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그림자

30녀,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일

by 토사님

2037년(22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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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손끝이 닿지 않는 심장

의학관 실습실은 정적이었다. 과거 의대생들이 ‘첫 해부’라고 부르며 긴장하던 시간, 이제는 3D 바이오프린터가 대신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온기 없는 장기 모형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살아 있는 흔적이 아닌, 완벽하게 출력된 데이터였다.

교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심장 구조 실습입니다. 프린터로 출력된 심장은 실제 크기와 재질을 98% 재현합니다. 오염 걱정이 없으니 자유롭게 다루세요.”

학생들은 VR 글러브를 끼고 홀로그램을 조작했다. 심장 모형을 잡아 들고, 화면 속 데이터를 확인했다. 살아 있는 심장의 떨림 대신 진동 없는 정밀함만 손끝에 남았다.

준호도 심장을 집어 들었다. 딱딱한 모형이 손안에 얌전히 놓였다. 온기 하나 없는, 단 한 번도 뛴 적 없는 심장.

‘내가 꿈꿨던 건… 이런 거였나?’

예전엔 의사가 사람을 직접 만져야 한다고 믿었다. 손끝으로 숨결을 느끼고, 맥박을 잡으며 생명을 확인하는… 그런 순간. 그런데 지금, 그는 데이터 태그와 모형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졸업할 때까지 실제 인체 접촉 기회가 많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의 시술은 AI 수술 보조 시스템이 담당하니까요.”

주변 학생들은 무심했다. “편하잖아. 굳이 사람 몸 만질 필요 없고, 감염 위험도 없고.” 작은 대화들이 스쳤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손에 쥔 심장을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탁자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실습이 끝난 뒤, 준호는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손끝이 차갑게 굳은 채였다. 마치 그 심장이 아니라,자신의 심장이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면 2: 땅 위에 그린 숨결

태양은 이글거렸지만, 땅 위엔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었다. 윤서는 흙먼지 속에서 헬멧을 벗었다. 목덜미로 땀이 흘렀지만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수질 센서 연결 끝났습니다!” 동료 엔지니어가 소리쳤다. 윤서는 작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수질 지수를 확인했다. 파란색 그래프가 안정적으로 뻗어나갔다. “좋아, 이제 아이들이 바로 마실 수 있어.”

근처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손에는 작은 나무 모종이 들려 있었다.“언니, 이거 심으면 지구를 살릴 수 있어요?” 윤서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응, 이 한 그루들이 모여서 지구를 살리게 될거야.” 아이 얼굴이 활짝 웃음으로 바뀌었다.

멀리서 현지 주민 대표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손에는 땀과 흙이 묻어 있었지만, 그 온기는 살아 있는 것 그 자체였다. “여러분들이 이 도시를 살리는군요.” 윤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이 도시는 원래 살아 있었어요. 우리는 그냥 다시 길을 열었을 뿐이에요.”

모래바람이 불어왔고,어딘가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윤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손에 묻은 흙을 바라봤다.

‘이 손으로, 지금 뭔가를 살리고 있구나.’

작은 손길 하나하나가 도시를 바꾸고 있었다. 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숨결이 마치 이 땅의 새로운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


장면 3: 안정의 그림자


캠퍼스 식당

점심시간, 학생들이 식판을 들고 웅성거렸다. TV 화면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청년 실업률이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AI 기반 서비스업의 급격한 성장 덕분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신입직은 AI 관리와 데이터 해석 업무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새로 생긴 AI 콜센터와 데이터 관리 센터가 차례로 비쳤다. 직원들은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만 잡고 있었다.

학생들이 환호했다. “대박이다, 이제 취업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나 졸업하면 바로 자리 있겠다.” 식당 안 공기가 조금 들떴다.


준호 – 테이블 한쪽

준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화면을 바라봤다.〈청년 실업률 최저〉라는 자막이 굵게 떴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취업은 쉬워도… 다 저기 앉아서 데이터만 보는 거잖아.”

옆자리 친구가 물었다. “너야 뭐 상관없잖아. 의사잖아, 전문직.” 준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하지만 속으로는 달랐다.

‘나도 요즘 환자보단 데이터만 보고 있잖아…’

그는 식판의 반찬을 건드리다 말았다. 숟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윤서 – 프로젝트 캠프

윤서는 먼 아프리카 프로젝트 현장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노트북 알림창이 떴다.〈한국 청년 실업률 최저치 달성〉그녀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좋네. 근데… 다들 뭘 하고 사는 걸까?” 손에 남아 있는 흙자국을 닦으며 생각했다.

‘나는 적어도 살아 있는 걸 만지고 있네.’


장면 4: 꿈을 대신하는 손

연구소 투어 영상 – 뉴스 화면

TV 화면에는 거대한 3D 프린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노즐에서 붉은 액체가 차례차례 층을 이루며, 점점 사람의 신장 모양이 완성되어 갔다.

앵커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인체 3D 바이오프린팅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었습니다. 이제 간, 신장, 심장 일부까지도 필요할 때 바로 출력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기존 장기이식 대기자 수가 70% 이상 감소할 전망입니다.”

화면에는 환자가 밝은 표정으로 의료진과 악수하는 장면이 나왔다.뒤이어 기자가 말했다.“이제 생명을 구하는 일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기계의 손이 더 정확하게 담당합니다.”


병원 실습실 – 준호

준호는 동기들과 함께 뉴스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옆자리 친구가 감탄했다. “와… 진짜 영화 같다. 이제 장기이식 못 받아서 고생하는 일 없겠다.” 다른 친구는 농담처럼 말했다. “야, 우리 없어지는 거 아냐? 기계가 다 해주면.”

