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그림자

2026-11살

by 토사님

2026 (1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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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작은 리본, 긴 그림자

학교 복도 – 여름 오후 (2026년 무렵)

준호가 과학 경시대회 준비로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었다.
“아, 졸리네.”
그는 종이컵 두 개를 겹쳐 들었다. 뜨거움이 싫어서였다.
종이컵은 그 자리에서 이미 하나 쓰레기가 됐다.

윤서의 등장

윤서가 종이컵을 들고 서 있는 준호를 보며 말했다.
“왜 두 개나 써? 그냥 하나만 쓰면 되잖아.”
준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냥… 버리면 되잖아.”
윤서: “버리면 끝인 줄 알지? 그게 쌓이면 어디로 가는 줄 알아?”
준호: “쓰레기장?”
윤서: “바다로, 흙으로. 결국 우리가 마시게 될 거야.”

작은 긴장

준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그거 하나 줄인다고 세상이 달라져?”
윤서가 준호의 종이컵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적어도 내 세상은 달라져.
난 오늘 이거 하나 덜 버렸으니까.”

결말 이미지

준호는 말없이 종이컵 하나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한 컵을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그런데 왜 조금 찔리지?’
윤서는 복도를 지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날의 이 작은 대화는 훗날 두 사람의 길이 완전히 달라지는
아주 미세한 첫 균열이었다.


복도 끝이 유난히 북적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게시판 앞에 서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 적힌 이름들, 그리고 맨 위에 커다란 동그라미와 금빛 리본.〈1등 – 김준호〉

“와, 또 준호네…”“대단하긴 한데…”뒤에서 작은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부러운 눈빛으로, 누군가는 살짝 질린 듯한 표정으로.

엄마가 성큼 다가왔다.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최고야.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결과가 나오지 .”플래시가 반짝이며 게시판에 잠깐 그림자를 만들었다.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 미소가 오래가진 않았다. 친구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되, 어쩐지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함께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살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이게 좋은 건가… 나만 잘하는 게…”

그는 잠깐 주머니 속 연필을 만졌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학원 스케줄, 엄마의 시간표, 그리고 늘 “준호는 잘해야 해”라는 말. 그 모든 것이 오늘 성적표 위 작은 리본으로 압축된 것 같았다.

엄마가 다시 말했다.“이따 집에 가서 아빠한테도 보여주자.다음은 전국 대회야, 알지?”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

하지만 그의 시선은 게시판 모서리로 미끄러졌다. 다른 아이들의 이름 옆에 붙은 작은 점수들, 그리고 친구들이 몰래 웃으며 나누는 말들. 그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준호는 억지로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자랑스러운데, 조금 외로운 미소.리 본은 작았지만, 그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장면 2: 생태 모임의 리더 - 작은 집을 지은 아이

학교 뒤편 작은 정원. 낡은 벤치와 화단 옆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윤서가 나무토막과 대나무 줄기를 맞추며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자, 이렇게 하면 벌레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어.” 작은 ‘곤충 호텔’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거 진짜 괜찮을까?” 친구 하나가 묻자, 윤서가 환하게 웃었다. “물어볼 거면 벌레한테 물어봐.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걸어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환경일기 우수상〉이라고 적힌 상장이었다. “윤서 학생, 이번 지역 환경일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네. 축하해. ”교장은 미소를 지으며 상장을 내밀었다.

“우와!” 친구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윤서가 두 손으로 상장을 받았다. 얼굴이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저 그냥 식물들 얘기 썼는데…”“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네가 관찰한 걸 글로 남겼잖아.”

작은 사진기 셔터 소리가 들렸다. 지역신문 기자였다. “하나만 더 웃어볼래요?” 윤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활짝 웃었다. 흙이 묻은 손끝이 햇빛에 반짝였다.

옆에서 친구들이 속삭였다. “윤서 진짜 대단하다. 벌레랑 식물 얘기만 하더니 상까지 타네.” “우리 내일도 여기 와서 벌레 호텔 완성하자!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내일은 지붕도 씌우자. 비 오면 안 되니까.”

작은 정원에 웃음소리가 번졌다. 흙 냄새와 햇살이 아이들 사이에 가볍게 부딪혔다. 윤서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너무 가벼웠다. 아무도 리본을 붙여주진 않았지만, 이 순간이 진짜 상 같았다.


장면 3: 사라지는 교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무실 한쪽에서 TV가 켜져 있었다. 낮은 음량으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흘렀다.

“올해 출산율이 역대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신생아 수는 사상 처음으로 20만 명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일부 지역은 학생 수 부족으로 학교 통폐합이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자막이 화면 아래로 흘러갔다.〈출산율 역대 최저… 학급 수 대폭 축소 전망〉

교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선생님 하나가 TV를 흘끗 보며 말했다. “이대로면 몇 년 뒤엔 학급 절반이 사라지겠어요. ”옆자리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아이들이 귀한 시대가 됐네…”짧은 한숨이 흘렀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이들 중 몇 명이 그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아이는 없었다. 준호는 게시판 앞에서 아직도 아까의 성적표를 바라보고 있었고, 윤서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학급이 줄어든다는 게 뭐야? ”한 친구가 묻자 다른 친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그냥 반이 줄어든다는 거 아냐?” 아이들은 금세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새 로 산 킥보드 얘기, 내일 체육시간 얘기. 어른들의 한숨과 숫자는아이들의 하루 속에서 금방 지워졌다.

