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일
비가 그친 직후, 대학병원 정문 앞 아스팔트는 반쯤 젖어 있었다. 줄지어 선 전공의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AI 의사 정책 철회하라〉, 〈의료는 인간의 손으로〉글자마다 습기를 머금은 듯 흐릿하게 빛났다.
준호는 피켓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손목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동기가 중얼거렸다. “이거… 해봤자 뭐 달라지나? AI가 다 하고, 우린 이제 데이터 확인하는 사람인데.” 그 말에 다른 동료가 씁쓸하게 웃었다. “의사란 직업이 이제 행정직이야, 그냥.”
기자들이 몰려왔다. 카메라 렌즈가 번쩍였다. “왜 파업하십니까?” 마이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준호는 대답을 하려다 입술만 달싹였다.
‘왜…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진짜 지키고 싶은 게 뭐였더라?’
비에 젖은 옷깃이 차가웠다. 가슴 안쪽에서 작은 떨림이 올라왔다. 동기들이 구호를 외쳤지만, 준호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피켓만 덜컥덜컥 흔들렸다.
멀리 구급차가 울렸다. 하얀 불빛이 번쩍이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준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발이 앞으로 나아갈 뻔했다.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여긴가, 아니면… 저긴가?” 속으로 묻는 목소리가, 비에 젖은 공기보다 더 차가웠다.
국제 회의장은 불빛으로 가득했다. 세계 각국 도시 대표들이 모여 있었고, 플래시가 쉴 틈 없이 터졌다.
무대 위 스크린에 커다란 글씨가 떴다.〈세계도시생태협회 최연소 디렉터 –박윤서 박사〉
윤서는 단상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잠시 심호흡했다.
‘내가 이렇게 큰 무대에 서다니…’
“도시는 더 이상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도시를 하나의 살아 있는 생태계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숨 쉬는 도시를 증명했습니다.”
순간, 회의장이 박수로 가득 찼다. 각국 대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한 외신 기자가 소리쳤다. “당신은 도시를 살린 사람입니다! 소감 한마디만 해주세요!”
윤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손끝에 여전히 흙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도시는 결국 사람입니다. 우리가 도시를 살리는 건, 거기 사는 사람들을 살리는 거예요.”
행사가 끝나자, 수많은 명함이 쏟아졌다.각국 관계자들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같이 일합시다.” “도시 모델을 공유해주십시오.” 윤서의 손이 하나씩 잡힐 때마다
‘내가 이제, 진짜 세계를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밀려왔다.
버스 터미널 – 임시 난민 캠프
하얀 임시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새하얀 구급차와 군용 트럭이 오가고, 자원봉사자들이 뜨거운 국을 나눠주고 있었다. 가벼운 짐을 움켜쥔 난민들이 길게 줄을 섰다. 피곤에 젖은 눈빛, 젖은 슬리퍼, 아이를 안은 팔.
뉴스 화면 자막
〈동남아 기후 난민 5만 명 국내 유입〉앵커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후 변화로 인한 대규모 홍수 피해로, 피난민 5만 명이 긴급 입국했습니다. 정부는 임시 주거 시설과 의료 지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윤서 – 화면을 보며
국제 회의가 끝난 호텔 방, 윤서는 TV 화면 앞에 서 있었다. 난민들의 표정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도시는 그냥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또 이렇게 실감하게 되네…’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다음 주 제출할 도시 수용 능력 확충안 파일을 열었다. “우린 준비해야 해…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도시로.”
준호 – 병원 대기실
준호도 같은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난민 캠프 화면 위로 〈응급 의료 인력 부족〉이라는 자막이 떴다. 동료가 말했다. “저 사람들 치료 누가 하냐… 벌써 과로인데.” 준호는 대답 대신 뉴스 화면을 계속 바라봤다.
‘저 사람들은 어디서 자고, 뭘 먹고, 누가 돌보지?…그리고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그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국가재난센터 – 통합 상황실
커다란 원형 스크린이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실시간 기후 데이터와 시뮬레이션 영상이 계속 바뀌었다. 빨간 경보 아이콘이 몇 초마다 점멸했다.
관제요원이 차분하게 말했다. “기후 예측 AI가 12일 후 강우 패턴을 변동 위험으로 표시했습니다. 서울 지역 한강 수위 상승 예측률, 87%입니다. ”뒤쪽에 서 있던 공무원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87%면… 거의 확정이지 않습니까?”
