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틴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간신히,
우울증이 찾아온 지 6년이다.
극단적이며 나쁜 생각에 괴로워하던 날도,
치료를 하며 희망에 부풀었던 때도,
모든 날이 오래되었다.
지금의 상태는 어떤가.
현재 나는 극심한 우울 상태와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라고 판단한다.
우울증이 심하다고 느끼던 때,
매일 죽음을 고민하며 괴로워하던 때가 있다.
그때는 삶이 괴로웠다.
그러나 이타적인 정신이 투철한 나는
나의 죽음 후 남게 될 주변 사람들과
그들의 괴로움에 죽음을 택할 수 없었다.
그에 또다시 나에게 괴로움이 되기도 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괴로움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견디던 순간.
사실 견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힘들었던 그 순간들.
그 당시의 괴로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쉬는 숨은 꽉 막힌 듯 답답하며,
들이마시는 숨은 목을 찌르듯 아팠다.
모든 것이 생생한 괴로움이다.
하지맘 나는 알고 있다.
그때의 나는 죽을 수 없었다.
타인을 위한 생각이 나의 큰 족쇄였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죽고 싶었지만,
절대 스스로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서 죽었으면,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으면,
이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다면,
안타깝게 죽은 저들 말고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스스로 죽을 수는 없지만,
죽고 싶어 하는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그렇게 병원에 갔었지.
그럼 지금은 어떨까?
치료를 받고, 좋아진 때도 분명 있었다.
올해 여름쯤이 가장 좋았던 때 같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70% 정도 회복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요즘,
나는 또다시 자살 충동을 느낀다.
너무 강렬한 충동이다.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
나는 이미 죽었다는 과정 하에 모든 것을 생각한다.
‘세제를 다 써가네. 새로 사야 할 텐데…
어차피 죽으면 살 필요도 없겠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죽음의 그림자라 따라붙는다.
충동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맞을지 모를 정도로,
나는 이미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나를 옭매이던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생각은,
지금의 나에게 큰 족쇄가 되지 못한다.
그건 상담을 받으며 내가 나에 집중하고,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당장의 자살충동을 막아주던 브레이크로서는
그 쓰임을 다해버렸다.
그만큼,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인 것 같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살 의지가 없구나’ 하고.
나는 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오랜 치료 과정을 겪으며,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계속 반복되었지만
그 과정에 질려버린 것 같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힘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런 미래도 나에게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다.
나에게 있어 행복은 존재하는 것이다.
인형 뽑기를 하며,
산책을 하며,
친구와 대화를 하며,
나의 일상 속 가까이에 행복이 존재함을 안다.
하지만, 그를 위해
삶의 고통을 감수해 낼 만큼 가치가 크지 않다.
찾아올 행복을 기다리며 견디는 것보다
당장 현실의 고통이 나에게 크게 느껴진다.
나는 그저 유지하고 싶다. 평온한 상태를.
행복도 너무 좋지만,
기쁨의 즐거움과 환희를 알지만,
그를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현실이 버겁다.
삶이 고통스럽다.
살다 보면 행복해질 것도,
행복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가치가 퇴색해 버렸다.
나의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무기력하다.
나를 표현하는 것조차 버겁다.
남아있는 자들을 위한 배려, 유서, 그 모든 준비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무기력 앞에서 내려놓아진다.
그저 죽고 싶을 뿐이다.
나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나의 숨이 퇴색되었다.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과거의 어느 날 썼던 글이 생각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나의 무덤이다.
나는 이곳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의욕도 없다.
그저 살아있기에 숨 쉬고 있다.
그 기분은 마치 아직 죽진 않았지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무덤 속에 있는 기분이다.
나는 살아 있지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 마냥
나에게는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있는 것도 없다.
나의 우울은 그렇다.
나는 괴로움에 무덤 같은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괴로움의 도피처인 글을 쓸 생각도 못할 정도로,
조금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의 우울과 충동은
튀어나오지 않았을 뿐 계속 나에게 존재했다.
그래서 계속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주변 지인과의 연락도, 산책 과제도,
당장 내가 먹을 끼니와 위생관리마저도,
다 포기하고 다 뒤로하고 그저 괴로워했다.
이럴 때마다 아쉬운 것은,
나는 성인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지만,
그 병원을 가는 것도 내가 해야 한다.
밥 한 끼 챙겨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해야 한다.
그 외로움에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그 아쉬움이 내가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현재 받고 있는 심리상담이 온라인을 통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따로 씻거나 나가지 않더라도,
컴퓨터를 켜서 만날 수 있는 간편함에
초췌한 몰골이지만 상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상담 후 극적인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여전히 우울하며, 죽음이 가까이 느껴진다.
다만, 깨달은 것은 ‘내가 엄청 울고 싶었구나’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펑펑 울었고,
왜 우는지 이유조차 모르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상담을 받은 후 2일간은 시도 때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고 소리 내서 울기도 했다.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문자 하나에 왈칵.
우울증으로 같이 참여하지 못했던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또 왈칵.
그냥 이유 없이 운전을 하다 왈칵.
왈칵 왈칵.
나는 엄청 울고 싶었던 것 같다.
이후 병원선생님과도 상의를 하여,
줄여가던 약을 다시 늘리기로 했다.
형형색색 잔뜩 늘어난 알약을 보면,
…
말로 표현하기 참 힘든,
조금은 가라앉아 있으며
아직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어려운 감정이 든다.
다행히도 약을 먹는 하루하루가 늘며
다시금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금 둔해진 생각들이 느껴진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버거웠던 감정과 생각들이
조금은 잠잠히 가라앉으니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다시금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언제 또다시 우울이 나를 덮칠지 모르겠다.
글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웠던 무기력함.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잘 이어지면 좋을 텐데.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무겁기도 하다.
무겁지만, 가볍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을 때,
공유하고 싶을 때 쓰면 되니까.
너무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살아있다는 것도 그럴 것이다.
살아있음에 괴롭지만,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음에 이유를 찾다 보면 괴롭지만,
나는 일단 살아있다.
그냥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살아있으니까.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