TV 화면은 계속해서 저출산 대책을 읊었다. “보육 지원 확대와 청년 주거 지원이 핵심 과제로…”하지만 교무실 바깥으로 나간 아이들은 이미 시끄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복도 끝까지 번져나갔고, 뉴스 속 차가운 숫자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장면 4: 자율주행 버스 : 운전석이 없는 버스

하교 시간, 학교 정문 앞이 분주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무언가를 가리키며 웅성거렸다. 회색 차체에 매끈한 곡선을 가진 버스가 조용하게 서 있었다. 앞유리에 큼지막하게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자율주행 시범 운행〉

“와… 진짜 사람이 없어! ”한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운전석 쪽으로 달려갔다. 투명한 유리 너머, 운전석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대신 작은 패널에 불빛이 반짝였다.

버스 문이 ‘쉬익’ 하고 열렸다.안내 로봇의 음성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안전 확인 완료. 승차해 주세요.”

윤서가 친구들에게 말했다.“이거 신기하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아예 없네.” 친구들이 웃으며 차 안으로 올라탔다.좌석 위쪽 모니터에는 버스의 실시간 경로와 주변 센서 데이터가 떠 있었다. “이거 게임 같다!” 누군가 소리쳤다.

준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버스를 바라봤다. ‘사람 없이도 움직인다…’잠깐 생각이 스쳤다. 운전자가 필요 없는 버스. 앞으로 없어질 직업들. 어제 TV 뉴스에서 본 ‘AI 진단 시스템’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나랑은 상관없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버스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소음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윤서는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버스가 골목을 돌자, 주변은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장면 5: 뛰지 못하는 운동장

체육 시간.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공기에는 희미하게 뿌연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의하세요,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전교생은 즉시 실내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또야? 우리 축구하려고 했는데…”누군가 발끝으로 운동장 흙을 툭 찼다.

윤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르러야 할 하늘이, 마치 희뿌연 유리막 너머처럼 흐릿했다.“이래서 공기 정화 식물 심어야 해.”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고개를 갸웃했다.“식물 심으면 뭐가 달라져?” 윤서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교실 창가를 가리켰다. 거기엔 지난주에 심은 작은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다.

준호는 말없이 뒤를 돌아 실내로 걸어갔다. 오늘 밤에도 학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축구 대신 또 다른 문제집이 그의 앞에 놓이겠지. 그는 하늘을 다시 한 번 올려다봤다. ‘공기… 이렇게 뿌얘도 그냥 사는 거네.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지웠다.

교실 안, 창문 너머로 뿌연 하늘이 보였다.아이들은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실내 체육을 시작했다.철봉에 매달린 아이들의 손끝이 바깥 공기와 닿지 못한 채 떨리고 있었다.이제 뛰는 것도 허락받아야 하는 시대였다.


장면 6: 두 집의 불빛

준호의 집 – 형광등 아래

밤 9시.준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문제집은 쌓여 있고, 탁상시계 초침이 짧은 리듬으로 움직였다.엄마는 거실에서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이번 경시대회 1등은 시작에 불과해.전국 대회 준비하려면 학원 시간 늘려야겠다.”준호는 연필을 손에 쥐었다.손목이 뻐근했다.“응…” 짧게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작았다.

형광등 불빛은 너무 하얗고, 그림자는 짧았다.책상 위에서 종이 냄새만이 맴돌았다.오늘 운동장에서 뛰지 못한 답답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준호는 창문을 슬쩍 열었다.하지만 바깥 공기는 뿌연 먼지 냄새뿐이었다.바람은 없고, 숨만 탁했다.

윤서의 집 – 흙냄새와 웃음

윤서는 작은 마당 평상에 앉아 있었다.엄마와 함께 저녁에 수확한 상추를 씻어내며 말했다.“오늘 미세먼지 때문에 체육 못 했어.애들 다 싫어하더라.”엄마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네가 화분 늘리자고 했구나?”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식물이 공기 정화도 하고 예쁘잖아.”평상 위에 올려둔 환경일기 상장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고양이가 그 옆에 앉아 졸고 있었다.

윤서는 손끝에 남은 흙을 가만히 바라봤다.살아 있는 감촉이었다.엄마가 부드럽게 웃었다.“네가 좋아하는 거 계속 해.다른 애들처럼 바쁘게 살지 않아도 돼.”윤서는 웃으며 대답했다.“나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

두 집의 불빛은 같은 시간에 켜져 있었지만,하나는 형광등 아래 조용히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소년,다른 하나는 흙냄새와 웃음 속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녀였다.같은 나이, 같은 반.그러나 이미 서로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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