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의 그림자

30년, 두 아이가 만든 서로 다른 내일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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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병원은 썰렁했다.예전 같으면 응급실 앞 복도가 분주했을 시간,지금은 자동 문 진동음만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응급 환자는 이미 AI 트리아지 시스템이 분류해 드론 앰뷸런스로 이송했고, 수술실에서는 로봇 팔이 밤새 쉼 없이 움직였다. 의사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준호는 흰 가운을 입은 채 조용히 모니터 앞에 앉았다. 밤새 로봇이 진료한 기록이 데이터 패드에 쌓여 있었다. 혈압, 심박, 혈중 산소량…모두 정밀하게 분석된 숫자. 그가 할 일은 그 숫자 옆에 ‘확인’ 버튼을 누르는 것이었다.의사가 아니라, 검수자 같았다. 잠깐 손목이 뻐근해졌다. 이틀 전에도 같은 자세로 4시간 동안 버튼만 누르다 손목에 파스까지 붙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의사라는 직업이… 로봇의 그림자가 될 줄이야.”

모니터 불빛이 얼굴을 희게 비췄다. 준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의사가 사람의 숨을 살리던 시절. 환자의 눈을 마주 보며 손으로 맥을 짚던 시절. 이제 그 손은, 하루 종일 데이터 패드를 붙잡고 ‘확인’만 누르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리모컨을 눌렀다. 휴게실 TV가 켜졌다. 아침 뉴스.

“2055 도시생명망 프로젝트, 국제상 수상…”기자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서였다 .흙 묻은 작업복 차림, 햇빛이 스미는 듯한 얼굴.

“이 프로젝트는 도시를 단순히 사는 곳이 아니라, 숨 쉬는 곳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자막이 떴다. 도시를 살린 사람.

준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한쪽 손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내가 선택한 길은… 진짜 내 길이었을까?”

화면 속 윤서의 웃음은 환했고, 준호의 흰 가운 아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졌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은 30년 전, 아직 아무것도 늦지 않았던 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림자 시간표

거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TV는 꺼져 있었고, 벽시계 초침 소리가 공간을 두드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색이 바랜 교과서와 두꺼운 스케줄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얀 조명이 식탁 위로 쏟아져, 책장 가장자리까지 차갑게 비추었다.

“8시 영어, 9시 수학, 10시 과학. ”엄마는 손가락으로 시간표를 짚으며 말한다. “네가 원하는 거 없어도 괜찮아. 나중에 고마울 거야.”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수정할 틈이 없었다. 이미 완성된 퍼즐 같았다. 준호의 하루는, 그가 아닌 누군가의 손에서 설계된 것.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고개는 아래로, 눈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창밖—유리창 너머로, 새벽인데도 이미 뜨거운 열기가 아스팔트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열기가 공기를 뒤틀며 움직였다.마치 달아오른 도로가, 숨 쉬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느릿하게 일렁였다.

엄마는 여전히 시간표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펜촉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다음 페이지로 미끄러졌다. 준호는 그 소리를 듣다가, 잠깐 숨이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싫지는 않았다. 아직은 이게 ‘정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에 남았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목덜미를 살짝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열기로 번들거리는 도로, 느릿하게 지나가는 택시,그리고 나뭇가지 끝에서 간신히 붙어 있는 작은 참새 한 마리. 참새는 잠깐 몸을 털고, 날아오르지 않았다.


작은 밭의 아이 – 윤서의 집

아침 햇살이 기울어 들어왔다. 윤서의 집 마당은 좁았지만, 흙 냄새로 가득했다. 작은 텃밭에 상추와 토마토 모종이 줄지어 서 있었고, 나무 상자에는 제비꽃 몇 송이가 새로 심겨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왔지만, 이 공간만큼은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흘렀다.

