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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t Mar 26. 2024

김근태를 아시나요?

도서관 이야기 - 김근태기념도서관

선거철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역에서 파란색, 빨간색이 머리를 조아린다. 성동구 사는 내게 마포구 후보가 명함을 건넨다. 역을 나오니 빨간색, 파란색 배너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나 좀 봐 달라고. 

선거철이 되면 머리와 가슴, 몸이 함께 움직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전 선거하고 투표 당일에 바람 쐬러 갈 생각이 앞설 정도로 무관심하다. 30여 년 간 투표를 해 오며 변화를 만들지도, 맛보지도 못한 무력감이라고 자의적 해석을 해본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김근태기념도서관”을 일부러 찾아갔다. 이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포털에 “김근태”를 검색하면 젊은 김근태가 앞서 나오지만 내 마음속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진 지 10여 년이 넘은 민주화 운동가다. 정치인이라는 타이틀로 그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나는 민주화 운동가로 그를 기억한다. 70/80이라는 낭만적 워딩의 시절,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고문으로 그 시간을 버티며 “민주”을 지켜냈고 이후 여의도에 진출했지만 여의도 기득권과는 다른 “재야 정치인”으로 제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정치인’으로 남는다. 이후 여의도를 떠나 제 목소리를 내며 지내던 중, 2011년 말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지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통해 그를 새삼 기억하게 된 적도 있다.


“김근태기념도서관”은 이런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21년 만들어진 도서관으로 “도봉구 최초 민주주의 라키비움 문화시설(https://geuntae.co.kr/)”로 소개된다. 라키비움(Larchiveum)은 도서관(Library) + 기록관(Archives) + 박물관(Museum)을 말하는 것으로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의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공간이다.  그래서 김근태기념도서관은 추모의 공간이자 민주주의를 둘러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인문사회학 공간으로서의 기능도 가진 곳이다. 

도서관 옆 작은 잔디밭에 고인의 웃고 있는 좌상(?)이 “희망은 힘이 세다.”라는 글귀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놓았던 희망을 다시 부여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든다. 정문 옆으로 ‘희망’에 대한 고인의 생각이 담긴 글귀를 만날 수 있다.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 차선을 선택해 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도서관을 넘어 왜 ‘민주주의 라키비움’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김근태의 생각이 담겨 있고, 관련된 기록이 있고 김근태의 체취가 담긴 흔적, 민주주의의 길, 시장경제의 길, 한반도 통일의 길을 담은 친필을 통해 그의 세 갈래 생각도 잡아볼 수 있다. 

비치된 책들을 살펴보며 몇 가지 다른 도서관과는 다른, 눈길 가는 몇 가지를 발견했다. ‘이 달의 책’ 코너에 여성 운동, 여성 운동 역사, 정책 등을 따로 분류해 놓은 점과 십진분류표 숫자 위에 설명이 눈에 띈다. 분류표 900은 역사인데 “정직은 미래를 낳는다”가 적혀 있고 예술분야 600에는 “미래를 위한 상상력”, 기술과학 500에는 “내일을 설계하는 기술”이라 적혀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이 총류 000에 적힌 “대화할 수 있는 용기”였다. 자꾸 곱씹게 만든다. 

두루두루 둘러보다 한 벽면 앞에 발길을 멈췄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고인이 2024년을 사는 내게, 투표를 앞둔 아저씨에 어깨를 툭 치며 건네는 말 같다. 

찬찬히 돌아보다 출구에 이르니 자연스레 발길을 멈추게 하며 미소 짓게 만드는 글 한 줄이 반긴다. “여기에 오길 참 잘했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도 기분도 묘했다. 그가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 시절에서 훌쩍 사오십 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이곳에 변화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변화에 기여하고 있는가 등으로 내심 복잡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은 정했다. “꼭 투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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