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에 불을 끄고 비웃는 짐승이여.”
읽고 싶어 책을 샀지만 단박에 읽어내지 못하고 질질 끄는 경우가 있다. 집중력 부족과 게으름을 탓해보지만 그보다는 주제넘게 너무 버거운 책을 고른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김수영 전집”이다. 몇 개월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다. 시인 김수영에게 미안하고 출판사에 미안하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키려 시간을 내 도봉구에 있는 ‘김수영문학관’을 찾았다. 문학관은 ‘도봉구 역사문화관광벨트’에 위치해 있지만 바삐 걷다 보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자그마한 빌딩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김수영은 딱 두 단어로 응축되는데 ‘주지시’ 그리고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들 두 단어가 오롯이 담긴 <풀>이라는 시 전체를 외우고, 해석을 외우고 시험 보고. 학교에서 배운 김수영과 <풀>은 내게 그렇게만 기억된다.
그런 시절을 지내고 대학에서 김수영을 다시 만났다. 좀 더 심도 있는 해석이 제공됐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아마도 신입생으로 맞이한 첫 번째 419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지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민중, 지배세력이 차지하고 그 내용들이 419와 함께 기억 속 폴더에 자리 잡았다.
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걸린 그의 대표 시 <풀>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그동안 수많은 평론가와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수많은 각자의 해석을 했던 작품이기에 뭐라 따로 평할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자질도 없다. 다만 천천히 읽었다.
‘대립’과 ‘저항’, ‘자유’와 ‘억압’ 도 읽혔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들여다보니 내게는 푸른 녹색 생명이 보였다. 변화의 의지도 읽혔다. 나이가 들어 이전의 그 격함이 수그러들었다는 생각보다는 다르게 보는 눈의 생긴 느낌이다.
옆으로 이동하니 벽에 붙은 무수히 많은 마그네틱 단어판을 옮겨 나만의 시작(詩作)을 하는 공간이 있었다.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몇 개의 단어를 골라 하얀 판에 붙였다. 짧은 나만의 시가 만들어졌다.
“설움에 불을 끄고 비웃는 짐승이여.”
앞서의 녹색 생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시 전혀 이질적 감정이 자리 잡은 느낌이다. 내 안에 아직 분노가 있는 것일까? 내 설움의 정체는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비웃는 짐승일까?
4월이 와서 김수영이 떠오르는 건지, 김수영을 생각하면 4월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