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일
교무실 앞 게시판 앞이 붐볐다. 성적표가 붙은 지 5분도 되지 않아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모두의 시선은 맨 위, 첫 번째 칸에 멈췄다.
〈전국 모의고사 1등 – 김준호〉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흘렀다. “와… 쟤 진짜 전국 1등이래.” “인간 맞아? 공부 머신 같아. ”아이들의 목소리는 부러움과 거리감이 뒤섞여 있었다.
준호의 엄마가 성큼 다가왔다. 휴대폰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속해서 울렸다. “우리 아들, 드디어 의대 보장반이야!” 엄마의 얼굴엔 기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 웃음은 준호에게로 향했지만, 준호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1등… 이제 됐네. 목표는 달성했어.’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가슴 속이 시원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친구들이 조금 뒤에서 서서 말을 아끼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는 같이 뛰던 아이들인데, 이제는… 멀리 서 있었다.
엄마가 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기특하다, 진짜. 이거 아빠한테 바로 보내야겠다.” 준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하지만 그 미소가 오래 가지 않았다. 게시판 위 작은 종이에 적힌 자기 이름이 자랑스럽다기보다,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멀리서 축구공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웃고 있었다 .준호는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뒀다. ‘난 이 길을 택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사립 입시학원 7층, 〈의대 보장반〉이라고 적힌 문이 열렸다. 새하얀 형광등 불빛이 책상 위를 가득 채웠다. 벽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걸려 있었다. 학생별 성적 그래프와 시간 관리표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담임 강사가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축하합니다. 여기는 실패가 없는 클래스입니다.” 그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이상하게 차갑게 들렸다. 준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문제집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표지에는 '의대 합격률 100%를 향하여' 라고 적혀 있었다.주변 학생들은 말이 거의 없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태블릿과 책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숨소리와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들렸다.
‘여기가 내 자린가… 앞으로 평생 이 속도에 맞춰 살겠지.’ 준호는 손가락으로 문제집 표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차갑게 코팅된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뭔가가 뒷목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성공을 향한 길인데도… 숨이 답답했다.
강사가 다시 말했다. “오늘부터는 개별 학습량을 AI가 직접 관리합니다. 쉬는 시간도 자동으로 조정될 거예요.” 모니터에 새로운 알람창이 뜨며 학생 이름 옆에 ‘집중도 지수’가 표시됐다. 준호 옆자리 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감옥 같다 그치?” 그러곤 바로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들을까 봐.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펜을 쥐었다 .머릿속으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성공만 남았어.”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말은 달랐다. ‘정말 이게… 내가 원하는 건가?’
국제회의실을 본뜬 대형 강당. 정면 스크린에는 지구 모형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각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책상 위에 놓였고, 학생들은 그 앞에서 대표단 역할을 맡았다.
윤서는 ‘도시 생태 회복과 기후 난민 수용 정책’이라는 플래카드를 책상에 붙였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마이크를 잡는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의장님, 대표단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걸 살릴지, 아니면 포기할지.”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윤서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녀는 도시 텃밭, 빗물 순환 시스템, 폭염에 취약한 지역 공동체 지원안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자, 한순간의 정적 뒤에 박수 소리가 터졌다.
“결의안 채택 1위, 대한민국 대표 윤서 팀.”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윤서의 이름이 스크린에 크게 떴다. 주변 학생들이 박수를 보내며 손을 내밀었다.“너 진짜 멋지다, 윤서야.” “너 덕분에 생각이 바뀌었어.”
기자가 다가왔다. “이 활동을 왜 시작했나요?” 윤서가 살짝 웃었다. “살아 있는 걸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요.” 그 대답에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윤서는 배지를 가방 끈에 달았다. 초록빛 잎사귀 모양이었다. 작은 금속 배지가 햇빛에 반짝였다. 그 순간 윤서는 알았다. ‘이게 내가 가고 싶은 길이야.’
저녁 뉴스 화면에 세계지도가 떴다. 적색 경보 지역이 퍼져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긴박하게 울렸다.
