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그림자

30년,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일

by 토사님

2027 (12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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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포기한 축구공

해 질 무렵, 운동장에 저녁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아이들이 축구공을 차며 뛰어다녔다.웃음소리가 운동장 모래 위에서 반짝였다.

“준호야, 같이 뛰자! ”골대 앞에 서 있던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공이 준호 쪽으로 굴러왔다 .발끝 가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췄다.

준호는 잠시 공을 내려다봤다. 가방끈을 움켜쥔 손이 조금 더 꽉 졌다. “나 학원 가야 돼… 다음에 하자. ”목소리가 의외로 작았다.

친구들이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또 학원이야? 진짜 바쁘다, 너.”“대단하긴 한데… 좀 안쓰럽다.”작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을 발끝으로 살짝 밀었다. 공은 천천히 친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그의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였지?’ 짧은 생각이 스쳤지만, 곧 지웠다.

가방끈이 어깨를 눌렀다 .“다녀올게!” 하고 말했지만, 친구들 쪽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경기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운동장을 벗어나며 뒤돌아 보았다. 해가 기울며 긴 그림자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 그림자 속에,굴러가는 축구공이 홀로 반짝였다.


장면 2: 살리고 싶은 것들

시청 청소년 회의실은 북적였다.각 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손에 자료를 들고 모였다. 앞쪽 스크린에는 초록빛 지도가 크게 떠 있었다. 도시 텃밭, 빗물 정원, 생태 회랑…윤서는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마이크가 손끝에서 살짝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시 생태 모임 대표, 박윤서입니다.” 목소리가 처음에는 조금 떨렸지만, 곧 또렷해졌다.“우리는 버려진 공간에 텃밭을 만들었고, 곤충 호텔을 설치해서 도시 생태계를 조금 더 다양하게 만들었어요. 작은 거지만, 이 변화가 도시를 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발표가 끝나자 박수가 회의실을 채웠다. 한 기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이 활동을 왜 시작했나요?” 윤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살아 있는 걸 살리고 싶어서요.”

플래시가 터졌다. 윤서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주변에 있던 다른 학교 학생이 다가와 말했다. “너 진짜 멋지다. 다음에 우리 동네에도 와줄래? ”윤서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같이 하자.”

포럼이 끝난 뒤, 윤서는 작은 기념품을 손에 쥐었다. 나뭇잎 모양의 작은 배지였다. 가방 끈에 달자, 햇빛이 반짝였다.그 순간 윤서는 알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구나.’


장면 3: 사회 뉴스 : 불안한 숫자

저녁, 준호의 집 거실 TV가 켜져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올해 의료보험 재정 적자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습니다. 고령화와 의료비 급증이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의료보험 적자 12조 원… 역대 최대〉

준호 엄마는 부엌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이래서 네가 의사 돼야 안전한 거야. 의사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 직업이잖아.” 그 목소리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다.

준호는 식탁에 앉아 문제집을 넘기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대답했다.“응…”하지만 눈은 잠깐 TV 화면으로 향했다.그래프가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빨간 숫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왜 이렇게 많이 줄어들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곧 다시 눈을 문제집으로 돌렸다.

한편, 윤서의 집. 엄마와 함께 포럼 사진을 정리하다가 뉴스 소리를 들었다. 윤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의료보험이 왜 적자인 거야?” 엄마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병원에 돈이 많이 드니까 그렇지. 그래서 네가 하는 거, 환경 지키는 거…결국 다 연결되는 거야. ”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속 숫자는 여전히 붉게 깜빡였다. 불안은 숫자로도 충분히 전해졌다.하지만 두 집의 반응은 달랐다. 하나는 더 강하게 안전한 길을 붙잡으려는 집, 다른 하나는 세상을 조금씩 바꾸려는 집이었다.


