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있어서 없고 없어서 있다
나에게는 야망이었다
나는 굉장한 야망가이다. 일상의 행복을 염원하고 있다. 내가 이 바람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걸 깨달은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지만, 처음부터 알고있었던 것 같다. 이건 보통 힘든 목표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 뭔가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나의 최대의 야망인 일상의 행복, 그냥 있는데 행복한 상태, 에 대해 그건 목표가 아니다. 그냥 당연한 거다, 뭐 이정도의 가치이면서 가끔 일상의 행복을 돌아봅시다 하면 돌아보고, 그렇게 또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는 마음이 안드는 건 아닌데 그래도 선배언니가 이번에 샀다는 샤넬백만큼 또 그런가 하면 착잡한, 그정도가 아닐까.
나의 야망은 시간이 지나도 이해를 받지 못했다. 나의 노력들은 다 원대한 나의 야망달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왜 일상의 행복에 야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왜 그렇게 까지 난리를 쳐가면서 달성하려하는지, 이해를 받지 못하는데, 나는 그게 또 이해가 잘 안되기도 했다.
마찰계수
나는 2년 전부터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마찰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는 했다. 그냥 넘어가면 넘어갈 수 있는 건데, 왜인지 모르게 나에게만 마찰이 생기는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마찰감. 그것이 나에게는 일상의 행복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평등이 무너졌을 때일수도 있고, 사회적 약자가 곤란할 때일 수도 있으며, 나의 안전에 대한 공격을 받았을 때도 있고, 뭔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봤을 때 나만큼은 아닌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내가 유독 신경이 쓰이고, 불만이 생기며, 아리까리한 그런 상태를 마찰이라고 불렀다.
나에게만 마찰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1도 관심없는 일들에 거품을 물며 이야기를 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이해는 안되지만 본인이 쓰레기라고 생각한다던가, 뭔가 본인들의 기준으로 본인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마찰을 겪고 있는 것들이 보이고는 했다.
마찰계수에 저항하는 야망
마찰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때어난 무늬 같은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소울의 영혼들이 이런 저런 특징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오듯, 각자의 무늬에 따라 좀더 튀어나온부분이 있어서 그런 부분이 세상과 걸리게 되고, 마찰하게 되고, 나와 남이 다른 것을 인지하게 되고, 좀 더 나 다움을 찾기 시작하게 되는 계기 같은 것. 그냥 자기를 찾는 것은 막막할 까봐, 세상에 가지고 내려온 나의 지도의 시작점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은 희안한 마찰점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어서, 나의 경우는 그게 공기처럼 인식되는 일상이어서, 사람들의 공감을 갖기에는 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아무리 굴러서 마모가 된다고 해도 달성이 될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산 같은 것이 었고, 나의 동물적 감각은, 그래도 야망정도의 단어를 붙여야 겨우 표현이 될까 말까한, 그런 꿈 같은 것이 일상이었다.
명상의 끔찍함
명상을 하면 조금 나아진다고 스티브 잡스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가진 바쁜 사람들도 꼭 한다길래, 명상을 배우고 심지어는 가르치기 까지 했다. 그런데 명상이라는 위대한 도구가, 나에게는 별다를 효과가 없었다. 너무 괴롭기까지 했다. 우울한 시간이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좀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나에게 인생은 너무 자극적이다. 민감한 성격의 나로서는, 인생을 살면서 처리해야하는 자극들이 너무 많아, 현재를 살고싶지 않아도 현재의 자극에의한 고통으로 일초일초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지금 현재에 집중하라니, 그걸 안하고 싶어서 말하자면 명상을 하고 싶은건 데, 뭔가 핀트가 안 맞는 그런 괴로움이 증폭되어갔다. 그랬기에 일상의 행복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행복의 종류가 아니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중간 단계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고, 방향이 어딘지도 헷갈리게하여, 목표 달성을 진짜로 믿기 힘들게 한다. 발버둥치는 10년간, 사실은 가능하다고 믿지 않고서 그래도 괴로움에 치즈가 될때까지 발버둥을 쳤었던 것 같다.
나의 인생의 목표를 갖고 태어난 사람에게
일상의 행복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인생을 통해 얻어가는, 어쩌면 영원히 그사람들의 경지 만큼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상을 그냥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그 행복을 바로 캐치할 수있다. 내가 그리는 꿈이기에, 작은 힌트로도, 그사람이 갖고 태어난 부분, 지금 가지고 있는 부분, 조금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부분들이 노력을 하지않아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일상의 행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갖고 있는데 볼 수없으니 참 재미있다. 나는 볼 수 있으나 가질 수없고, 그들은 갖고 있으나 볼 수 없다.
나는 갖고 있지 않으나 볼 수 있어서 알게되고 흉내내게 되고, 이제는 방향성이라도 잡을 수있어서, 조금씩 일상의 행복이 찾아오기도 한다. 없었기 때문에 있게 된 것이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기회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은 살짝 멍청한 면이 있어서, 대게 잃어버렸을 때 가장 잘 느끼고 가장 잘 보고는 한다.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가져야 하는 것이나, 가졌을 때는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도 같고, 잃었을 때는 가진 것이 보이니 그때도 없지만, 그제서야 두개의 구성요소를 알았으니 있을 수 있는 시작 점이 되지 않을까.
새옹지마
나는 일상의 행복을 가지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일상의 행복이 무에서 유로 움직였다면, 유에서 무로 움직였던 것들도 많았다. 자존심도 유에서 무로 움직였고, 나의 자산도 유에서 무로 움직였고, 잃어버린다는 것의 아픔, 상실감, 고통, 절망, 어느정도는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잃는 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잃어본적이 있다는 경험이 무에서 유로 바뀐다. 잃어버리고 다시 채우는 과정에서 나다운 것을 채워가는 경험이 무에서 유로 바뀐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도 유도 없는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은 함께 일어나고 있고, 작용도 반작용도 없고, 반작용인 줄 알았던 것이 작용이기도 하고, 작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반작용으로 할 수도 있다.
회사를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한달이 지난 나는 요즘 몸이 아프다. 뭔가 또 마음이 불편하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는 고질병이 도진 것 같다. 예전의 나라면 다시 뛰지 못하는 나를 채찍질하며 더 사유하고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지 지금 이럴때가 아니라며 초조했을 것같다. 그렇지 않기로 마음 먹는 것, 그리고 그 마음먹음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 그게 내가 지금 가진 유일한 것 같기도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고 천천히 가기로 오늘 다시 마음 먹었어. 그리고 오늘의 나는 그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내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