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그림자

30녀,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

by 토사님

2033(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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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손이 닿지 않는 해부학

의학관 강의실은 냄새가 없었다. 예전이라면 은은하게 퍼지던 방부제 냄새 대신, 차갑고 깨끗한 전자 냄새가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줄지어 놓인 해부 시뮬레이터들이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투명한 홀로그램이 인체를 3D로 띄워 올리자, 학생들은 그 앞에서 VR 글러브를 낀 채 손짓만 했다. 장기들은 살아있는 듯 움직였지만, 실제 감촉은 전혀 없었다.

강의실 앞에 선 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 이 과정을 마치면 실제 시술은 졸업 후에 하게 될 겁니다. 현재 커리큘럼은 AI 시뮬레이션 중심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흘렀다. 누군가는 안도 했고,누군가는 불안했다.

준호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사람을 살린다고?…손끝에 온기 하나도 못 느끼는데?’

눈앞에 뜬 가상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규칙적인 리듬. 완벽한 데이터. 그러나 그 심장은 따뜻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성공하기 위해선 적응해야 하는 공간,그게 이곳의 분위기였다.

준호는 홀로 앉아 VR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다. 손을 비벼보았다. “사람 몸… 진짜 만져본 게 언제였더라?” 작은 혼잣말이 입술을 스쳤다.

밖으로 나오는 길, 창밖 캠퍼스가 보였다. 늦겨울 햇살이 비쳤지만, 준호의 손끝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장면 2: 흙냄새 나는 손

버려진 철도 부지가 변해가고 있었다. 녹슨 철로 옆에는 새로운 땅이 갈라졌고, 그 사이에서 풀과 꽃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윤서는 무릎을 꿇고 작은 수질 센서를 물가에 설치했다. 옆에서 자원봉사 학생들이 웃으며 삽질을 하고 있었다. “이 흙 진짜 오랜만이다. 손에 다 묻네.” “그래도 재밌다. 여기 예전에 그냥 폐허였잖아.”

윤서는 얼굴에 묻은 흙을 손등으로 닦았다. 땀과 흙이 섞여 손끝이 묵직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센서 연결 완료! 데이터 올라간다.” 노트북에 뜬 숫자가 푸르게 빛났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손에 작은 나무 모종을 들고 있었다. “언니, 이거 심으면 우리 집 시원해져요?” 윤서는 순간 멈칫하다가 웃었다. “응, 바람이 더 잘 통하게 될 거야. 여름에 조금 더 시원해질 거야.” 아이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작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함께 둘러앉았다. 흙냄새와 바람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손끝에 여전히 진흙이 묻어 있었다. 윤서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살아 있는 걸 살리는 일.’

멀리서 철새 떼가 날아올랐다.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바람이 지나갔다. 윤서는 그 바람 속에서 웃었다. 손끝에서 여전히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장면 3: 사람 대신하는 손

카페 안, 벽걸이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AI 외과 수술 성공률 100% 달성〉화면에는 로봇 팔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환자의 장기를 봉합하는 모습이 크게 잡혔다 .앵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수술 성공률 발표 이후,젊은 의사 30%가 재교육 대상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카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와… 이제 진짜 의사 필요 없는 거 아냐?” “AI가 더 정확한데, 누가 사람 손 믿겠어.”

준호는 커피잔을 들고 화면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살짝 굳어졌다.

‘수술… 그게 의사의 핵심 아니었나? 근데 그걸 기계가 더 잘한다고?’

주변 대화가 계속 들려왔다. “의사도 AI랑 경쟁해야 하는 시대라니… 웃긴 세상이다.” “아들 의대 보낸 집들 지금 난리라더라.”

준호는 잔을 내려놓았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내가 뭘 믿고 뛰어왔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오늘 해부 시뮬레이션 복습 미완료〉준호는 천천히 화면을 꺼버렸다.

같은 시간, 윤서는 포럼 자료를 준비하며 이 뉴스를 봤다. “의사 역할이 이렇게 빨리 바뀌다니…사람이 진짜 해야 하는 건 뭐지?” 그녀의 손끝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기후 난민 친화 도시 설계 모델〉이라는 제목이 저장됐다. 윤서의 표정에는 확신이 떠올랐다.


장면4. 멈춘 기계, 움직인 손

수술실이 정적에 잠겼다. AI 수술 로봇의 팔이 갑자기 멈춰 섰다.〈 오류 코드 47 – 데이터 불일치 〉라는 빨간 경고가 화면에 떠올랐다.

환자의 심박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냉정한 기계음이 울렸다. “의료진은 안전 매뉴얼 12-3조에 따라 대기하십시오.”

준호는 손끝이 저릿했다. 머릿속에서 규정 문구가 스쳤다. “AI 시스템 오류 시 직접 개입 금지.” 하지만 환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끊어질 듯 얕았다.

“도구 주세요.” 동료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준호, 규정 위반이야!” “시간 없어!”

준호는 메스를 잡았다. 손끝에서 땀이 흘렀지만, 움직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몇 초 뒤, 환자의 심장박동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초록색 그래프가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퍼졌다. 그러나 스피커는 냉정했다. “규정 위반 감지. 책임 보고 절차를 시작합니다.”

준호는 메스를 내려놓았다. 환자가 살아났음에도, 그의 이름 옆에는 빨간 경고등이 깜박였다. 동료가 낮게 중얼거렸다. “…넌 문제될 거야.”

