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시도와 과학적 가능성,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길.5장
무당, 샤먼, 영매가 사용한 ‘접속 상태’의 공통점
트랜스(Trance)와 현대 뇌과학의 연결점
— 무당, 샤먼, 영매라는 여러 이름들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사라진 것은 몸인데, 우리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목소리입니다.
“지금 저 사람에게 물어볼 수만 있다면…”
이 마음은 나라를 넘어, 시대를 넘어, 사람들을 같은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바로 **“그들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사람”**에게로요.
이 사람들을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무당, 시베리아와 몽골에서는 샤먼,
서양에서는 미디엄(medium) 혹은 영매,
다른 곳에서는 주술사, 힐러,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들을 무조건 믿지도, 단번에 부정하지도 않고,
“인류가 죽은 이와 대화하고 싶을 때, 어떤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맡겨왔는가”
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각 문화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이 맡은 역할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말을 전한다 돌아가신 조상, 사고로 떠난 가족, 이름 모를 혼령의 말을 대신 전합니다. “할머니가 이런 말을 전해달라 하신다네요.” “그 아이가,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하네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의사를 전한다
어떤 일의 길흉(吉凶), 앞으로의 선택, 마을의 큰 결정에 대한 신탁.
고대에는 전쟁을 할지 말지, 이주할지 말지 같은 문제도
이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 결정되곤 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달래고 다독인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굿이나 기도, 의식을 통해 위안을 주고, 마음이 무너진 사람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겉으로 보면 “영적인 역할”이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꿔보면 이들은 슬픔과 불안을 다루는 심리 상담자 역할을
오랫동안 해온 셈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신의 말”, “죽은 이의 말”이라는 형식으로 듣고 싶어 했고,
영매들은 그 욕구를 대신 떠안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전 세계의 여러 기록을 보면
“영혼과 대화하는 사람들”에게서 비슷한 인생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어린 시절 큰 병을 앓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한 사람
갑작스러운 사고, 번개를 맞거나 큰 자연재해를 겪은 사람
반복해서 이상한 꿈을 꾸고, 그 꿈 속에서 어떤 존재에게 “불렸다”고 느낀 사람
집안에 예전부터 무당, 샤먼, 영매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사람
과학적인 언어로 보면,
이들은 강렬한 충격 경험을 통해
자기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신이 너를 택했다.”
“조상이 네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너는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라.”
즉,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극단적인 경험을
“선택”이라는 이야기로 바꿔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 해석은 때로 그 사람에게
“나는 쓸모 있는 일을 위해 살아남았다”는 의미를 줍니다.
그래서 영매라는 역할은,
당사자에게는 운명 같은 짐이자,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꿈에서 돌아온 엄마의 말을 들은 사람,
죽은 친구의 목소리를 혼자 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영매의 특징은,
**“혼자 듣지 않고, 함께 듣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굿판, 의식, 집회, 상담 같은 공개된 자리에서
영매는 몸을 흔들거나, 기도하거나, 조용히 눈을 감고 앉은 뒤
“지금, 누가 와 있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집중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집단적 초점 맞추기입니다.
원래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맴돌던 그리움과 두려움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해 하나의 목소리로 모이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건 연기이고, 무의식의 연출이다”처럼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건 진짜다, 저 사람 입을 통해 우리 할머니가 말하고 있다”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고,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 여부를 떠나,
이 “함께 듣는 자리” 자체가
사람들에게 감정의 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영매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정교한 무대일까요?
지금의 과학으로는
“영혼이 실제로 들어왔다/안 들어왔다”를
실험실에서 깔끔하게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질문을 바꾸면,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이런 자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여기서 오가는 말들이, 남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누군가는 영매를 만나고 나서
오랫동안 품고 있던 죄책감을 내려놓습니다.
누군가는
“할머니가 괜찮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뒤
멀어졌던 가족과 다시 연락을 시도합니다.
또 누군가는
“이제 네 건강을 챙기라더라”는 말을 계기로
담배를 끊고, 검진을 받으러 갑니다.
이것이 진짜로 저 세상에서 온 메시지냐고 묻는다면,
명확한 대답을 내리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말들은 분명히 이 세상의 삶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영매들을 향해 “가짜다” 혹은 “진짜다”라고 서둘러 단정 짓기보다,
이렇게 질문해 보려 합니다.