모두 웃었지만, 준호는 웃지 못했다. 손에 쥐고 있던 실습용 장기 모형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손…그게 내 꿈이었는데…그 꿈은 이제 저 기계 손이 하고 있네.’

순간, 자신이 어릴 적 그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환자를 살리는 영웅 같은 의사. 그 그림 속 인물의 손은 따뜻했다.하지만 지금 준호의 손끝은 온기 없는 플라스틱에 묻혀 있었다.


윤서 – 프로젝트 현장

윤서도 휴대폰 알림으로 같은 뉴스를 봤다. “인체 프린팅 상용화… 사람 손이 필요 없는 시대.” 그녀는 흙 묻은 손을 바라봤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건…살아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 내 손은 아직 쓸모가 있네.’

그녀는 다시 모종을 들고 땅을 팠다. 손끝에 흙냄새가 진하게 배어들었다.


장면 5: 무너진 계절


저녁 뉴스 화면

TV 화면에 강원도 산지의 밭이 비쳤다. 마른 흙이 쩍쩍 갈라지고, 쓰러진 옥수수와 말라버린 감자 줄기가 흉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역대급 이상 기후로 인해 강원도 주요 농작물 생산량이 60% 이상 감소했습니다. 피해액은 2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특히 소규모 농가의 타격이 심각해 정부 차원의 긴급 지원이 논의 중입니다.”

화면 속 농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이거… 날씨가 그냥 엉망이에요. 봄 같지도 않고, 장마는 한 달이나 늦게 오고…뭘 심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윤서 – 프로젝트 캠프

윤서는 휴대폰으로 그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잠시 손이 멈췄다. 현장 동료가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윤서는 화면을 보여줬다.“우리나라 강원도도… 이제 안전지대가 아니네.” 짧게 중얼거린 뒤 손에 들고 있던 도면을 다시 펼쳤다.

‘이건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야. 도시와 농촌, 우리 모두의 문제야.’

그녀의 눈빛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흙먼지가 묻은 손끝이 유난히 따뜻했다.


준호 – 병원 식당

준호도 휴대폰 알림으로 그 뉴스를 봤다. “강원도 농작물 피해… 기후 이상 심화” 그는 젓가락을 들고 있다가 말없이 멈췄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왔는데…정작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무너지고 있네.’

손에 쥔 젓가락이 허공에 걸려 있었다. “…뭐가 더 중요한 걸까.” 짧은 속삭임이 식당의 소음에 묻혀 사라졌다.

장면 6: 새로운 도시의 심장


글로벌 뉴스 화면

거대한 전광판에 큼지막한 자막이 떴다.〈전 세계 에코 시티 건설 붐〉뉴스 화면에는 각국의 새로운 도시 설계 조감도가 연달아 지나갔다. 공중정원, 재생에너지 파이프라인, 도시 속 강과 숲이 연결된 모습.

앵커가 목소리를 높였다.“기후 위기 시대, 에코 시티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2037년 현재, 50여 개 도시가 착공에 들어갔으며특히 ‘아프리카 사헬 에코 시티 프로젝트’가 표준 모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윤서 – 현장 브리핑

윤서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현지 팀원들과 미팅 중이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말했다. “윤서 씨, 이번 설계가 국제 표준으로 선정됐습니다. 앞으로 다른 도시들도 이 모델을 사용하게 될 겁니다.”

윤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손에 쥔 펜을 바라봤다.

‘내가 그린 선 하나가 도시를 살리는 기준이 됐다고?’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요. 그럼 더 잘해야죠.”

한 동료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신, 진짜 도시를 살리는 사람이에요.” 그 말이 유난히 오래 귓가에 남았다.


준호 – 병원 복도

같은 시간, 준호는 병원 데이터실로 향하고 있었다. 휴대폰 뉴스 알림이 떴다.〈에코 시티 건설 붐, 청년 일자리 확대〉그는 잠깐 멈춰 화면을 봤다. 윤서가 웃으며 나무를 심는 사진이 기사에 실려 있었다.

‘같은 나이, 같은 반이었는데…나는 여전히 데이터만 정리하는데.’

그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


장면 7: 두 개의 심장박동


준호 – 병원 기숙사 방

작은 스탠드 불빛이 책상 위를 비췄다. 오늘도 데이터 검토 보고서가 화면에 가득했다. 환자 얼굴 대신 숫자와 그래프가 그의 하루를 채웠다.

준호는 손목을 주무르며 모니터를 껐다.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귀에는 자신 심장 소리만 울리는 듯했다.

‘내가 정말 사람을 살리고 있나? 아니면 그냥… 기계의 부속품인가?’

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손끝에서 아직도 프린팅된 인공 심장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윤서 – 프로젝트 캠프 숙소

작업용 장갑을 벗어놓고,윤 서는 오늘 심은 나무 사진을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낮에 웃던 아이들의 얼굴이 화면 위에 겹쳤다.

‘이 아이들이 자라날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창밖에서는 모래바람이 지나가고,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윤서는 작은 모종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우리가 길을 열었어. 이제 도시가 다시 숨을 쉬겠지.”

그녀의 손끝엔 아직 흙냄새가 남아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자, 하루의 피로가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방 안 공기는 이상하게도 살아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같은 시간, 같은 세상.한쪽의 심장은 기계가 대신 뛰는 세상 속에 멈춰 있는 듯했고,다른 쪽의 심장은 도시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다.두 개의 심장박동이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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