“지구 평균 기온이 1.9도 상승하며, 동남아·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폭염 난민 50만 명이 발생했습니다. 각국 정부가 긴급 구호 대책에 나섰습니다.”
화면 속 공항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손수레와 비닐 가방을 끌며 이동하고 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 아이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폭염 난민, 사상 최대 규모〉라는 자막이 굵게 떴다.
학원 휴게실 – 준호
준호는 문제집을 덮으며 무심코 TV를 봤다. 옆자리 학생이 중얼거렸다. “진짜 심하네… 근데 우리도 위험한 거 아냐?” 준호는 잠시 화면을 보다가 곧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학습 앱 알람이 울렸다.〈오늘 목표 20% 미달〉“…공부나 해야지.”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윤서의 집 – 거실
윤서는 식탁 위에 포럼 자료를 펴놓고 있었다. 뉴스 화면이 나오자 손이 멈췄다. 작은 아이가 엄마 품에 매달려 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윤서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저 아이들… 학교도 못 가겠네.”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희 같은 애들이 중요한 거야.” 윤서는 노트를 다시 펼쳤다.〈도시 녹지 확충·기후 난민 대책 제안〉새로운 제목을 적었다. 눈빛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같은 뉴스를 본 두 사람. 한쪽은 학습량 알람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다른 한쪽은 미래를 바꾸려는 결심으로 손을 움직였다. 폭염보다 뜨거운 것은, 각자가 달려가는 길의 온도 차였다.
저녁 뉴스 화면에 굵은 자막이 떴다.〈AI 의료 진단 정확도 99.8%… 인간 전문의 첫 추월〉
앵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AI 의료 진단 시스템이 정확도에서 인간 전문의를 공식적으로 넘어섰습니다. 특히 영상 판독과 초기 진단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보였습니다.”
화면에는로봇 팔이 환자의 CT 이미지를 스캔하고,가상 홀로그램으로 병변 부위를 표시하는 장면이 나왔다. 뒤이어 나오는 환자 인터뷰: “AI가 제 병을 더 빨리 찾아줬어요. 사람이 보는 것보다 믿음직하더라고요.”
학원 보장반 휴게실 – 준호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야, 진짜 이제 AI가 의사 대신하는 거 아냐?” “우리 공부 이렇게 해서 뭐해…?” 누군가가 툭 던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준호는 무심한 척 TV를 봤다. AI가 환자의 진단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차갑지만 매끄러운 목소리. ‘저게… 진짜 가능하다고?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손목에 힘을 주었다. 문제집을 다시 펼치며 중얼거렸다. “관계없어. 나는 의사 될 거니까…” 그러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윤서의 방
윤서는 기후 포럼 발표 준비를 하다가 뉴스 알림을 봤다. “AI 진단 정확도 인간 추월…” 그녀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혼잣말했다. “사람이 하는 일, 많이 바뀌겠네…그럼 진짜 중요한 건 뭐지?” 그녀는 발표 자료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기후와 생태,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일〉
AI가 만든 진단 결과는 완벽한 데이터였다. 그러나 그 순간, 준호의 꿈은 미세하게 흔들렸고, 윤서의 꿈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두 사람의 마음에 전혀 다른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장면 6: 의사단체 파업 : 흰 가운의 거리
여름 끝자락, 도심 한복판이 시끄러웠다.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 대신 거리로 나와 있었다.피켓에는 굵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AI가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의료 공백 책임은 정부에 있다〉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도로를 메웠다.“의료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 지켜야 한다!”그러나 맞은편에 선 시민들 중 일부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AI가 더 잘하는데 왜?”작게 새어나오는 목소리들이 섞였다.
TV에는 흰 가운 행렬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준호 엄마가 TV를 보며 말했다. “봐라, 그래서 더 완벽한 의사가 돼야 하는 거야.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그게 돼야 한다.” 그 목소리는 결연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 휘날리는 피켓이 눈에 들어왔다.〈AI OUT〉〈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순간, 자신의 미래가 그 피켓 속 얼굴들과 겹쳐졌다. ‘나는 뭐가 다르지? 내가 하는 것도 결국 데이터 처리 아닌가?’ 짧은 생각이 스쳤다.