“인류는 왜 이렇게까지 해서,
죽은 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을까?”
그 질문이,
영혼과의 대화를 과학과 심리, 의식의 탐구로 이어가는
다음 장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무당·샤먼·영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단순한 미신의 상징도,
완전한 신의 대변자도 아닌,
“죽은 이의 말을 전해 달라는
인간의 오래된 부탁을 떠안고 살아온 사람들”
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다음 소단원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접속 상태’,
즉 트랜스 상태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우리 뇌와 마음이 그 순간 어떤 변화를 겪는지
조금씩 풀어가 보겠습니다.
— 그들은 어떻게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고 느끼는가
영매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내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보기엔 같은 사람이, 같은 방에서,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정작 그 자신은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애매하고도 묘한 지점을,
우리는 이 책에서 **“접속 상태”, 혹은 트랜스(trance)**라고 부르려 합니다.
완전히 잠든 것도 아니고,
완전히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이 소단원에서는
그 상태로 들어가는 길,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겪는 느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종교적 시선과 과학적 시선을
한 번에 살펴보려 합니다.
트랜스 상태는,
복잡한 이론서가 아니라 몸의 리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북소리와 장구 소리
같은 멜로디를 길게 이어 부르는 구음과 찬송가, 만트라
몸을 흔들며 추는 춤과 의식적인 몸짓
깊고 고른 호흡, 또는 길게 이어지는 기도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밤샘 기도나 굿,
혹은 빛을 거의 차단한 어두운 방
이런 요소들은 문화마다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비슷한 일을 합니다.
“평소의 생각을 잠시 내려놓게 만들고,
한 가지 감정과 한 가지 리듬에 몰입하게 한다.”
우리는 보통,
수많은 생각과 할 일, 걱정 속에서 머리를 굴립니다.
그런데 북소리, 노랫소리, 기도, 춤 같은 반복되는 자극은
그 잡음을 서서히 밀어내면서,
의식의 초점을 한 곳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상과는 조금 다른
“문턱”에 서게 됩니다.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평범한 정신 상태도 아닌,
중간 지대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영매나 샤먼, 무당의 체험담을 모아보면
단어는 달라도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됩니다.
“처음엔 내가 말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이 나를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내 머리로 생각해서 고른 문장 같지 않았다.”
“몸은 힘든데, 동시에 멀리서
내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또렷하면서도,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마치,
우리가 뭔가에 깊게 몰입했을 때와 조금 닮았습니다.
운전을 오래 하다가
“어,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싶은 순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간 걸 나중에 알아차릴 때.
게임, 음악, 춤, 기도, 명상에 완전히 빠져
주변 소음이 잘 안 들리는 느낌.
이런 순간들에도
우리는 평소와 다른 의식을 맛봅니다.
트랜스는 그보다 더 깊고 더 감정적으로 자극된 상태라고
조심스럽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당사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한 말이지만,
나보다 큰 무언가가 끌고 간 것 같다.”
종교적 표현으로는 “신이 내렸다”, “조상이 오셨다”가 되고,
심리학적인 표현으로는
“무의식과 감정이 평소보다 앞서서 움직이는 상태”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트랜스 상태를 설명하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언어로 나뉩니다.
하나는 종교와 영성의 언어,
하나는 심리와 뇌과학의 언어입니다.
무당은 “신이 내렸다”고 말합니다.
샤먼은 “영들이 말을 걸어온다”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성령이 역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언어의 핵심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 말하는 이는, 본래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존재이다.”
이때 사람의 몸과 입, 목소리는
**‘통로’이자 ‘도구’**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영매는 스스로를 이렇게 느끼기도 합니다.
“나는 길이고, 통역사일 뿐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반복되는 리듬, 춤, 기도, 호흡은
뇌의 일부 영역을 진정시키고,
다른 영역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평소에는 억눌려 있던 감정과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은 줄어들고,
내면의 이미지와 소리에 더 민감해집니다.
그래서 과학의 언어로는
“이때 떠오르는 말과 비전은,
사람의 무의식과 기억, 감정이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사실 하나는 남습니다.
그 말들이, 때로 사람에게
깊은 위로와 변화의 계기를 준다는 점은
설명 방식과 상관없이 분명하다는 것.
