다시 한번 가은이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운동장을 맘껏 달리는 모습이 보고 싶거든. 그때는 말이야. 이제 가은이 얼굴에서 다른 게 보인다고 해도 눈을 감지 않을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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