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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t Apr 01. 2024

4월, 김수영

“설움에 불을 끄고 비웃는 짐승이여.”

읽고 싶어 책을 샀지만 단박에 읽어내지 못하고 질질 끄는 경우가 있다. 집중력 부족과 게으름을 탓해보지만 그보다는 주제넘게 너무 버거운 책을 고른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김수영 전집”이다. 몇 개월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다. 시인 김수영에게 미안하고 출판사에 미안하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키려 시간을 내 도봉구에 있는 ‘김수영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은 ‘도봉구 역사문화관광벨트’에 위치해 있지만 바삐 걷다 보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자그마한 빌딩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김수영은 딱 두 단어로 응축되는데 ‘주지시’ 그리고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들 두 단어가 오롯이 담긴 <풀>이라는 시 전체를 외우고, 해석을 외우고 시험 보고. 학교에서 배운 김수영과 <풀>은 내게 그렇게만 기억된다.  


그런 시절을 지내고 대학에서 김수영을 다시 만났다. 좀 더 심도 있는 해석이 제공됐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아마도 신입생으로 맞이한 첫 번째 419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지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민중, 지배세력이 차지하고 그 내용들이 419와 함께 기억 속 폴더에 자리 잡았다. 

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걸린 그의 대표 시 <풀>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그동안 수많은 평론가와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수많은 각자의 해석을 했던 작품이기에 뭐라 따로 평할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자질도 없다. 다만 천천히 읽었다.  


‘대립’과 ‘저항’, ‘자유’와 ‘억압’ 도 읽혔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들여다보니 내게는 푸른 녹색 생명이 보였다. 변화의 의지도 읽혔다. 나이가 들어 이전의 그 격함이 수그러들었다는 생각보다는 다르게 보는 눈의 생긴 느낌이다. 

옆으로 이동하니 벽에 붙은 무수히 많은 마그네틱 단어판을 옮겨 나만의 시작(詩作)을 하는 공간이 있었다.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몇 개의 단어를 골라 하얀 판에 붙였다. 짧은 나만의 시가 만들어졌다. 

설움에 불을 끄고 비웃는 짐승이여.”  


앞서의 녹색 생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시 전혀 이질적 감정이 자리 잡은 느낌이다. 내 안에 아직 분노가 있는 것일까? 내 설움의 정체는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비웃는 짐승일까? 


4월이 와서 김수영이 떠오르는 건지, 김수영을 생각하면 4월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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