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페나크 의 <소설처럼>
다니엘페나크 의 <소설처럼>은
예전에 마을 분교 아이들과 ‘그림책함께 읽는 ‘모임에서 읽었던 책이다.
그림책 구성원이 바뀌고 또 코로나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면서 '소설처럼'을 또 꺼내 함께 읽기로 했다.
독서를 신성하게 여기며 어떻게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할까? 고민하는 많은 부모, 교사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책읽는 동안 부모나 교사 입장이 되었다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반성 하고 회상하고, 머리가 띵하게 공감하며 읽었다. 페나크의 글은 딱딱한 내용이지만 페나크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같아서 잘 읽히고 잘 받아들여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얻는 기쁨은 풍성한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좋아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도 고모의 넋두리같은 이야기도 재밌고 딴 세상 일같아서 귀기울여 들었다. 또 동네 아줌마가 놀러와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면 슬그머니 옆에 앉아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쫓겨날 때도 많았다. 운이 좋게도 엄마도 가끔 이야기에 빠져 내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짐 못하면 좀 더 오래 엿들을 수 있었다.
한 때 뒷방 셋집에 살던 기수오빠네, 좁은 방 한칸 집에 아침먹고 나면 매일 출근하다시피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집 왼쪽방 뒷문으로 나가면 작은 뒷마당이 있고 그 곳을 가로지르면 기수오빠네가 있다. 방한칸과 부엌하나인 집에 몇명이 모여 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들어가면 아줌마와 언니, 오빠들이 모여 있었다. 모여 앉아서 하는 일은 나무젓가락을 싸는 부업이었다. 부엌에 들어서 왔냐고 반겨주었다. 인사하고 조용히 옆에 앉아 작은 손으로 아줌마가 알려준대로 나무젓가락을 샀다. 그리고 귀를 열고 아줌마와 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점심 먹을 때까지 몇시간이고 나무젓가락을 긴다란 습자지에 돌돌 말고 끝을 꼬아주는 일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영호네가 이사를 갔는 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아줌마가 병이 났고 더는 같이 살수 없고 동네부끄러워서 이사를 갔다느니, 그 아줌마는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그 아저씨는 아줌마에게 그러면 안된다. 시어머니가 반찬 맛없다고 밥상을 뒤집을 만큼 시집살이시키던 사람인데 그런 시어미니 모시고 힘들게 살면서도 동네에 폐끼치는 일없이 살았대. 돌배나무 집 할아버지가 그저께 돌아 가셨고 ,근처 대학 사택에 나비를 연구하는 교수님이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가면 온 벽에 나비가 죽은채로 보관 되어있는데 세상에 그렇게 예쁜 나비가 많은 줄 몰랐다. 이 언니는 언제 거길 가봤지? 궁금했다.
기수 오빠네 집에선 동네방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귀는 열고 손으론 일을 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고, 그 사이 사이를 메꾸듯 맞장구치는 말, 감탄사, 부러움과 고마움, 안타까움 등 수많은 감정의 말에 혼을 빼고 들었던 것 같다. 나의 말을 하기보다 듣는게 더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책읽는 기쁨 또한 책 속의 '이야기'였다.
책 속의 흥미진지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읽은 글을 요약하고 어떤 교훈을 얻었으며 , 이 글의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나요? 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점차 글에서 멀어져 갔던 것 같다.
'소설처럼'을 읽으며 '이야기'에 열광했던 시절과 아이를 키우던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나의 이야기가 없으면 책을 들려주며 보낸 시간이 떠오르면서 행복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페나크는 책 마지막 부분에 독자가 누려야 하는 10가지 권리를 제안한다. 그것이 맞든 틀리든 독서에 매인 불편한 감정이 지워지고 경계를 풀어주었다. 마음껏 읽을 권리를 부여 받은 느낌에 닥치는대로 읽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책읽기는 무상의 행위.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해, 아이가 책을 읽도록 하기위해 내가 할 게 뭔지 그만 생각해. 내가 재밌어 하는 이야기를 아이와 나눠봐.
<소설처럼>에는 책읽기에 관한 멋진 말이 많다.
-책읽는 시간은 언제난 훔친 시간이다. (책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에게) 시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 다시 말해 소설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을 골라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크게 소리내어 읽는 것
- 깨어 있는 독서, 참여한는 독서, 능동적인 독서, 다 좋다. '귀족적인 독자가 되시오' 라는 롤라바르트의 말도 있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게걸스럽게 삼키는 평민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읽으면서 그어놓은 더 많은 밑줄이 있지만 참는다. <소설처럼>의 또 다른 독자를 위해서 .
매주 수요일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책 속 이야기를 삼킨다. 삼킨 이야기밥은 삶을 기운차리게 해 준다. 이야기가 파고든 자리에 또 우리 이야기가 샘 솟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가 암석 덩어리에 관정을 판 것 처럼 샘솟는다.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온다. 꺼내고 나눈다.
지금 여기, 이야기를 주고 받고 공유하며 맞장구치는 관계가 있음에 감사한다. 살면서 더 바랄게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