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일
새벽 두 시, 응급실 복도에 삐삐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환자 수는 줄었는데, 일은 줄지 않았다. AI가 환자의 생체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했지만, 그 분석 결과를 사람이 검토하고 서명하는 일은 여전히 인턴의 몫이었다.
준호는 진료 기록을 확인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모니터 불빛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비쳤다. 손목이 뻐근하게 굳었고, 눈은 초점이 흐려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속삭이며 또 하나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간호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준호 선생님, 오늘도 안 쉬었죠? 벌써 30시간째잖아요.” 준호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잠깐 의자를 뒤로 젖혔을 뿐인데, 세상이 기울었다. 모니터 화면이 물결치듯 흔들렸고, 보고서 위에 놓인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준호 선생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동료가 다급하게 부축했고, 누군가가 휴대용 혈압계를 꺼냈다. “혈압 80… 이러다 과로사 나겠어.”
준호는 억지로 눈을 떴다. 형광등이 눈부셨고, 천장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몸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심 한가운데, 윤서가 만든 실험용 수직농장 모듈이 빛을 내고 있었다. LED 식물등이 층층이 켜져, 한여름 햇빛보다 부드러운 녹색 광선을 흘렸다. 줄지어 선 채소들이 마치 작은 숲처럼 흔들렸다.
윤서는 작업용 장갑을 벗으며 팀원들을 바라봤다. “오늘, 우리가 만든 첫 상업 모듈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듈 하나면 한 아파트 단지의 식탁 절반을 책임질 수 있어요.” 순간, 작업실에 박수소리가 터졌다. 젊은 직원들, 흙냄새에 익숙한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한 직원이 농담처럼 말했다. “이제 마트에서 푸드 마일리지 신경 쓸 필요 없겠네요.” 다른 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로컬푸드 열풍 덕에 투자자들 반응이 엄청나요.” 윤서는 미소 지었다. “우리가 한 게, 그냥 채소를 키운 게 아니라 도시의 시간을 되돌리는 거예요.”
작은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견학을 왔다. 아이 손에는 작은 모종이 들려 있었다. “언니, 이거 내가 심으면 우리 집도 농장 돼요?” 윤서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응, 너희 집 창가에서도 키울 수 있어. 네가 돌보면 금방 자라날 거야.”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윤서는 천천히 옥상 난간으로 걸어갔다. 밤하늘 아래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 사이사이에 자신이 만든 녹색 조명이 켜져 있었다.
‘이제 도시가 조금씩 다시 숨 쉬고 있어.’
손끝에 흙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냄새는, 준호가 붙잡고 있던 차가운 키보드 냄새와 너무 달랐다.
병원 휴게실
커피 자판기 앞, 준호가 종이컵에 뜨거운 커피를 받았다. 벽걸이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전국 의료기관의 AI 의사 보급률이 60%를 넘어섰습니다. AI 진단은 평균 98% 정확도로, 기존 인간 의사의 오류를 절반 이하로 줄였으며 수술 보조 로봇과 함께 의료 서비스 대기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로봇 팔이 매끄럽게 수술을 진행하는 모습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동기 의사가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우리 진짜… 데이터 관리팀 되는 거 아냐?” 다른 동기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렇지. 요즘 우리 하는 일 보면 거의 행정직이잖아.”
모두 웃었지만, 준호는 웃지 않았다. 종이컵을 든 손가락이 미묘하게 떨렸다.
‘내가 꿈꿨던 건 환자를 살리는 손이었는데…지금 내 손은 기계가 해놓은 진단을 확인하고 서명만 하고 있네.’
뉴스 앵커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향후 5년 내 AI 의사 보급률은 90%를 넘길 전망입니다.”
준호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미지근한 커피향이 코끝을 맴돌았지만, 마음은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도심 거리 – 윤서의 회사 앞
하늘 위 작은 드론 수십 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수증기와 정화 입자가 햇빛을 반짝이며 흩날렸다. 회색빛이던 도심 하늘이 서서히 옅은 파란색을 되찾고 있었다.
