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아르마니!!!!

1990년대를 함께 떠나 보낸다.

by jest

한 해가 마무리될 즈음이면 늘,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매체 별로 사회 각 분야를 정리해 TOP10 등의 방법으로 발표를 한다. 영화, 음반, 도서 등이 주를 이뤄 소개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그 해에 돌아가신 유명인들”의 명단이다. 아마도 동 시대를 살아온 인물들을 통해 세월의 흐름과 시간을 반추해 보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올 해도 역시 많은 분들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을 등졌다.


데이비드 린치, 송대관, 송대관, 이상용, 프란체스코 교황, 오지 오스본, 로버트 레드포드, 전유성, 이순재 등,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며 누군가에게 기억될 자취를 남기고 함께 시대를 지나오고, 같이 숨쉬었던 이들. 이 외에도 누군가에게는 꼭 기억될 분들이 더 많겠지만 내게는 외국의 한 디자이너가 떠오른다.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네이버 기준으로 패션디자이너, 기업인으로 표기돼 있고 2025년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데뷔하고 럭셔리 브랜드가 그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흥망성쇠를 겪는 패션 비즈니스 분야에서, 진부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지만, 내게 있어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정말로 일세를 풍미한 패션 디자이너이며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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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세대들은 아련한 기억에도 정말 좋은 시절을 보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살아오면서 그 정도의 활황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정점은 IMF 국가부도라는 씁쓸함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래도 Belle epoch였다. 그런 시절에 사회 생활을 시작한 내게 조르지오 알마니는 특별한 이름이었다. 당시는 명품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지만 유명 브랜드는 분명 있었다. National Brand로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에서 프리미엄 의류가 시장에 출시하고 남자도 멋을 내는 그런 시절, 아르마니는 독보적인 브랜드로 내게 포지셔닝 되었다. 특히 광고회사를 다니던 내가 선망하는 옷 잘 입는 선배들이 끝판에 선택하는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 엠포리오 아르마니로 대변되는 아르마니 수트는 단순한 의류가 아니라, 사회 초년생이 꿈꾸던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열망을 상징했다. 과장된 장식 대신 절제된 선, 부드럽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실루엣은 당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성공한 어른’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하지만 1993년 당시, 신입사원의 현실은 달랐다. 갓 사회에 나온 청년이 알마니 정장을 구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은 잡지 화보를 보며 눈을 즐겁게 하거나, 남대문 시장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넥타이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아르마니 수트를 갖추는 것은 일종의 목표이자 자기 확신의 증거로 여겨졌다. 실제로 첫 아르마니 정장(정확하는 엠포리오 아르마니)을 마련하던 순간은 사회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새롭게 해주던 경험이었다.


돈 있다는 것을 티내는 것이 아닌 아르마니의 메시지를 입는 경험. 아르마니가 전한 메시지는 그의 수트만큼이나 단순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진정한 세련됨은 절제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 철학은 화려함을 좇던 패션 흐름 속에서도 묵직한 설득력을 지녔다. 그래서 아르마니 수트는 명함이나 직함보다 더 강력한 자기소개처럼 기능했다. 입는 순간 한층 단정해지고, 태도까지 달라지는 기분을 경험한 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50대가 된 내 세대는 어쩌면 옷장 한쪽에 여전히 아르마니 정장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몸에 맞지 않고 시대의 흐름과는 어긋나더라도, 그 옷에는 한 시절의 열망과 긴장이 남아 있다. 아르마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부고가 아니라, 청춘의 한 장면을 떠나보내는 감정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아르마니는 패션을 통해 한 세대 남성들의 태도를 바꾸었다. 남을 압도하지 않고도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 단정함이 곧 자신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남긴 유산은 고가의 수트보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태도일지 모른다.


조르지오 알마니. 그 이름은 이제 한 세대의 기억 속에 남아, 여전히 삶의 모양을 돌아보게 하는 상징으로 자리할 것이다. 오늘 오랫동안 옷 장 한 켠에 걸려있던 색 바랜 아르마니 셔츠를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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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의 1990년대도 같이 보낸다. 굿바이, 아르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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