“윤서야, 흙 만져봐. 밤새 물을 잘 먹었나 보자. ”엄마가 작은 삽을 건네며 말했다. 윤서는 손바닥으로 흙을 집어 들었다. 축축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채웠다. 그 순간, 모서리에서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야옹—”

길고양이 한 마리가 망설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윤서는 급히 부엌에서 남은 사료를 가져왔다. 고양이는 한참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윤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살린다는 기분. 아주 작은 존재라도 돌보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진다는 느낌.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네 손, 이제 진짜 흙 냄새 난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사이에 낀 흙을 닦지도 않았다. 그 순간, 담벼락 너머로 친구 몇 명이 지나가며 소리쳤다.“야, 너네 집 진짜 밭이야?! ”윤서는 대답 대신 손에 묻은 흙을 들어 보였다. 작은 자부심이 얼굴에 묻어났다.

멀리서 TV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AI 교사 도입, 학부모 반발…”세상은 어른들 때문에 떠들썩했지만,이 작은 마당은 조용히 살아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윤서는 그걸 몰랐다.그저 흙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는 것만 알았다.


떠들썩한 복도 – AI 교사 논란

점심시간이 막 끝난 학교 복도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게시판에는 큼지막한 글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AI 교사 도입 예정 – 학부모 간담회 안내〉형광색 테이프가 모서리를 감싸며 주목을 끌고 있었다.

“기계가 어떻게 애를 가르쳐요? ”한 엄마가 손가방을 움켜쥔 채 목소리를 높였다. 준호 엄마였다. “그럴 시간에 수학학원 하나 더 보내죠. 애들 인생 걸린 문제예요.”

맞은편 엄마가 팔짱을 끼며 맞받았다. “글쎄요, 저는 오히려 AI가 더 잘 가르칠 것 같은데요. 인간 선생님처럼 감정 기복 없잖아요? 애들한테 더 공평할 수도 있죠.”

순간 복도 공기가 묘하게 갈라졌다. 한쪽은 불안과 반발, 다른 쪽은 기대 섞인 호기심. 포스터 앞에서 모인 어른들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준호와 윤서도 그 속에 있었다. 준호는 손에 들고 있던 문제집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AI가 진짜 선생님 되는 거야?” 윤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님이 기계면… 우리 반에 화분 물 주라고 시킬까?”

준호는 피식 웃었지만 곧 다시 표정을 굳혔다. 어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들, 이거 다 실험대상 되는 거라고요!” “아니요, 시대가 바뀐 거예요. 적응해야죠!”

아이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단지, 어른들의 얼굴이 불안과 흥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 느꼈다. 복도 위 형광등 불빛이 잔뜩 밝아져서,마치 모든 게 조금 과하게 보였다.

윤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냥… 화분에 물이나 주고 싶어.” 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포스터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미래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보였다.


두 엄마의 대화 – 가치관 충돌

간담회 안내문 앞의 소란이 조금 가라앉은 후, 준호 엄마와 윤서 엄마가 우연히 복도 끝에서 마주쳤다.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갔고, 복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윤서 어머님, 보셨어요? AI 교사라니…”준호 엄마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여전히 날카로웠다. “애들 교육을 실험하겠다는 거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더 사람 손이 필요한 건데.”

윤서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이에요. 오히려 윤서가 좋아할 것 같아요. 기계 선생님이면 성적 압박은 덜하지 않을까요?”

“압박이요? 지금 애들한테 그런 여유 줄 때가 아니에요. 의대 경쟁 보셨어요? 벌써 중학교 수학 선행해야 한다니까요. 윤서도 학원 보내셔야죠.” 준호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우리 아이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윤서 엄마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는… 그게 꼭 행복으로 가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윤서는 그냥 흙 만지고, 작은 동물 돌보는 게 좋다는데…그게 언젠가는 자기 길이 될 수도 있잖아요.”

준호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길이요? 지금 세상에 그런 길이 어딨어요?애들 잘되게 하려면 검증된 길로 보내야죠. 의사만큼 안전한 직업이 있나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윤서 엄마는 벽에 붙은 포스터를 바라보았다.〈AI 교사 도입 예정 – 미래 교육 실험〉미래라는 단어가 형광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안전한 길…” 그녀가 낮게 말했다.“근데 혹시, 그 길 끝에 아이가 없으면 어떡하죠?”