뉴스 방송 화면
“오늘부터 도심 공기 정화 드론이 상용화됩니다. 이 드론은 초미세먼지를 실시간으로 감지·분해해30분 내에 공기를 최대 40% 정화할 수 있습니다.” 화면 속 시민들이 환호하며 휴대폰으로 하늘을 촬영했다. 한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엄마, 공기 냄새가 달라!”
윤서 – 회사 동료와의 대화
윤서가 사무실 창가에 서서 드론을 바라봤다. 옆에서 동료가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가 만든 농장도 이 공기 덕에 더 잘 돌아가겠어요.” 윤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깨끗한 공기, 도시 안 먹거리, 그게 새로운 표준이 될 거예요.” 그녀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우리가 도시를 다시 살리고 있어.’
병원응급실 복도
같은 시간, 준호는 병원 응급실 복도에 서 있었다. 하늘을 볼 틈도 없이 바쁜 하루. 창문 너머로 드론이 지나가는 게 보였지만, 그는 그냥 고개를 떨군 채 환자 기록을 정리했다.
‘도시는 나아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멈춰 있는 기분이지?’
로컬푸드 마켓
도심 한복판, 작은 광장에 마련된 로컬푸드 마켓은 사람들로 붐볐다. 윤서의 회사에서 공급한 수직농장 채소들이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흙냄새 대신 신선한 풀 향기가 가득했다.
한 아주머니가 봉투를 들며 말했다. “이거 다 도시에서 자란 거래? 믿기지 않는다.” 상인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바로 여기서 길러낸 겁니다. 운송거리 제로, 오늘 아침에 수확했어요.”
옆에서 아이가 엄마 소매를 잡았다. “엄마, 이거 우리 옥상에서도 길러?” 엄마가 웃었다. “응, 윤서 이모 회사에서 만든 거야.”
윤서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식탁 거리를 고르는 모습이 작은 잔치처럼 보였다.
‘이게 진짜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거지…사람들이 자기 도시에서 나는 걸 먹는 삶.’
힐링 카페
근처 카페에서는 윤서 회사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허브티가 인기였다. 사장은 윤서를 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이거 없으면 장사가 안 돼요. 도시에서 난 신선한 거라 해야 손님이 몰려요.” 윤서는 조금 부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그걸 바라던 거였어요. 사람들이 자기 땅을 다시 느끼는 거.”
병원 구내식당
같은 시간, 준호는 병원 구내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미지근한 도시락 샐러드,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채소가 차갑게 놓여 있었다. 그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멈추며 중얼거렸다.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뭔가… 죽어있네.” 입안으로 들어간 풀맛이 유난히 밋밋하게 느껴졌다.
준호 – 병원 침대 위
깊은 밤, 병원 당직실. 준호는 링거를 꽂은 팔을 들어다보다가 그냥 힘없이 내려놓았다. 하루 종일 환자를 본 것도 아니었다. AI가 내린 진단 결과를 검토하고 서명하고, 데이터 기록을 정리하고…“이게 내가 꿈꾸던 의사였나…”중얼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창밖에서는 공기 정화 드론이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준호의 시야는 더 흐릿했다.
‘내 몸은 여기 있는데… 내 마음은 어디 있지?’
윤서 – 옥상 텃밭 위
윤서는 작업복을 걸친 채 옥상 난간에 서 있었다. 도시 야경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LED 아래 자란 작은 채소들이 밤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손끝으로 새싹 하나를 만졌다. “잘 자라. 내일은 더 건강해져야 해.”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녁 식사 모임에서 사람들이 “로컬푸드가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며 떠드는 소리였다. 윤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가 도시를 조금씩 바꾸고 있어. 사람들이 웃고, 먹고, 숨 쉬는 방식까지.’
같은 도시, 같은 시간.한 사람은 차갑고 닫힌 공간에서 몸을 겨우 붙잡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열린 하늘 아래서 살아 있는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그 차이는, 손끝에 묻은 흙냄새와 소독약 냄새만큼이나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