AI 음성이 이어졌다.“2주 후 한강 범람 가능성, 최고 등급.”
뉴스 화면 – 저녁
앵커 목소리가 퍼졌다. “기후 예측 AI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이번 예측으로 한강 범람 사태에 대비할 시간이 확보되며, 인명 피해 최소화가 기대됩니다.” 화면에는 하얀 재난센터 복도와 긴박하게 움직이는 요원들의 모습이 비쳤다.
윤서 – 사무실에서
윤서는 뉴스를 보며 메모했다. “예측이 가능해도… 대응은 결국 사람이네. 이제 도시가 그만큼 유연해야 해.” 그녀는 방금 완료한 ‘도시 유수지 확충안’을 다시 확인했다.
‘사람이 살 도시라면, 물도 숨 쉴 공간이 있어야지.’
준호 – 병원 복도
준호도 스마트패드로 뉴스를 보았다. 동료가 농담처럼 말했다. “AI가 날씨도 예측하고, 환자도 진단하고…이제 우리 뭐 하냐?”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린… 그냥 확인하고 사인하는 사람인가.” 그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한강변 – 범람 직후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강물은 둑을 넘고 도로를 집어삼켰다. 떠내려간 차량과 부유물들이 강 위를 떠돌았다.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사람들은 임시 설치된 보트를 타고 대피했다.
윤서 – 긴급 화상회의
윤서는 국제협회 디렉터 자격으로 긴급 화상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화면에 떠 있는 다른 도시 관계자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윤서는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도시는 더 이상 과거의 설계로는 버틸 수 없습니다. 저지대 유수지 확충안, 통합 빗물 정화 시스템, 지하 대피 통로 재설계가 필요합니다. 이번 피해는 우리가 늦게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회의장 한쪽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알아.”
준호 – 응급실
한강 범람으로 다친 이재민들이 응급실로 몰려왔다. 준호는 젖은 의복에 흙 묻은 사람들의 손을 붙잡으며 치료했다. “괜찮아요, 여길 눌러주세요.곧 꿰맬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내 손이 아직도 사람을 살리고 있네…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
그 순간, 스피커에서 뉴스 속보가 흘렀다.“세계도시생태협회 윤서 디렉터, 긴급 복원 계획 발표.” 동료가 말하듯 웃었다. “너네 같은 반이던 윤서 맞지? 이제 TV에서 안 나오는 날이 없네.” 준호는 대답 대신 환자의 손을 꽉 잡았다.
홍수 위에 드리운 두 그림자
도시는 물 위에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그 한가운데서한 사람은 도시의 미래를 설계했고, 또 한 사람은 눈앞의 생명을 붙잡고 있었다. 둘 다 사람을 살리고 있었지만,느끼는 무게는 너무 달랐다.
준호 – 병원 옥상
폭우가 그친 뒤의 밤, 병원 옥상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준호는 비에 젖은 흰 가운을 벗어 옆 벤치에 던지고 허공을 올려다 봤다. 하늘은 구름이 걷히며 별 하나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뭘 지킨 거지?” 그는 낮에 붙잡았던 환자의 손을 떠올렸다.살 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손, 하지만 그 순간마저도 ‘AI 대신 내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기계가 못 하는 일이 남아서’였다는 걸 알았다.
‘이 길이 내 길 맞아?’속삭임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
윤서 – 호텔 테라스
한강 너머 도시의 불빛이 은하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윤서는 테라스 난간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받은 수십 개의 연락이 머릿속을 스쳤다. “디렉터님, 다음 회의는 파리입니다.” “시드니에서 기술 협력을 요청했어요.” 그리고 홍수 뉴스에서 들었던 시민의 목소리. “우릴 살릴 수 있나요?”
윤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끝에 남아 있는 흙냄새를 느꼈다. “응, 살릴 거야. 도시도, 사람도.” 그 말은 독백 같았지만, 바람이 가져가듯 퍼져나갔다.
‘내가 걷는 길은… 누군가의 내일이 된다.’
마지막 이미지
같은 도시, 같은 시간. 한 사람은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묻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열린 하늘 아래서 내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차이는 단순한 성공과 실패가 아니었다. 어떤 길이 진짜 ‘살리는 길’인가에 대한 대답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