준호 엄마는 말을 멈췄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어딘가 다른 세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확실한 길을 선택한 사람, 다른 하나는 길을 직접 만들어 보려는 사람.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이 교실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윤서가 손을 흔들었고, 준호는 그냥 조용히 서 있었다. 복도의 공기는 아직 조금 뜨거웠다.


두 집의 밤

준호의 집 – 형광등 아래

형광등 불빛이 식탁 위를 하얗게 내리쬐었다. 준호는 문제집을 펼쳐놓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수식과 영어 단어들이 흰 종이 위에 차갑게 박혀 있었다. 엄마는 맞은편에서 태블릿으로 다음 주 학원 시간표를 조정하고 있었다.

“이 문제, 다시 풀어봐. 아까도 틀렸잖아. ”엄마는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준호는 대답 대신 연필을 다시 잡았다. 손목이 조금 아팠다. 형광등 불빛은 너무 밝아서 그림자조차 짧았다. 방 안에 흙 냄새는 없고, 종이와 잉크 냄새만이 남아 있었다.


윤서의 집 – 흙냄새와 웃음

윤서의 집 마당은 아직 저녁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작은 텃밭의 흙은 물기를 먹어 진하게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고, 길고양이는 마루 끝에서 졸고 있었다. 윤서와 엄마는 작은 평상에 앉아 식혜를 마셨다.

“오늘 심은 상추, 잘 자랄까?” 윤서가 물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면 더 쑥 컸을 거야. ”엄마가 웃었다.윤서도 웃었다. 그 웃음이 마당에 은은하게 흩어졌다.

멀리서 매미 소리가 울렸고, 작은 마당 위로 별빛이 하나둘 떨어졌다. 윤서는 손에 남아 있는 흙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울음소리가 따뜻하게, 살아 있는 소리로 돌아왔다.

저녁 뉴스 화면이 거실 벽을 가득 채웠다. 서울 한강변 워터파크가 이른 개장을 알렸다. 평소보다 한 달 빠른 개장일. 자막이 화면 아래를 지나갔다.〈역대 최고 기온 경신… 폭염 대책 총력〉


준호의 집

준호는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펴놓고 있었다. TV 소리가 귀에 걸렸다. “올해 여름, 서울 최고 기온 40도 돌파 가능성…”펜이 멈췄다. 창밖 하늘은 아직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식을 기미가 없었다. 그는 다시 펜을 잡았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덥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뉴스 속 전문가 인터뷰

화면이 바뀌었다. 양복 차림의 남자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의대’만 바라보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하지만 인구 구조 변화, AI 진단 시스템의 보편화, 그리고 기후 위기 시대에는 의료보다 도시 생태·에너지·환경 기술 같은 분야가 훨씬 더 중요한 직업이 될 겁니다. 단순한 안정성만 보고 의대를 선택하는 건 위험합니다.” 기자의 자막: 〈미래전문가 한상우 박사〉

준호는 그 말을 들었지만, 손을 멈추진 않았다. 그는 문제집 페이지를 넘겼다. ‘나랑은 상관없어…’ 하고 중얼거리며.


윤서의 집

윤서는 손 부채질을 하며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냈다. “엄마, 올해 너무 더운 거 아니야?” 얼음을 손에 쥐고 뺨에 대었다. 차가운 기운이 잠시 퍼졌다가 금세 녹았다.마당의 상추잎이 축 늘어져 있었다. 윤서는 물뿌리개로 식물에 물을 주었다. “너희도 덥지?” 작게 중얼거리면서.

TV 뉴스는 계속 흘러갔다. “기후 변화와 폭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하나는 형광등 아래 답답한 공기 속에서,다른 하나는 흙냄새와 더위가 스며 있는 마당에서.

여름의 경고는 아이들 일상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그 저 더워진 계절이 당연해진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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