이 책은
어느 한쪽의 언어만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언어를 모두 옆에 놓고,
“인간은 왜 이런 경험을 찾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트랜스 상태는,
한쪽 면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랜 죄책감에 시달리던 사람이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쏟으며 마음을 조금 놓는 경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
“그 사람이 아직 널 기억하고 있다”고 들은 뒤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경우.
말로 하기 힘든 감정이
울음, 몸짓, 의식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와
감정의 막힌 물길이 트이는 경우.
이럴 때 트랜스 상태는,
과학적으로 보든, 영성적으로 보든,
분명 사람을 조금 더 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 사례도 존재합니다.
영매나 종교 지도자가
두려움을 이용해 과도한 돈과 헌신을 요구하거나,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식으로
사람의 선택과 생각을 지나치게 조종하려 들거나,
예언이 빗나갔음에도
“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책임을 온전히 상대에게 떠넘기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트랜스 상태와 영혼의 메시지는
치유가 아니라 속박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트랜스 상태를 다룰 때,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제안합니다.
완전한 냉소 대신,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조심스럽게 바라볼 것.
맹신 대신,
“이 경험이 나와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계속해서 점검할 것.
트랜스 상태는
“영혼이 있다 / 없다”라는 논쟁을
단번에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유동적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또 다른 층위의 자기 자신,
또 다른 감정과 기억의 공간을 경험할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신과의 만남”이라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무의식과의 만남”이라 부릅니다.
이 책은 그 둘 사이의 문턱,
바로 이 트랜스의 지점을
차분히 바라보면서,
다음 장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한 번 더 바꿉니다.
“그들이 접속 상태에 들어갔을 때,
뇌와 마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다음 소단원에서,
우리는 명상과 기도, 최면과 트랜스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뇌파와 뇌 활동을 살펴보며
과학이 포착한 단서들을 살짝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 위로, 예언, 조언… 영매의 메시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제 우리는,
영매라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간다는 트랜스 상태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무슨 말을 전하길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돈과 시간과 눈물을 쏟을까?”
이 소단원에서는
영매와 무당, 샤먼, 미디엄이 전해 왔다고 알려진 말들을
조금 멀리서, 그러나 따뜻하게 바라보려 합니다.
그 말을 “진짜다, 가짜다”라고 재빨리 재단하기보다,
“이 말들이 어떤 패턴을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조심스럽게 짚어보려 합니다.
기록을 훑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시대가 달라도, 나라가 달라도,
죽은 이가 전한다는 메시지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뉩니다.
가장 많은 말은,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나는 이제 평안하다.”
“너를 탓하지 않는다.”
“더 이상 나 때문에 스스로를 벌주지 말아라.”
떠난 이가 남긴 말이라고 전해지는 문장들 속에는
놀랍게도 책망보다 위로가 훨씬 많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마지막에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 끝나지 않는 자기책망 속에서,
“그 사람”의 입을 빌린 듯한 위로는
때로 숨 쉴 구멍 하나를 내줍니다.
이것이 영혼의 진짜 목소리인지,
그리움이 만들어낸 자기 위로인지,
단번에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말을 들은 직후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쥐고 있던 돌멩이를
조금 내려놓듯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주 등장하는 메시지는
삶의 방향을 건드리는 말들입니다.
“이제 너 건강 좀 챙겨라.”
“너무 오래 버틴 그 일을, 이제는 그만 떠나라.”
“가족과 화해하라.”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해봐라.”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인 말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아주 현실적인 내용입니다.
질병, 일, 가족, 관계, 돈, 삶의 방향…
우리가 평소에 고민하는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던 결정을,
“죽은 이가 이렇게 말해줬다”
라는 형식으로 들었을 때
비로소 움직일 용기를 얻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는 조금 더 민감한 영역,
바로 미래에 대한 말입니다.
“곧 중요한 선택의 시간이 온다.”
“이 길은 막힐 것이다, 저 길을 택해라.”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동이 있다.”
이 영역은 특히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누군가 내 대신 결정해주길” 바라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말은 때때로
앞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과 책임을 마비시키는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예언을 들었을 때일수록
더 많은 질문과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하려 합니다.
영매의 말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기록으로도 남았습니다.
어떤 무속인은 굿이 끝난 뒤,
그날 전해진 말을 간단히 노트에 적어두었습니다.