밤, 휴게실. TV 화면에 윤서가 있었다.〈 도시 설계 혁신상 – 기후 난민 친화 도시 모델 〉해외 언론 인터뷰 중이었다. 윤서의 손끝엔 흙이 묻어 있었고, 눈빛은 환하게 빛났다.“우린 살아 있는 걸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준호는 손목을 감싸쥐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지?”잠시 뒤, 책상 위 학회 신청서를 찢어버렸다. 종이 조각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휴게실 불빛이 파랗게 깜박였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조금 전 수술실에서 처럼 뜨거웠다.


장면 5: 도시를 살리는 손

국제 포럼 회의장. 천장 끝까지 닿은 스크린에 푸른 지구가 회전하고 있었다. 각국 대표석에 앉은 전문가들과 학생들이 조용히 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이크 앞에 선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윤서, 도시생태설계 전공 3학년입니다. 오늘 제가 발표할 주제는 ‘기후 난민 친화 도시 설계 모델’입니다.”

스크린에 도시 모형이 뜨자, 청중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흘렀다. 재활용수 순환 시스템, 폭염 완화를 위한 수직정원, 난민 임시 주거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커뮤니티 구조…윤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우리가 도시를 다시 설계한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숨 쉴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갈 이유 아닐까요?”

발표가 끝나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곧 이어 터진 박수소리가 회의장을 메웠다. 국제 방송 카메라가 윤서를 비추었다. 한 외신 기자가 다가왔다. “당신 인생에 이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윤서는 웃었다. “살아 있는 걸 포기하지 않기 위해 하는 거예요.”

그 순간, 윤서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마치 방금 심은 모종이 햇빛을 머금고 싹을 틔우려는 듯했다.


장면 6: 같은 테이블, 다른 그림자

작은 카페, 오후 늦은 햇살이 창문에 부딪혀 부드럽게 번졌다. 문이 열리며 준호가 들어왔다. 흰 셔츠에 걸친 가운 자국, 밤샘 근무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윤서는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옆에 포럼 발표 자료가 놓여 있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예전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서 뛰어놀던 기억이어색하게 스쳐갔다.

“너… TV에 나오던데. 잘 나가더라.”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피로와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윤서가 웃었다.“고마워. 너도 의사잖아. 잘 지내?” 준호는 커피잔을 돌리며 대답했다. “…응. 잘 지내. 바쁘지 뭐.”

짧은 침묵. 카페 안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준호의 손가락이 커피잔 위를 맴돌다 멈췄다.

‘내가 하는 건 환자 대신 데이터 확인이잖아 .윤서, 너는 진짜 뭔가를 만들고 있는데…’

윤서가 물었다. “혹시… 힘들어 보여. 괜찮아?” 준호는 눈을 피하며 웃었다. “괜찮아. 다들 이렇게 사는 거잖아.” 그 대답은 너무 가벼워서,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윤서는 조용히 커피를 들었다. “그래도…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찾으면 좋겠다.” 준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커피잔에 비친 자기 얼굴이 피곤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장면 7: 다른 불빛, 다른 꿈


준호 – 병원 데이터실

컴퓨터 모니터 불빛이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환자 차트, AI 진단 로그, 약물 처방 승인 기록. 그는 환자와 얼굴을 마주한 시간이 오늘 하루 단 10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이게 내가 꿈꾸던 의사의 모습이었나?’

모니터에 반사된 얼굴이 피곤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깊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병원 복도에는 자동 청소 로봇이 지나갔다 .인간의 발자국보다 기계음이 더 많은 공간. “오늘도 잘한 거야… 아마도.” 준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윤서 – 작업실

작업실 한켠, 작은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윤서는 오늘 회의에서 받은 메모를 펼쳐놓았다. 종이에 새겨진 손글씨가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손에 흙냄새가 남은 걸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작은 식물 화분에 손끝을 얹었다. “조금만 더 크면, 마당에 옮겨 심자.” 작은 생명의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윤서는 다음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적었다.〈폭염 취약 지역을 위한 도심 냉각 숲〉글자를 쓰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작업실 공기는 미래를 설계하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한쪽은 차갑고 푸른 불빛 속에서 반복되는 데이터 업무, 다른 한쪽은 초록빛 아래 꿈을 확장하는 손길. 같은 밤이었지만, 두 사람의 하루 끝은 전혀 다른 온도와 숨결을 품고 있었다.

준호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손을 멈췄다. 차갑게 빛나는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이 맞아?”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향한 곳은 오래전 윤서를 만났던 그 카페였다.


장면8. 다시 만난 자리:열려 있는 문

늦은 오후, 카페 창가 자리에 앉은 윤서는 노트북을 닫았다. 창밖엔 가을 햇빛이 부드럽게 흘렀다. 문이 열리고 준호가 들어왔다. 하얀 가운 대신 평범한 셔츠 차림,그러나 얼굴엔 여전히 피로가 묻어 있었다.

둘은 짧게 웃었다. “잘 지냈어?” 윤서가 먼저 물었다. “그럭저럭. 너야 뭐… 뉴스에서 잘 보이더라.” 준호의 목소리에 피로와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잠시 대화가 이어졌다. 준호는 커피잔을 돌리며 눈을 피했다. 윤서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찾으면 좋겠어.”

준호의 손이 멈췄다. 말없이 커피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예전보다 조금 더 지친 모습.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윤서야… 너 다음 프로젝트에… 의사도 필요해?”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분명했다.

윤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같이 해볼래?”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창밖으로 노을빛이 번졌다. 그 빛이 두 사람 얼굴에 동시에 닿았다.작은 가능성이 열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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