장면 4: 목소리만 있는 선생님

준호의 방은 어둑했다. 책상 위 태블릿 화면만 파랗게 빛났다. 앱 속 가상의 학습 코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중력을 유지하세요, 준호 학생.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화면에는 그래프와 시간표가 떴다. 오늘 해야 할 과목별 학습량, 그리고 준호의 집중도 점수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점수 옆에는 작은 별이 깜박였다.〈목표 달성까지 25분 남음〉

준호는 연필 대신 스타일러스를 쥐었다. 앱에서 내준 문제를 풀며 손가락으로 정답을 입력했다. AI 목소리가 칭찬했다.“정확합니다. 평균보다 빠른 속도입니다.” 그 칭찬이 어쩐지 기계음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지진 않았다.

휴대폰이 한쪽에서 울렸다. 친구 단톡방.〈오늘 축구 한 판 더?〉준호는 알림창을 올려다보다가 곧 닫았다. “나 지금 공부 중이야.”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앱의 마지막 멘트가 들려왔다. “오늘 학습량 달성.준호 학생은 상위 1% 성취 그룹입니다.” 화면 한쪽에 환하게 웃는 가상 교사의 얼굴이 떴다. 그러나 준호의 얼굴은 웃지 않았다. 그저 태블릿 화면에 비친 파란빛 속에서조금 더 무표정해졌다.


장면 5: 초록색 식판

점심시간, 급식실 문 앞이 소란스러웠다. 오늘부터 시행된 새로운 제도 때문이었다. 배식대가 두 줄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일반식, 다른 한쪽은 채식 메뉴. 초록색 글씨로 쓰인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지구를 위한 채식 선택제〉

윤서는 잠시 줄 앞에서 멈췄다.친구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야, 진짜 채식 줄 가는 애 있을까?”“배부르겠냐 그걸로?”

윤서는 웃으며 채식 줄로 걸어갔다. 식판 위에 콩 단백 스테이크와 채소볶음이 담겼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야, 윤서 토끼냐? 그거 맛있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윤서는 돌아서며 대답했다. “지구 생각하는 거야.” 그 말에 웃음소리가 순간 멈췄다. 친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쩐지 장난이 이어지지 않았다.

윤서는 식판을 들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초록색 식판 위 음식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녀는 조용히 포크를 들었다. ‘내가 믿는 걸 하는 거니까.’ 작은 생각이 입가를 살짝 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은 여전히 뿌옇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흘러왔다. 하지만 윤서의 자리는 작은 확신의 공간 같았다.


장면 6: 서로 다른 불빛

준호의 집 – 파란빛 방

방 안은 태블릿 불빛 하나만 켜져 있었다. AI 학습 앱의 화면이 파랗게 깜박였다.〈오늘 학습량 120% 달성〉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가상 교사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준호는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태블릿을 덮었다. 손목이 조금 뻐근했다. “이제 자야지…” 혼잣말을 했지만 눈꺼풀은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친구들의 웃음소리도, 누군가 불러주는 목소리도 없었다. 단지 효율적으로 정리된 하루가 남아 있었다.


윤서의 집 – 작은 초록빛

윤서는 책상 위에 오늘 포럼에서 받은 배지를 올려놓았다. 나뭇잎 모양의 작은 배지. 그 옆에는 채식 급식 메뉴 사진이 붙은 환경 포럼 전단지가 놓여 있었다.

“오늘 재미있었지?” 엄마가 물었다. 윤서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친구들이 놀리긴 했는데… 상관없어. 나 하고 싶은 거 하는 거니까.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윤서는 화분에 물을 주었다. 작은 새싹이 빛을 머금은 듯 흔들렸다. 방 안에는 흙냄새와 은은한 초록빛이 있었다.윤서는 침대에 누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걸 살리고 싶어.’ 그 생각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부드러운 불빛 같았다.

같은 시간, 같은 나이.한쪽은 차갑게 효율적인 파란빛, 다른 한쪽은 살아 있는 초록빛이었다. 두 아이의 길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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