어떤 영매 집단은
세션에서 나온 말들을 모두 받아적어 책처럼 묶었습니다.
종교 안에서는,
예언자나 성인이 들었다는 목소리가
경전·전승·증언의 형태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이 기록들을 다루는 태도는 명확합니다.
“이것이 모두 사실이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이것은 모두 허구다”라고 지워버리지도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이 기록 속 말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가?”
어떤 말은 사람들을 위로했고,
어떤 말은 혁명과 개혁의 불씨가 되었고,
어떤 말은 두려움과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같은 형식의 “영혼의 말”이라도,
어떤 삶을 만들어냈는지에 따라
우리는 그 의미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부분입니다.
독자인 우리가,
혹시 영매나 꿈, 기이한 경험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받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 책은 세 가지 질문을
작은 나침반처럼 제안합니다.
아니면 자유와 책임감을 키우는가?
“이 말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당신은 혼자 결정하면 안 된다, 늘 내 말만 따라야 한다”
이런 식의 메시지는
대개 두려움을 확대시킵니다.
반대로,
“결국 선택은 너의 몫이지만,
나는 네가 스스로를 더 아끼길 바란다.”
“네 안에도 이미 답이 있다,
나는 그걸 꺼내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이런 말은
듣는 사람 안에 자유와 책임감을 동시에 일깨웁니다.
어느 쪽이 더
건강한 방향으로 삶을 이끄는지는
직관적으로 느껴집니다.
아니면 내 일상의 작은 변화를 요구하는가?
“이 굿 한 번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 의식만 하면, 너는 아무 노력 없이 달라진다.”
이런 말은 달콤하지만,
우리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 위험이 큽니다.
반대로,
“네 생활습관을 이렇게 조금 바꿔보라.”
“이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용기를 가져보라.”
“너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매일 조금만 확보해 보라.”
이런 말은 당장 버거워 보여도
삶을 조금씩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라지는가?
처음엔 크게 울림이 있었지만,
며칠만 지나면 아무 쓸모가 없는 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들었을 때는 잘 와닿지 않았는데
돌아보면 계속 마음에 남아
작게나마 지침이 되어준 말이 있습니다.
3개월 뒤,
1년 뒤,
5년 뒤에도
그 말이 여전히
나를 조금 더 넓고 따뜻한 쪽으로 이끌어 준다면,
그것이 영혼의 말이든,
무의식의 말이든,
혹은 단지 우연히 스친 문장이든,
이미 충분히 귀한 메시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어느 정도 구분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우연일 가능성이 크다.”
“이건 분명 내 마음이 만들어낸 자기위로 같지만,
그래도 나를 살게 하는 말이다.”
“이건 설명하기 어렵지만,
내 삶에 깊고 오래된 흔적을 남긴 특별한 경험 같다.”
굳이 하나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많은 일들은
딱 떨어지는 이름이 없을 때가 더 많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보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
“그 말을 붙잡고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방향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영매라는 사람들,
트랜스라는 상태,
그리고 그들이 전해 온 말의 패턴과 해석 기준을
천천히 걸으며 보았습니다.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볼 시간입니다.
“정말 그들이 말한 걸까?”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누군가는 영매의 말을 통해,
오랫동안 미뤄 둔 화해를 시도합니다.
누군가는 꿈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말을 계기로
자신의 건강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이제 네 삶을 살아라”라는 메시지를 듣고
비로소 죽음을 슬픔만이 아니라 전환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 순간,
“죽은 이의 말”은
더 이상 저편의 목소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말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나의 선택,
나의 행동, 나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조용히 이런 문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와의 대화란,
결국 산 자가 자신과 대화하는 일이다.”
— 장례, 제사, 굿, 예배라는 ‘집단 대화의 무대’
지금까지는
영매라는 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상태와 말에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이와의 대화”는
혼자 있는 방보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더 자주 일어납니다.
장례식장,
제사상 앞,
굿판,
미사와 예배당,
위패와 사진이 놓인 작은 제단 앞.
이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서만 대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기도문을 읽어주고,
누군가가 대신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가 대신 울어줍니다.
이 소단원에서는
“영매와 종교 의식”이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는 5장을 마무리 짓는 동시에,
2부로 넘어가기 전에 꼭 짚어야 할
마지막 퍼즐 조각입니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슬픔 그 자체보다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슬픔을 혼자 감당하지 않기 위해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왔습니다.