엄마가 다시 물었다. “듣고 있니? 의사만큼 확실한 길이 없어. ”준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응… 알았어.” 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풀어야 할 문제집 페이지가 아직 절반 남아 있었다.그 런데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윤서의 방
윤서는 다른 뉴스 화면을 보고 있었다. 파업 장면과 함께 폭염 난민 캠프 뉴스가 이어졌다. 그녀는 노트를 펼쳤다. “AI가 의사를 대신한다면…사람이 해야 할 진짜 일은 뭘까?” 그 질문이 손끝에서 글씨로 변해 갔다.〈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돌봄과 자연 회복〉윤서의 눈빛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거리는 흰 가운으로 가득했고, 각자의 집에서는 서로 다른 결심이 쌓이고 있었다. 준호는 흔들림을 억누르려는 결심을, 윤서는 세상을 바꾸려는 결심을.
준호의 집 – 파란빛 아래
책상 위 태블릿에서 푸른 불빛이 새어 나왔다.〈오늘 학습량 87% 완료〉라는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준호는 손목을 주무르며 남은 문제집 페이지를 넘겼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TV에서 낮의 파업 장면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AI가 진단을 대신하고, 의사들이 거리로 나왔는데…나는 왜 이 길에 이렇게 매달리고 있지?’
생각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곧 억지로 삼켜졌다. 엄마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조금만 더 하면 의대는 문제없어.” 준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응, 조금만 더…” 하지만 책상 위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흰 가운 대신 차가운 파란빛 그림자였다.
윤서의 집 – 초록빛 아래
윤서는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있었다. 오늘 모의 유엔 회의에서 받은 1위 증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옆에는 폭염 난민 캠프 사진이 놓여 있었다. 윤서는 포럼 발표 자료를 정리하다가, 작은 식물 화분에 손을 얹었다. “사람이 해야 할 일… 포기하지 않는 거야.” 조용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화분 잎에 스탠드 불빛이 부드럽게 비쳤다. 방 안의 공기는 흙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한쪽은 파란빛 아래 의무처럼 공부하는 소년, 다른 쪽은 초록빛 아래 희망을 정리하는 소녀.두 개의 불빛은 마치 서로 다른 미래를 예고하는 신호 같았다.
저녁 햇빛이 학원 건물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의대 보장반 → 7층 〉이라는 안내판 옆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빠져 나오고 있었다. 윤서는 포스터 몇 장을 들고 걸음을 멈췄다.〈 기후 포럼 – 도시를 살리는 길 〉연두빛 로고가 선명했다.
“윤서?”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였다. 학원 가방이 한쪽 어깨에 걸려 있었고, 얼굴엔 피곤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윤서가 먼저 웃었다. “오랜만이네. 여기 다니는구나?”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이쪽 말고는 길이 없으니까.” 그 말투는 어딘가 단단했지만, 동시에 조금 건조했다.
윤서는 손에 든 포스터를 보여줬다. “내일 우리 포럼 해. 기후랑 도시 생태 얘기하는 거야. 혹시—”준호가 말을 끊었다. “윤서야, 세상 그렇게 바뀌어? 결국 안전한 직업이 있어야 살아남는 거잖아.”
윤서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안전하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잖아. ”준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거 하는 거야. 의사 되면 적어도 불안하진 않으니까.” “근데… 네가 하고 싶은 거 맞아?” 윤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준호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학원 건물 유리창에 비친 파란빛 간판이 반짝였다. 윤서는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안전하지만… 의미 없는 삶, 괜찮아?”
준호가 그녀를 바라봤다. 말하려다 멈춘 입술이 조금 떨렸다. 잠시 뒤, 그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우린… 그냥 다른 길 가는 거 같네.”
윤서는 포스터를 고쳐 들었다. “응. 다른 길.” 둘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저녁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늘였다.한쪽은 파란빛 간판 아래, 다른 한쪽은 연두빛 포스터 아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