장례식에서 목사가, 신부가, 스님이,
혹은 상주 대신 누군가가 기도문과 추도사를 읽어줍니다.
제사상 앞에서
대표로 한 사람이 술을 따르고 절을 합니다.
굿판에서는 무당이 춤추고 노래하며
돌아가신 이를 대신 불러냅니다.
겉으로 보면 의식의 형식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아주 단순한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너 혼자 우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너와 함께 울고 있다.”
이때 영매와 종교 지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죽은 이의 말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 흘려보내는 방식을
공동체에게 보여주는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 소단원에서
트랜스를 개인의 상태로 살펴보았다면,
여기서는 집단 트랜스에 대해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장례식, 예배, 굿, 제사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함께 같은 노래(찬송가, 염불, 굿 소리)를 부르거나 듣고,
함께 일어나고 함께 앉으며,
함께 울거나, 함께 침묵합니다.
이 반복되는 행동과 리듬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같은 방향으로 모여듭니다.
혼자 우는 것 같았던 사람이
옆 사람의 눈물을 보고
“나만 약한 게 아니구나”를 깨닫고,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
북소리, 종소리, 찬송, 염불을 타고
조용히 흔들립니다.
이 상태를 종교적 언어로는
“성령이 임했다”, “신이 내렸다”, “영이 움직인다”라고 말할 수 있고,
심리학과 뇌과학의 언어로는
“집단이 감정과 주의를 한 곳에 모으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언어로 보든,
그 순간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서로에게 조금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종교 의식과 영매의 말은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함께 이야기합니다.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하나하나에
“이건 할머니가 좋아하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붙습니다.
굿에서 무당이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를 말해줄 때,
그것은 단지 영혼의 소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이와의 대화는 동시에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대화가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을
‘병으로 고생하다 떠난 사람’으로만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이러한 순간들에서 우리를 웃게 하고
도와주었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인가.”
영매의 말, 종교 의식의 기도와 설교,
굿판의 노랫말, 제사 때의 짧은 한마디들은
결국 이 질문에 답을 내리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같은 말을 듣는 자리에는
항상 위험과 책임이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 말만 진짜다”라는 태도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상처 줄 때.
영매나 종교 지도자가
개인의 두려움과 약점을 이용해
과도한 헌금, 비용, 헌신을 요구할 때.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할 때.
이럴 때,
영혼과의 대화는
위로와 치유가 아니라
두려움과 억압의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 의식 속에서 들은 말일수록
앞서 5-3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두려움을 키우는가,
아니면 자유와 책임감을 키우는가?
이 말은 기적만 약속하는가,
아니면 내 삶의 작은 변화를 요구하는가?
이 말은 시간이 지나도
나와 우리에게 여전히 도움이 되는가?
집단이 함께 듣는 말일수록,
그 영향을 받는 사람 역시 많습니다.
그래서일수록,
그 말에는 더 큰 윤리와 책임이 필요합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종교 의식과 영매, 무속, 제사는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죽음과 상실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공동체가 함께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오래된 안전장치.”
슬픔을 혼자 견디지 않도록,
죄책감에 평생 묶여 있지 않도록,
죽음 이후의 세계를
완전히 암흑으로만 느끼지 않도록,
인류는 의식과 이야기, 노래와 기도, 영매의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영혼의 실재를 믿든 믿지 않든,
이 장에서 우리가 확인한 사실은 하나입니다.
“죽은 이와의 대화를 꿈꿔온 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우리 쪽이었다.”
우리는 그 대화를 통해
떠나간 사람을 이해하려 했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제 5장은,
영매라는 개인,
트랜스라는 상태,
메시지의 내용,
그리고 공동체라는 무대를
한 번에 훑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오래된 의식과 체험들을
“뇌와 마음, 기억과 무의식의 작동”
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살펴보려 합니다.
2부에서는
임사체험, 자동쓰기, 트랜스 상태,
기도와 명상, 영적 체험을 겪는 사람들의 뇌에서
도대체 어떤 움직임이 포착되었는지,
과학이 발견한 조각들을 따라가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여정은,
영혼의 가능성을 지우려는 시도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찬양하려는 시도도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묻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뇌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얼마나 깊고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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